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주는 상처, 글이 주는 치유

by 김하예라

어느 날 아들을 데리러 어린이집에 갔다. 선생님이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머님, 동동이가 집에서도 이 정도인가요? 스스로 옷을 입으려고도 안 하고, 벗는 것도 안 하네요. 집에서 스스로 할 수 있도록 많이 도와주세요. 다섯 살이면 그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거든요.'

과연 선생님의 말씀은 옳다. 그러나 나는 내용보다는 '이 정도'라는 단어에 심정이 상했고 '그 정도'라는 말에는 반항심이 올라왔다.


사실 나는 말에 예민한 편이다. '아'다르고 '어'다르다는 말과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라는 속담을 사랑한다. 어릴 때부터 수 없이 읽은 성경에서도 항상 말조심과 혀조심을 강조한다. 그래서 상대를 마음 상하게 할만한 말이 될것 같으면 최대한 걸러서 표현하고, 그마저도 집에 와서 설거지를 하면서도 아까 혹시 내가 말실수한 것은 없는지 기억을 되짚어 본다. 하여간 나는 어린이집 선생님의 '이 정도 & 그 정도'에 충격받은 나는 머리가 띵해지고 심장이 두근거렸다. 이내 '아니, 그러면 어린이집에 가뜩이나 잘 안 가려고 하는데 옷 입는 거 기다리다가는 시간이 다 갈 것 같단 말이에요. 그리고 이 정도냐니요?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라고 마구 퍼붓고 싶었다.


고작 내가 한 말이라곤 '아! 그랬나요? 집에서 옷 입고 벗는 연습 열심히 시킬게요. 감사합니다'였다. 그것도 웃으면서 말이다. 그래놓고 낮에 하지 못한 말과 나의 비굴한 표정이 생각나 밤에 자다가 일어나서 애먼 이불을 걷어차고, 발을 굴렀다.


여러 날이 지나 동동이를 데리러 갔을 때, 선생님과 대화를 나누었다. 속으로는 그 선생님께 여전히 삐친 상태 였지만 그래도 우리 아들을 돌봐주시는 분이기에 신뢰하고, 그분의 의견을 존중하려고 많이 노력했다. 뜻밖에 선생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


'저는 동동이가 지금은 말을 잘 못하지만 율동할 때나 활동할 때 보면 다 인지하고 지시를 잘 따르고 즐거워하기 때문에 조금 시간이 지나면 금방 말이 트일 것 같아요. 어머니께서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아요. 저희도 잘 돌보고 돕겠습니다.'


어머나 세상에 감사해라. 따뜻한 선생님의 말씀에 지난번 '이 정도/그 정도'에 대한 서운함은 눈 녹듯 사라졌다. 아니, 아예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였다. 아이와 함께 집으로 돌아오면서 그때 그 자리에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다 쏟아내지 않길 잘했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어린이집 선생님이 나쁜 분은 아니었다며 역시 보는 눈이 있으시다며 새털처럼 가벼운 발걸음으로 집에 왔다.


나는 마음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것에 서툴다. 좋은 말, 칭찬하는 말은 쉽지만 불만족을 표시하는 말은 참 어렵다. 생각 없이 한 말 한마디에 나처럼 마음이 창호지처럼 여린 누군가는 쉽게 상처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 자동으로 상기된다. 그래서 불만을 말할 때, 한번 삼키고 두 번 생각하고 세 번째에 표현하려 한다. 예전에는 이런 내 모습이 마음에 안 들었다. 왜 나는 따지지 못하는 것일까. 꾹 참고 마음 속 켜켜이 쌓아두었다가는 한국인의 고질병인 '화병'이 나에게도 생길 것 같았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찾은 것이 바로 '하고 싶은 말을 글로 쓰기'였다. 사람에게도, 관공서에 민원을 넣을때도 마찬가지이다.


화가 나는 일을 겪었을 때,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너무한 것, 부당한 처사라는 생각이 들고, 기어이 화를 내고 싶으면 상대에게 보내는 글을 썼다. 그 다음날, 아침이 되면 간 밤에 쓴 '분노의 초고'를 다시 읽어보고 필요 없는 말, 공격하는 말, 논점을 흐리는 말은 삭제했다. 마지막으로 어법과 띄어쓰기를 확인하고 메시지를 보냈다. 어법에 맞으며 정제된 문장은 신뢰를 준다고, 맞춤법 틀린 글은 딱 읽기 싫어지는 법이라고 은사님께서 말씀하신 적이 있기 때문이다. 글을 쓰고 교정하는 사이에 '시간'이라는 마술같은 약이 더해지며 마음을 꽉 채웠던 분노는 사그러 들고 이성적이 된다. 마음이 다스려지고, 치유도 일어난다. 그러다 보니 그 안 해도 될 말을 해서 일을 더 크게 만드는 말사고가 적어진다. 상대로 인한 부정적인 감정을 여과없이 쏟아부은 후 예기치 않던 말실수가 생겨, 나를 속상하게 했던 상대에게 도리어 내가 사과나 부연 설명을 해야 하는 위급상황도 별로 없다. 상한 마음을 문장으로나마 전달했으니 속풀이도 된다. 당하고 온 날 밤, 방구석에서 남몰래 하는 이불킥보다는 글쓰기로 화를 식히는 것이 훨씬 낫다.


그동안 살아온 나의 모습을 가만히 보면, 나는 상대의 면전에 시원하게 한마디 하여 그의 코를 납작하게 해줄 재주는 없다. 그건 노력한다고 되는 문제가 아닌 것 같다. 불조심만큼 말조심도 중요한 덕목이라는 생각 역시 변함이 없을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앞으로도 글쓰기로 내 속풀이를 대신할 생각이다. 글은 적어도 전송 버튼을 누르기 전까지는 여러 번 검열할 수 있는 나의 컨트롤 아래 있으니까. 하지만 말은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내 것이 아니고, 예기치 않은 방향으로 날아가는 불화살일 수 있으므로 일단 조심하고 보자는 심산이다. 조심해서 나쁠것 없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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