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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완성 자서전 Dec 21. 2021

어떻게든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목도 가누지 못하던 아이가 앉고 걷는 마법 같은 과정을 지켜보면서 확실해진 믿음 하나가 있다. 사람은 하루하루 더 나아지기 위해 태어난다는 것. 더 나아지기 위해 산다는 것은, 매년 한 학년씩 올라가듯 자연스럽기도 하고, 몇 년을 죽어라 공부해도 원하는 시험에 합격하지 못하는 것처럼 어렵기도 하다. 근데 더 어려운 건, 나아지기 위한 삶을 지속하는 것이다. 우리는 어느 시점이 되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멈추려 하기 때문이다. 안정된 직장을 갖게 되었을 때, 웬만큼의 부를 쌓았을 때...더 슬픈 건 언제부턴가는 한 걸음 나아가기는커녕 뒷걸음질 치지 않기 위해 온 힘을 쏟아야 하는 때가 오기도 한다는 것이다. 노화라는 녀석에 맞서야 할 때처럼 말이다. 이렇게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의 내가 된다는 것은 많은 노력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우리의 삶이 이토록 힘든 건지도 모르겠다.  


직장생활 n년차의 어느 날, 상사분께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한) 보고를 마치고 일어서며 “열심히 해보겠습니다.”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그 순간의 진심이었다. 그러자 되돌아온 말은 "열심히 하면 어떡해. 잘해야지."였다. 문을 닫고 나오는데 얼굴이 화끈거렸던 기억이다. 잘할 자신이 있었다면 열심히 하겠다던 내 말이 부끄럽지 않았겠지.


그리고 난 고민에 빠졌다. 지금보다 더 나은 나를 만들지 못하는 나의 열심과 노력은 의미가 없는 걸까? 사실 상사분의 그 말은 나에게 꽤나 강한 인상을 남겼고 내 직장생활에 큰 영향을 끼쳤다. 회사는 내가 받는 월급만큼 나의 역할을 잘 해내야 하는 곳이라는 생각이 나를 따라다니며 부담을 주었다. "열심히 하네."라는 말은 "일은 잘 못해도 열심히는 해."로 꼬여 들렸고, "일 잘하네."라는 말을 듣지 못하면 불안했다.


회사라는 울타리를 벗어나 전업주부의 삶을 살고 있는 지금은 열심히 해서 무언가를 잘한다는 것이 직장생활을 할 때보다 몇 배 더 어렵다. 내가 하는 일들을 수치화하여 평가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더 나아지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의 당위와 그에 대한 열의는 예전과 같은데 말이다. 생산적인 일을 하고 있지 못하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내 삶이 제자리걸음만 하는 것 같은 답답함에 빠지기도 하지만, 난 꾸준히 뭐라도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어떻게든 뭐라도 하지 않으면 정말 제자리걸음만 하게 될까 봐.


최근 그런 나에게 “잘하고 있어.”라고 말해주는 위로가 되는 프로그램을 보게 되었다. ‘싱어게인’이라는 한 번 더 기회가 필요한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혹은 잊혀진 가수들을 위한 오디션 프로그램이다. 절절한 스토리들로 가득한 여러 무대가 지나간 후 문제의 참가자가 나타났다. 등장만으로 심사위원들을 놀라게 한 그는 바로 인디밴드 브로콜리너마저의 멤버 윤덕원 씨였다. 인디신에서 꽤나 인정받고 있는 그에게 왜 오디션에 참가하게 되었는지 묻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정글과 같은 음악계에서 제 자신은 살아남기 위해 꼭 필요한 이빨도 발톱도 없는 초식동물처럼 느껴졌습니다. 또 그런 현실에 타협하고 도망치는 제 자신을 발견하고 이 오디션에 참가하게 되었습니다."

 

메이저가 되지 못한 성공한 인디밴드. 조금 더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기 위한 노력의 여정 중에 현실적인 문제에 부딪혀 결국 가장 사랑하는 음악을 포기하게 되는 마이너의 성공. 그 포기의 순간에 그는 다시 한번 자신을 정글로 내몰아 새로운 도약을 꾀하려 했다. 그의 노력과 도전은 감동을 주었지만 다음 무대의 기회를 얻진 못했다. 화려한 보컬도 퍼포먼스도 없는 그의 무대는 역시나 오디션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열심히 하는 것만으로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는 없으니까.


윤덕원씨의 SNS 보니 그의 도전을 두고 많은 이들이 왈가왈부하는  같았다. 적어도 나에게는 깊은 울림이 있는 도전이자  위로였다. 무언가가 되지 못해, 무언가를 이루지 못해 포기의 순간에  있는 사람들에게 혼자가 아니라는 따뜻한 위로를 주었다. 그리고 그의 도전에 이토록 감명받는  같은 사람들이 있는  보면, 제자리에 멈춰 포기해버리지 않는 이상 실패자가 아님을 보여주었다. 어떻게든 뭐라도 하지 않으면    같은 답답한 마음에서 시작된 작은 움직임이 고여있던 물에 잔잔한 물결을 만들어 우리의 인생을  멋진 어딘가로 데려다 줄지 모르는 일이다. 그래서 나도 고여 있지 않으려, 잔잔한 물결을 만들기 위해 오늘도 글을 쓰고 있다. 어떻게든 뭐라도 하지 않으면    같아서.  끝에  나아진 내가 있을 거라고 믿으며.


싱어게인 중 윤덕원씨가 부른 <진심, 김광진>

그래도 잊진 말아요.

그대의 소중한 재능이 숨겨진 보석과 같은 거죠.

언젠간 환하게 빛날 테죠.

꿈만큼 이룰꺼에요.

너무 늦었단 말은 없어요.

그대를 지켜주는 건 그대 안에 있어요.

강해져야만 해요.

그것만이 언제나 내 바램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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