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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예린 Jan 16. 2022

'건강', '행복' 뻔하지만 뻔하지 않는 소원

어릴 적 내 손목에는 늘 염주가 있었다. 할머니가 절에서 사 온 염주였다. 어두운 밤 깜깜한 수세식 화장실에 오래 앉아있을 때, 불쑥 무서움이 찾아오면 왼쪽 손목에 낀 염주를 빼 오른손에 쥐고 알알이 엄지손가락으로 돌렸다. 염주를 돌릴 때마다 '부처님이 날 지켜줄 거야' 하는 믿음이 생겼다.

초하루, 백중, 동짓날이 되면 할머니는 어린 내 손을 잡고 부산 서구 남부민동의 칠보사로 향했다. 천왕문을 지키던 사천왕 앞 합장하는 할머니를 따라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였다. 포근한 향냄새를 맡으며 일정한 높낮이로 절 간 안에 울려 퍼지는 목탁과 염불 소리 속으로, 할머니 손을 잡고 대웅전으로 향했다. 금빛 반짝이는 부처님 미소가 인자했다. 부처님을 향해 삼배를 올리고 나면 할머니는 날 공양간으로 데려갔다.

동짓날, 할머니는 귀신을 쫓아야 한다며 공양간에서 받은 팥죽 한 숟갈을 후후 식혀 입에 넣어줬다. 하얀 새알이 쫀득하게 씹혔고 달곰한 팥죽은 자꾸 손이 갔다. 팥죽을 먹다 입이 달면 시원한 동치미 국물을 한 입 들이켰다.


"아이고 잘 먹네."


할머니 말에 팥죽을 바닥이 보일 때까지 숟가락으로 싹싹 긁어먹었다.

지난 동짓날, 할머니 생각이 참 많이 났다. 일곱 살 꼬맹이의 기억은 오래도록 할머니를 그리워할 추억으로 남았다.


"엄마, 여기는 어디야?"

"부처님이 있는 절이라는 곳이야. 여기서 사람들이 부처님한테 소원도 빌어."

아이들과 함께 처음으로 절을 방문했다. 소원 이야기를 하자, 크리스마스가 생각났는지 반짝이는 눈으로 첫째가 말했다.

"엄마 그럼 장난감 가지고 싶다는 소원도 들어줘?"

부처님이든 산타할아버지든, 아이들에게는 가지고 싶은 장난감을 사주는 존재일 뿐인가 보다. 피식 웃음이 났다.

아이들이 내 검지 손가락 하나씩 꼭 잡고 일주문을 넘었다. 겨울바람에 휘날리는 연등을 보며 아이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색깔을 외친다.

"나는 분홍색이 좋아.", "나는 빨간색!"

일주문을 지나 천왕문.

"하온아 여기는 사천왕이 있는 곳이야. 나쁜 귀신을 물리쳐 주는 신이야."

"엄마 그러면 이 아저씨들이 나쁜 괴물도 물리쳐줘?"

"그럼, 자! 엄마 따라 두 손 모으고 인사하자."

"안녕하세요."


대웅전에 들려 합장을 한 뒤 삼배했다.

예전에는 부처님께 인사드린다는 생각에 어떤 바람도 외지 않고, 절을 했다. 가족이라는 내 울타리가 생기니, 소원도 생겼다.

'올해도 우리 가족 건강하게 해 주세요.'

절 한쪽 건강, 행복이 적힌 소원지들이 바람에 날릴 때마다, 다들 뻔한 소원을 빈다며 시시했었다. 이제는 내가 그 시시한 소원을 빈다.

'건강', '행복' 시시하고 뻔하지만, 손에 잘 잡히지 않는 단어, 때로는 인력으로 되지 않는 단어, 그러기에 모두가 건강과 행복을 바라고 또 바란다는 걸 이제 안다.


"엄마, 나 부처님한테 미니 특공대 로봇 달라고 빌었다."

대웅전 계단 앞에서 신발을 신던 첫째가 말하며 배시시 웃었다.

"그래, 부처님이 소원 들어주실 거야."


절을 나오는 길, 아이들에게 줄 염주를 하나씩 샀다.

나의 건강과 행복을 빌며, 내 팔에 염주를 끼워줬던 할머니처럼.

아이들의 건강과 행복을, 내 바람을 담아 염주를 고사리손에 쥐여줬다. 낚싯줄에 끼워진 알록달록한 장난감 팔찌이지만 어릴 적 내가 염주 하나에 의지해 두려움을 이겨냈듯, 어쩌면 어마어마한 힘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처음으로 내게 부처님에게 비는 소원이 생긴 날,

앞 냇가의 윤슬이 나타나다 사라지길 반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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