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말했다. 뭐라고 정의할 수도 없었던 내 허무함을 글 앓이라고 했다. 2년 전 나는 출간에 목말랐다. '작가'라는 명함을 만나는 사람에게 들이밀 때마다, "어떤 책을 내셨나요?" 하는 질문에 답해야 했다. 각종 공모전과 신춘문예를 기웃거렸다. 세상이 나에게 '너를 증명하거라'며 소리칠 때마다, 막다른 골목길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책을 낸다는 건, 그래서 더 절실했었는지도 모른다.
어릴 적 나는 잘 넘어지는 아이였다. 엄마는 내 걸음걸이를 탓했다. 양발을 안으로 스치듯 걷는다고 했다. 검정 구두 안쪽은 늘 하얀 스크래치 투성이었다. 걸음걸이는 바뀌지 않았다. 여기에 덤벙거리는 성격이 보태졌다. 열네 살에는 미닫이 청소함의 문틈에 새끼발가락이 걸려 복도를 미끄러지듯 넘어졌다. 열다섯은 걷다가 내 발에 걸려 엎어졌다. 열여덟에는 버스를 놓칠까 봐 정류장까지 전속력으로 달리다 미처 빙판길을 보지 못했다. 미끄러진 나는 땅에 엎어졌다가 정류장에 모인 사람들 시선을 느끼고 벌떡 일어났다. 절뚝거리며 정류장까지 걸어갔다. 눈물이 찔끔 났지만, 창피한 게 더 부끄러워 아파하지 못했다. 버스에 탄 뒤 의자에 앉아 무릎을 보니 검정 스타킹은 무릎만 동그란 구멍이 뻥 뚫렸다. 무릎에서 빨간 피가 철철 흘렀다. 그제야 다친 무릎을 보고 펑펑 울었다.
스무 살이 된 후에는 넘어지는 일이 별로 없었다. 대신 팔이며 허벅지에 나도 모르는 멍이 드는 경우가 많았다. 집에서는 덜렁이였지만 밖에서는 느리게 걸으며 차분하려 애썼다. 기자 명함을 받아서 들고는, 지적이고 차분한 '기자' 이미지에 나를 구겨 넣었다. 몰라도 아는 척, 알아도 모르는 척을 척척해가며 일상 구석구석을 '기삿거리'를 찾아 꼼꼼히도 살폈다. 작가 명함이 나오고, 출간에 목마를 때 나의 갈증을 해소한 기회만 노려봤다. 기회를 꽉 잡았고, 기획서로 머물렀던 중도입국청소년 인터뷰를 진행했다. 인터뷰를 다 마친 뒤 컴퓨터 앞에 앉았다. 글 쓰는 속도는 빠르게 앞으로 나갔다가 더디게 뒤로 물러나기를 반복했다. 매일 마음이 돌부리에 넘어졌다가 일어났다.
나는 작가이자, 편집자가 되어야 했다. 자기 검열은 얼마나 어려운가. 먼저 나온 비슷한 색깔의 책들, 시나리오, 글쓰기 방법론을 뒤적거리며 길을 찾았다. 지도가 없으니 '이 길로 가면 맞을 거야'하며 짐작에 의지해왔다. 그 와중에 나보다 먼저 출간한 작가를 바라보는 마음은 여러 갈래였다. 동경, 부러움, 시기, 질투 오만 감정이 일렁이다는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5월 내 이름 석 자가 적힌 책을 받아들였으나, 반가움과 기쁨은 '후' 불면 꺼지는 생일 케이크 촛불 같았다.
넘어지면 창피함은 30초였다. 상처가 아물기까지 3~4일이 걸렸고 흉터가 생기면 그날의 창피함은 마음에서 지워졌고, 기억만 남았다. 책을 낸다는 건 마음이 넘어졌던 돌부리를 치우고, 다시 일어난 나의 어깨를 두드려주는 일이었다. 더불어 원고를 쓰던 나의 오만함 그 뒤에 들이닥칠 창피함이 평생 남았다. 그러다 쌓여있던 책을 바라보며 허무함이 몰려왔다. '다시 책을 낼 수 있을까'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출간 후에 한 달이 지나, 약속 없이 찾아간 책방에서 그를 기다렸다. 책장 속에 숨은 글귀를 발견했다.
'당신에게 주어진 일을 하고 그 일을 잘해라. 그런 다음 흘러가게 두고 신의 뜻을 기다려라. 필요한 것은 그것뿐이다. 인정받고 보상받는 것은 그저 부수적인 요소일 뿐이다. 그저 일하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하다.'
우연히 마주한 글귀는 힘이 됐다. 이어 책방에 들어온 그가 박하차를 내어주며, 글 앓이 후 다시 쓰게 된다고 말했다. 말과 글이 허무함에 넘어졌던 나의 손을 꼭 잡아줬다. '이래서 책과 책을 사랑하는 이를 좋아할 수밖에 없다.'라고 생각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책을 한 아름 들었다. 함께 읽었으면 좋겠다고 나눔 받은 책, 내가 잘하는 일을 더 잘할 수 있도록 토닥거려주는 책, 에스프레소만큼 진한 현실을 보여주는 책. 말과 글을 벗 삼아 그저 일할 생각이다. 그것이 지금 나의 최선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