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세계 2025년 3월호 ㅣ 신작 에세이 ㅣ 강아름
나는 글을 쓴다. 어느 순간부터 단순한 취미를 넘어섰다. 글을 잘 써서 누군가가 나를 '작가'라고 불러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 3년간은 교정직 공무원이라는 직업이 날 먹여 살렸고, 당분간은 공군 장교라는 직업이 날 먹여 살릴 테지만, 작가라는 직업으로도 인정받고 돈을 벌고 싶다. 아직은 부족하지만, 지금처럼 꾸준히 쓰다 보면 언젠간 그렇게 될 거라고 막연히 상상한다. 그러나 김영하 작가의 이상문학상 수상소감은 나를 비련의 주인공으로 만들었다.
(제36회 이상문학상 대상 수상자 김영하 수상소감 中 일부 발췌)
작가들이 흔히 하는 농담 중엔 이런 말이 있습니다.
"글만 안 써도 되면 참 좋은 직업인데 말이야."
물론 이것은 말이 안 됩니다. 왜냐하면 글을 안 쓴다고 해서 작가가 작가가 아니게 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가능하지 않은 일을 가능한 것처럼 말하기 때문에, 즉 청자의 예측에서 벗어나기에 농담인 것이겠지요. 직업으로서의 작가는 이상합니다. 흔히 글을 쓰는 사람을 작가라고들 하지만 글을 쓰지 않고 있어도 작가라고 불립니다. 단 한 작품만 남기고 죽은 사람도 작가로 불릴 자격이 있습니다. 저만 해도 글을 쓰고 있을 때보다 쓰지 않고 있을 때가 더 많습니다. 사실 책상 앞에 앉아서 글을 쓰는 시간은 별로 길지 않습니다. 책을 읽거나 산책을 하거나 구상을 하는 시간이 일상의 더 큰 부분을 차지합니다. 몇 년 동안 한 권의 책, 한 편의 단편소설도 안 쓰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동네 사람들은 저를 작가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작가는 글을 쓰고 있는 사람이라기보다 글을 써야 한다고 믿는 (혹은 그렇게 믿어지는) 사람인지도 모릅니다. 써야 하는데, 써야 하는데, 생각하며 살아가는 사람들. 즉 작가는 글을 쓴다는 행위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의무를 짊어진 존재를 일컫는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해서 작가는 하나의 직업이기 이전에 일종의 신분이며, 스스로 글을 써야 한다고 생각하는 한, 이 신분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작가를 '신분'이라고 하니까, 꼭 천민이 된 기분이다. 작가로 태어나긴 했지만, 급이 떨어지는 느낌. 차라리 작가도 직업일 뿐이었으면 좋겠다. 그래야 아직 경험과 실력이 부족해서 인정받지 못할 뿐이지, 노력하면 작가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라도 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좋은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그런 생각은 사그라든다. 김영하 작가에게 제36회 이상문학상 대상을 쥐여준 '옥수수와 나'의 시작은 정말 매혹적이다. 자신을 옥수수라고 생각하여 닭들이 쫓아와 잡아먹을까 봐 두려워하는 주인공의 모습. 뒤 페이지를 넘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뿐 아니라 유쾌하고 쫄깃한 리듬감을 가진 펑크 같은 매력과, 때가 되면 작품을 찍어내는 자본주의 속 작가의 숙명과 순수한 문학의 가치라는 무거운 주제를 가진 교향곡 같은 매력을 동시에 지닌 소설이다. 읽으면서 입이 다물어지질 않았다. 게다가 표현력은 또 어찌나 풍부하던지, 문장을 읽을수록 책 속의 세계로 빠져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귀족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닿을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이다. 작가가 직업일 뿐이라면, 글을 쓸 필요가 없다. 돈이 안 되니 포기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황금 같은 주말에도 카페에 나와 글을 쓰고 있다. 언제부터 겨우 글을 써야 한다는 생각 따위에 믿음이 생겼을까.
글을 쓰기 전에는 심리에 집착했다. 그렇다고 심리학 이론을 파고드는 것은 내 스타일이 아니고 그럴만한 인재도 아니다. 난 궁금하면 관련 분야의 전문가로 활동하는 사람을 만나서 조언 구하는 것을 좋아한다. 멘토를 만나는 방법은 실제로 방향을 설정하는 데 큰 도움이 되기도 하고, 괜히 꿈에 다가간 것 같은 좋은 기분이 들기도 한다. 당시 가장 관심 있던 분야는 '행동심리'였고, 관련 책을 읽다 행동분석 전문가인 작가님과 만나고 싶어졌다. 메일을 남겼으나 답장이 없어 출연하신 방송들을 찾아보았고, 캡처된 방송 화면에 소속된 연구소의 이름이 나왔다. 당시에는 마땅한 연구소 홈페이지가 없어 헤매다가, 인스타 주소를 알게 되어 DM을 보냈다. 그리고 만나자는 답장을 받았다. 아래 내용은 당시 보냈던 메일인데, 가끔 당시의 열정을 다시 느끼고 싶을 때 읽곤 한다.
이즘랩에 입사하고싶은 99년생이 교수님께
안녕하세요! 임문수 교수님. 저는 숭실대 법학과를 다니다가 휴학 중인 학생입니다. 중학교 때부터 인간의 심리와 범죄 수사에 관심이 많았고 고등학교 1학년 때 '표창원의 추리캠프'에서 경험한 것을 계기로 범죄심리분석관을 꿈꾸게 되었습니다. 'Lie to me'라는 미국 드라마를 통해 미세표정분석과 거짓말분석에도 큰 관심을 가지게 되어 범죄 심리와 미세표정을 연구해서 교수님처럼 연구소를 운영하는 것을 최종적 목표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쉽게도 수능으로 심리학과를 가지는 못했지만, 법학과에서 1년 동안 공부하고 나서 휴학을 했습니다. 사실은 휴학을 하고 공시를 준비하였으나 현재는 길을 잃은 상태입니다. 그러다가 교수님이 쓰신 책인 '사람의 마음을 읽는 시간 0.2초'를 읽고 국내에 이 정도로 비언어 커뮤니케이션에 대해 전문적인 분이 없을 거란 생각이 들어 책에 적혀있는 이메일로 저의 사정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바디랭귀지나 미세표정에 대한 정보가 너무 부족한 절박한 심정을 담아 질문 3개만 하겠습니다.
1. 이즘랩에 입사하여 교수님과 회사 연구원분들처럼 일을 하려면 조건이 무엇인가요?
심리학 학사나 석사가 필요한지, 특정한 자격증이 필요한지, 특정한 직업적 경험이 필요한지 너무너무 궁금합니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당장 이즘랩에 들어가 청소부라도 되어 일하고 싶고 허락만 해주신다면 열정페이만 받고 어떤 일이든 도전해 보고 싶습니다.
2. 가장 제가 따고 싶은 자격증 중 하나가 미세표정 전문가(METT Expert) 자격증인데 정보가 너무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딸 수 있나요?
구체적인 방법도 궁금하고 자격증을 따기 위해 필요한 공부들에 대해서도 알고 싶습니다.
3. 앞으로 저의 진로를 어떻게 설정해야 할까요?
사실 위의 두 질문으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스스로 결정해야겠지만 혹시 추천하고 싶으시거나 충고하고 싶으신 게 있을까 해서 질문드려보았습니다. 저는 내년이면 휴학 후 공무원(교도관 9급) 공부 재도전, 복학, 군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 전에 어떤 식으로 준비 단계를 갖추면 좋을지 제발 충고 부탁드립니다.
물론 아주 바쁘신 분이고 이메일 하나하나 답장하기 어렵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저에겐 가격이 아직 부담되어 이즘랩에서 진행하는 '시그널리스트'를 신청하지는 못했지만, 이 이메일에 답장을 못 하신다면 언젠간 꼭 찾아뵙고 강의도 듣고 질문도 직접 드리겠습니다. 제 인생의 멘토가 되어주세요!!
교수님은 직업상담사를 하며 여러 자격과 커리어를 쌓아나가고, 지금은 군대부터 다녀오라고 하셨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주어진 기회를 붙잡고 교도관으로 합격했고, 이후 연구소에 가서 자격증들을 취득했다. 덕분에 교도소 내 심리치료팀에서 근무하게 되었고 실제 상담 업무를 해보았다. 열린 질문을 하며 동기를 강화하고, 표정과 행동을 분석하며 내담자의 감정과 생각을 추측하고, 심리 검사를 하며 내담자의 강점과 약점을 찾아냈다. 처음엔 이런 일을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재밌었지만, 점점 흥미가 떨어지고 지치기 시작했다. 흔한 매너리즘일 뿐이었을 수도 있지만, 그것을 기회 삼아 내가 상담을 하며 재밌다고 느꼈던 지점들을 되돌아보았다. 상담을 통해 내담자가 나의 도움으로 변화하는 모습을 보며 보람을 느끼고 흥미를 느꼈다기보다는, 한 사람의 삶이라는 거대한 이야기를 듣는 것에 매료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현재라는 결과를 과거를 통해 추론하고, 앞으로의 이야기를 상상하고, 그 생각을 주인공과 직접 나누는 것은 정말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결국 난 상담을 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인간을 이해하고 싶었던 것이다. 글을 쓰는 이유도 같다. 그러니까 글을 써야 한다는 믿음은, 인간을 이해하고 싶고 나를 이해하고 싶다는 욕구에서 비롯된 것이다.
한강 작가는 노벨문학상 수상소감으로 아래와 같이 말했다.
(2024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한강 수상소감 전문)
여덟 살 때의 어느 날을 기억합니다. 주산학원의 오후 수업을 마치고 나오자마자 소나기가 퍼붓기 시작했습니다. 맹렬한 기세여서, 이십여 명의 아이들이 현관 처마 아래 모여 서서 비가 그치길 기다렸습니다. 도로 맞은편에도 비슷한 건물이 있었는데, 마치 거울을 보는 듯 그 처마 아래에서도 수십 명의 사람들이 나오지 못하고 서 있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쏟아지는 빗발을 보며, 팔과 종아리를 적시는 습기를 느끼며 기다리던 찰나 갑자기 깨달았습니다. 나와 어깨를 맞대고 선 사람들과 건너편의 저 모든 사람이 '나'로 살고 있다는 사실을. 내가 저 비를 보듯 저 사람들 하나하나가 비를 보고 있다. 내가 얼굴에 느끼는 습기를 저들도 감각하고 있다. 그건 수많은 일인칭을 경험한 경이의 순간이었습니다.
돌아보면 제가 문학을 읽고 써온 모든 시간 동안 이 경이의 순간을 되풀이해 경험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언어라는 실을 통해 타인들의 폐부까지 흘러 들어가 내면을 만나는 경험. 내 중요하고 절실한 질문들을 꺼내 그 실에 실어, 타인들을 향해 전류처럼 흘려 내보내는 경험.
어렸을 때부터 궁금했습니다. 우리는 왜 태어났는지. 왜 고통과 사랑이 존재하는지. 그것들은 수천 년 동안 문학이 던졌고, 지금도 던지고 있는 질문들입니다. 우리가 이 세계에 잠시 머무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이 세계에서 우리가 끝끝내 인간으로 남는다는 건 얼마나 어려운 일일까요? 가장 어두운 밤에 우리의 본성에 대해 질문하는, 이 행성에 깃들인 사람들과 생명체들의 일인칭을 끈질기게 상상하는, 끝끝내 우리를 연결하는 언어를 다루는 문학에는 필연적으로 체온이 깃들어 있습니다. 그렇게 필연적으로, 문학을 읽고 쓰는 일은 생명을 파괴하는 행위들의 반대편에 서 있습니다. 폭력의 반대편인 이 자리에 함께 서 있는 여러분과 함께, 문학을 위한 이 상의 의미를 나누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인간을 이해하는 과정은 경이롭다. 겨우 글을 쓸 뿐이지만, 작가는 글을 써야 한다는 믿음을 토대로, 사랑이라는 기둥을 세우고, 삶의 의미라는 지붕을 덮어, 책이라는 집을 만든다. 그동안 작가에 대한 편협한 시각에 갇혀 알지 못했지만, 나도 사실 누구보다 인간을 이해하길 원하는 작가로 태어난 사람이었다. 더 이상 명성에만 매달리며 잘 쓰지 못한다고 한탄하지 않을 것이다. 황금 같은 주말에도 카페에 나와 글을 쓰고 있는 내가 자랑스럽다. 그리고 나와 함께 서서 삶의 의미를 나누는 독자들과 부모님과 친구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건넨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글을 쓴다. 그것은 아침에 일어나서 마시는 커피 같은, 퇴근하고 잠시 멍하니 바라보는 노을 지는 여린 하늘 같은, 사랑하는 사람과 속삭이며 꾸는 꿈 같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