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동동이의 어린이집 가방에서 물병과 개인 수건을 꺼내다 가정통신문을 발견하였다. 제목은 '플레이펜 회수 안내문'. 플레이펜은 어린이집에 입학한 다음날정도에 아이 가방에 들어있던 것이었다. 귀여운 모자를 쓴 펜의 모양을 하고 있으며 이것으로 유아용 영어 동화책에 써있는 문장을 꾹 누르면 녹음된 음원을 들을 수 있고, 챈트나 노래도 들을 수 있다. 사실 나는 그것이 대여품인지 몰랐다. 매달 특별활동비와 교구 구입비 명목으로 회비를 냈기 때문에 당연히 어린이집에서 단체 구매하여 원생들에게 나눠주는 것인 줄 알고 있었다. 그런데 회수 안내문에는 '몇 월 며칠까지 회수할 테니, 어린이집에 보관 상자, 플레이 펜, 제품 사용 설명서와 USB 케이블을 모두 제출하라'고 쓰여있었다. '분실이나 파손 시에 별도 비용(66,000원)을 지급해야 하며, 그 외 USB 케이블 분실 시 별도 비용(1,000원) 지급해야 한다'고 다소 건조한 문체로 쓰여 있었다.
'아.... 내 것이 아니었구나. 흠.. 어쩔 수 없지.'하며 보관상자를 찾아 열어보았다. 세상에! 분실하면 66,000원을 내야 하는 그 귀한 플레이펜이 감쪽같이 사라져 있었다. 깜짝 놀란 나는 그때부터 동동이의 장난감 통, 레고 박스, 인형 박스, 책꽂이를 다 뒤졌다. 간신히 레고들 사이에 누워 있는 하늘색 플레이펜을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보아도 제품사용설명서는 찾을 수가 없었다. 나는 만약을 대비하여 제품 사용설명서를 버리지 않는데, 이것은 아무리 찾아보아도 찾을 수가 없었다. 하루 날 잡아 작정하고 온 집안을 샅샅이 뒤지면, 찾을 수 있겠지만 찾다가 혈압이 오를 것 같아서 그냥 비용을 물기로 하고 찾기를 그만두었다.
그날 오후,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 내가 목숨보다 더 아낀다는 아이들도 사실은 나의 소유는 아닌데, 혹시 그것을 잊고 있는것은 아닌지... 그래서 아이들의 일이라면 내 일처럼 예민해지는 것은 아닌지 돌이켜 보았다. 영원한 나의 소유가 아닌 이들은 언젠가는 제 짝을 만나서 내 곁을 떠날 것이다. 물론 부모의 의무를 다하여 따뜻한 사랑과 보살핌으로 건강하게 보호해 주고, 의식주를 제공하여 주고, 교육해야 함은 당연하다. 아이들을 내 것이라 여기는 순간 자녀들과의 관계는 엇나가는 듯하다. 아이들의 성적표가 마치 나의 성적표가 되는 것처럼 조급하여 아이들을 다그치고, 쓸데없는 상처를 주고, 심지어 내가 원하는 직업을 자녀에게 강요하며 키우다가 만약 플레이펜처럼 어느 날 갑자기 회수명령이 떨어지면 그때는 어쩔 것인가. '자녀를 원래의 순수하고 아름다운 마음 그대로 사회에 반납해야 하며, 자녀의 자존감이 손상되었을 시, 부모에게 몇억의 벌금이 부여된다'라는 공문을 받는다고 상상하면 순간 아찔해진다.
그때가서 아찔해지기 전에, 지금부터라도 아이들은 우리 집에 온 VIP 손님이라 생각하려고 한다.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저절로 생기는 잔소리를 줄이려 혼신의 힘을 다한다. 음...지구를 지키겠노라고 길거리의 쓰레기를 줍는 봉사활동에 진심이고 열심인 다홍이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정작 자기의 방은 귀신 나올 듯 지저분하게 해놓는다. 따지고 보면,우리 집에서 며칠 묵고 돌아가는 손님이 방을 지저분하게 해놓고 산다고 해서 내가 뭐라고 참견할 것은 아니라 여기려 한다....그러면서 그녀가 학교에 가고 난뒤, 옷가지와 화장품과 책이 뒤섞인 혼돈스러운 방을 볼때마다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확 치밀어오르는 마음을 여러번 다잡는다. 그리고 방을 깨끗하게 청소해 준다. 내 친구는 '너 그러다 아이 버릇만 나빠질 것' 이라고 했는데, 그냥 두면 아이가 비위생적 환경에 그만 병에 걸릴 것 같아서 아이의 버릇을 버리고 대신 건강을 선택하기로 했다. 때가 되면 스스로 할 것이다, 청소하는 엄마의 모습을 매일 보고 컸으니 분명히 보고 배운 것이 있을 것이리라 믿으면서.
동동이는 한국어보다 외국어를 좋아해서 매일 알파벳 블록으로 단어와 문장을 만든다. 남들은 영어교육하려고 안달인데 스스로 하니 얼마나 좋으냐고 하지만 정말 내 속을 모르시고 하는 말씀이다. 흑. 탄탄한 모국어 바탕에 외국어도 실력이 쌓이게 마련이고 유아기부터 모국어 발달은 정말 중요하다. 저러다 영영 한국어를 못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과도한 염려에 밤에 잠을 못 이룬 적도 있다. 그렇지만, 아이의 가장 좋아하는 알파벳 블록을 치워버리는 행동, 영어를 할 때마다 '우리말로 해!'라면서 엄하게 다그치는 행동은 절대 하지 않았다. 아들의 가장 좋아하는 장난감을 치울 권리가 내게는 없다고 생각한다. 대신 언어치료센터에 데리고 가서 한국어를 배우도록 하고 있다. 참 특이한 아들이지만, 이상한 것이 아니라 독특하고 개성만점이라 생각하며 약간 연예인 바라보듯 거리를 두고 아이를 바라보는 중이다. 동동이 본연의 개성을 손상시키지 않고, 격려하고 응원함으로 얼마든지 발전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다행스럽게도 요즘 동동이는 드디어 어린이용 동물, 식물도감을 꺼내와서 나에게 동물과 식물의 이름을 배운다. 한국어를 열심히 배우고 따라하려고 한다. 늦더라도 하기만 하면 되니까.
우리집에 온 귀한 손님의 마음에 괜한 것으로 상처를 주지 말아야 하니까... '나의 자녀는 내것이 아니다'라고 매일 생각하며 내가 할수있는 노력을 해야겠다. 생각없이 내 마음대로 아낌없이 쓰고, 다루고, 키우다가 갑자기 회수안내문 받으면 참 황당할 테니까.
그나저나 잃어버린 플레이펜 제품 사용설명서 가격은 얼마일지 어린이집에 전화해 봐야겠다...비싸면 어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