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강아름 Aug 15. 2024

경계 너머의 나 : 가까워질 때 느끼는 두려움과 성장

아름세계 2024년 8월호 ㅣ 신작 에세이 ㅣ 초록돼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타인과 가까워지는 일은 어떤 이에게는 설레고 짜릿한 경험이겠지만, 누군가에게는 어쩌면 여태 시도했던 많은 도전 중에 가장 큰 용기가 있어야 하는 상황일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어느 날 운명처럼 인연이 찾아왔고 그렇게 사랑에 빠졌다고 말하지만, 나는 책, 음악, 영화와 같은 다양한 매체에 만연한 이러한 인식에 줄곧 의문을 품곤 했다. 간혹 누군가가 ‘눈에 들어오는’ 순간은 있어도, 그것이 사랑으로까지 이어지려면 큰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부분, 나는 그러한 노력을 기울이고 싶을 정도까지 상대방이 궁금하지 않았다. 그 수많은 관문을 통과하려면 대단한 노력과 그 노력을 기울이고자 하는 의지 또한 필요한데, 항상 둘 중의 하나가 갖춰지지 않은 상황이었다. 상황이 여의찮겠거니 했던 내가 요즘 들어, 왜 여태까지 이러한 의지와 힘이 부족했는지 알 것 같다고 생각한다.


 나는 누군가와 가까워져서 경계가 사라지는 것이 매우 두렵다. 나만의 독특한 취향과 가치관을 알리는 것도 두렵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영향을 받아 나의 확고했던 가치관과 취향이 변화해 가는 것도 두렵다. 각 개체를 구분 짓던 명확한 경계가 사라지고 합일을 이루는 것이, 많은 문화와 종교를 막론하고 사랑을 찬양하는 이유이겠지만, 경계가 사라지는 것은 내가 두려워하는 것 중 하나이다.

     

 김현철 작가의 <불안하니까 사람이다>를 읽다가 ‘해체 불안’이라는 개념에 대해 알게 되었다. 심리학에 깊이 빠져들어 관련 서적을 게걸스레 읽어나간 지가 벌써 만으로 6년인데도 새로운 개념을 발견할 수 있다니, 심리학이란 학문이 얼마나 방대하고 깊은지 새삼 놀랍다. 대상관계 이론에서 파생한 해체 불안은 자신의 존재감이 모호할 때나 살아 있다는 감각이 사라질 때 찾아오는 느낌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처벌받을 것에 대한 불안이나 사랑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은 적어도 나와 상대의 존재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분리 불안이나 버림받을지 모른다는 유기 불안 또한 상대가 사라질까 두렵긴 해도 나라는 존재 자체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해체 불안은 나라는 존재가 사라질 수도 있다는 불안입니다. 심리학에선 생애 최초로 느끼는 불안으로 여기기도 합니다. 또 우리 몸을 감싸는 공기압처럼 자신을 달래주는 내면이 부족해 자칫 통제력을 잃을까 하는 두려움에서 발생합니다." <불안하니까 사람이다>, 김현철     


 완벽히 설명할 순 없어도, 적어도 누군가와 가까워질 때마다 내 내면을 커다랗게 집어삼켰던 두려움에 이름을 붙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름을 불러 주자, 두려움은 비로소 나에게 다가와 얼굴을 보여주었다. 얼굴을 보니 더욱 궁금해졌다. 너는 왜 나를 집어삼킨 것인가.     


 오래전부터 엄마는 나에게 “나는 이러이러한 사람인데, 너도 이러이러한 걸로 봐서 우리는 진짜 닮았어. 내가 이랬으니까, 앞으로 너도 이럴걸?”이라고 말씀을 많이 하시곤 했다. 그렇게 어린 나의 눈에는 엄마가 곧 나의 미래로 보였다. 엄마가 알려주시는 나의 성격이 나의 '진짜 성격'이었고, 엄마가 알려주시는 취향이 나의 '진짜 취향'이었고, 엄마가 알려주시는 꿈이 나의 '진짜 꿈'이었다. 그랬던 내가 엄마와 구분되는 고유한 존재라는 것을 깨달은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늦은 만큼 더 고통스러웠다. ‘너는 나와 같아’와 같은 심리적 메커니즘을 멜라니 클라인은 ‘투사적 동일시’라고 명명했다. 부모로부터 투사적 동일시를 많이 당한 자녀는, 자신을 부모로부터 적당한 경계를 지닌 독립된 개체로 보지 못하고 부모에게 종속된, 편입된 존재로 볼 가능성이 높다.    

  

 “대체로 어머니들은 자신을 몸 안에서 자라고 있는 아기와 이런저런 방식으로 동일시한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그들은 아기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알 수 있는 아주 강력한 감각을 얻게 된다. 이것이 멜라니 클라인이 말하는 투사적 동일시이다. 아기와의 이런 동일시는 출산 후 일정 기간 지속되다가 차츰 의미를 잃게 된다. 일반적으로 유아를 향한 어머니의 특별한 관심은 아기의 출생 과정 이후에도 지속된다. 정상적인 어머니는 유아가 분리하려는 욕구를 가질 때 유아와의 동일시에서 벗어날 준비를 마친다. 그러나 어떤 어머니들은 처음에는 좋은 돌봄을 제공했으나 결국 그 동일시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함으로써 그 과정하는 데 실패한다. 그럴 경우 어머니는 유아와 융합된 채로 남아 있게 되며, 자신에게서 유아가 분리하려는 것을 지연시키는 경향이 있다. 어떤 사례에서든지 유아가 어머니에게서 분리되는 과정에서 유아가 필요로 하는 속도와 정확하게 맞춘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성숙과정과 촉진적 환경>, 도널드 위니캇.     


 종종 나는 엄마한테 잡아먹힌 존재가 아닐까, 엄마의 그림자는 어디까지일까 궁금해하곤 한다. 그 그림자에서 벗어나려고 부단히 노력하던 과정이 나를 상담심리 대학원으로 이끌었다. 나를 열 달 동안 품어주셨고 지난 세월 내내 나를 가장 우선순위에 두고 살아오셨던 어머니로부터 나를 분리하려는 노력을 들이고 있던 나에게, 새로운 누군가와 다시 가까워지는 건, 누군가와 동일시됨으로써 겪었던 고통을 다시 겪을지도 모른다는 불안함을 안겨주었다. 성취지향적이고, 상대방의 감정보다는 현재 상황에 대한 객관적인 인식을 중시하는 엄마와의 대화 속에서 종종 나는 나의 감정이 정당하지 못한 것처럼 느껴지곤 했다. 이해가 어려워서 나를 더 이해하고자 '지금 이 상황이 왜 슬퍼?'라고 뱉으셨더라도, 나는 그러한 말이 비난처럼 들렸던 것 같다. '이 상황이 슬프면 안 되나? 내가 나약한가?'라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자책하는 상황이 누적되자, 언제부터인가 어떤 상황이 벌어졌을 때 내가 기뻐해야할지 슬퍼해야할지, 화를 내도 되는 건지 혼란스러워졌다. 이러한 모습은 지금까지 이어졌다. 상대가 나를 속상하게 하는 말을 해도, 속상한 내 감정보다는 '상대방이 나를 속상하게 하려한 건 아닐 텐데, 굳이 티를 내지 말자'라며 상대방의 감정을 더 이해하려고 한다. 다름을 인정받지 못하고, '너는 나랑 같을 거야' 혹은 더 나아가서는 '너는 왜 나랑 달라?'라고 비난받는 상황을 감당하기에 나는 아직 많이 미성숙하다.

    

 심리학을 공부하다 보면, 생후 2~3년 간의 주양육자와의 경험이 남은 인생에 전반적으로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는지 알게 된다. 처음에는 ‘그냥 수많은 관점 중에 하나일 뿐이야'라고 생각했지만, 서글프게도 세부적 이론을 막론하고 현재 주류를 이루는 대다수의 이론이 생애 초기에 주양육자와 가진 애착의 질을 굉장히 중시한다. 주양육자가 아동의 요구에 얼마나 민감하고 수용적으로 반응했는지가, 아동의 ‘내적참조 체계’가 되어, 자신의 요구에 세상이 얼마나 반응적인지, 더 나아가 자신이 얼마나 가치 있는 존재인지에 대한 인식으로도 이어진다고 한다.      


 애착유형은 크게 두 가지, 세부적으로는 네 가지로 나뉜다. 크게는 안정형 애착과 불안정 애착으로 나뉘고, 불안정 애착 중에서도 회피형, 저항형, 혼란형으로 나뉜다. 각각의 애착유형의 특징을 공부하면서 본능적으로 나는 안정애착은 아닐 거라는 것을 느꼈다. 애착유형 테스트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했지만, 판도라의 상자처럼 괜히 열었다가 마주하고 싶지 않은 현실을 맞닥뜨렸을 경우에 감당해야 할 허탈함과 슬픔을 견딜 자신이 없어서 피하고 피했던 내게 현실을 직면하게 한 것은 대학원 첫 학기에 수강한 가족상담 강의의 과제였다. 애착유형 테스트를 하고, 자신의 애착유형을 파악한 후 이와 관련된 경험을 작성하는 성찰보고서 과제였다. 테스트 결과, 혼란형 애착이 나왔다. 사실 불안형 애착 세 가지 중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심각하고 불쌍하다고 느낀 애착 유형이었다. 왜냐하면 ‘누군가가 다가오는 것이 부담스러워 떠나고 싶지만, 그 사람이 떠나가는 건 불안한’ 정말 웃긴 유형이기 때문이다. 내가 그런 ‘불쌍한’ 애착유형에 해당할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는데, 혼란형 애착이라니, 울컥 설움이 복받쳐 올랐다. 누군가가 다가오는 게 부담스럽다는 것까지만 인식했지, 막상 그 사람이 떠나갈 때 엄청난 슬픔을 느꼈던 경험을 떠올리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생애 초기에 정확히 어떠한 방식으로 양육이 되었는지, 그리고 부모님과 어떠한 정서적 교류, 얼마나 많은 신체적 접촉이 있었는지는 사실 알 수 없다. 내가 기억하는 한, 그래도 나는 충분히 사랑받고 자랐고, 부족함 없이 자랐다고 생각하는 데, 생애 초기에 각인되는 애착 유형을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없다는 것이 답답하기도 하다. 아쉽고 속상한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부모님을 원망하고 싶진 않다.      


 다행히 혼란형 애착도 회득혁 안정 애착으로 나아갈 수 있다. 안정형 애착을 ‘획득’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고무적인가. 상담심리에서는 상담사가, 한평생 불안정한 애착으로 고생했을 내담자에게 처음으로 안정형 애착을 경험하게 해주는 대상이 되어줄 것을 강조한다. 인간의 변화 가능성을 믿는 것이 상담심리학의 기본 전제이기 때문에, 내담자가 무얼 하든 그 존재 자체를 인정해 주는 경험들이 쌓이고 쌓여 내담자에게 안전기지를 제공해 주고, 그렇게 다시 상담실 밖으로 나가서도 다른 사람들과 안정적인 애착 관계를 쌓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상담사의 역할이다. 힘이 없는 내담자에게 상담을 통해 힘을 주려면, 그 전에 스스로를 잘 상담해줄 줄 알아야 한다. 다른 사람에게 좋은 상담자가 되려면, 먼저 나 자신에게 좋은 상담자가 되어야 한다. 억누르고 다그쳐왔던 나의 감정에 타당성을 부여해주고 다독여주는 게 그 시작이다.


 현재의 나는 나를 따뜻하게 지지하고 사랑해 주는 사람들로 둘러싸여있다. 그리고 설령 내가 실패를 맛보고 그로 인한 상처에 허덕이더라도 끝까지 내 곁을 지켜줄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과 주고받는 사랑과 따뜻한 지지를 안전기지 삼아,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가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용기 있게 다가가고, 또 그렇게 따뜻한 관계를 형성하고, 그렇게 나를 지탱해 주는 따뜻한 관계를 많이 이루고 싶다. 그렇게 누군가에게 안전기지가 되어줄 수 있는 상담자이자 친구, 연인, 동생, 딸이 되고 싶다.     

매거진의 이전글 아름세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