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 보면 누군가의 위로가 시급하게 필요할 때가 있다. 하루 종일 관공서에 낼 서류 탓에 여기 갔다 저기 갔다 하느라 진이 빠졌을 때, 가까운 가족 혹은 친구가 나에게 그저 생각 없이 내뱉은 한마디의 말에 마음에 상처를 입었을 때도 그러하다. 바깥 날씨도 좋고, 계절에 어울리는 옷도 있고, 심지어 시간도 있는데 아무리 휴대폰 연락처를 뒤져보아도 만날만한 사람이 없을 때도 위로가 필요하다. 그렇게 누군가의 따뜻한 말 한마디가 필요할 때, 그런데 그렇게 말해줄 한 사람이 없을 때, 그렇다고 사람을 찾기도 귀찮을 그럴 때, 나는 응급처치의 한 방법으로 책을 읽곤 한다. 좋은 책은 언제나 나의 책꽂이의 같은 위치에서 변함없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내 마음에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는 어느 날, 나는 장영희 교수님의 에세이집,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을 꺼내 읽는다.
내가 처음 그분의 이름을 접한 것은 오래전 고등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칠 때였다. 당시 학교에서는 출판사 두산동아에서 나온 영어 교과서를 많이 사용하였는데, 그때 교과서 표지에 '장영희 외'라는 지은이의 이름, 그중에서도 대표저자 '장영희'라는 이름이 내 눈에 띄었다. 국민학교 때부터 알았던 이름, '영희'는 개인적으로 내가 참 좋아하는 이름이다.
'영희야 안녕? 철수야 안녕? 바둑이도 안녕?'
그 시절 국민학교를 다닌 학생이라면 누구나 목놓아 부르곤 했던, 철수, 바둑이와 함께 3대 친근한 캐릭터 중 하나인 '영희'. 나는 특별히 그 이름의 발음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영'은 그 발음이 똑똑하고 다부지게, '희'는 부드럽게 느껴졌다. 종종 내 이름이 '김영희'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다.
우연히 서점에서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이라는 의미심장하면서도 마음에 끌리는 제목이 붙은 책을 발견했는데, 저자의 이름이 '장영희'였다. 난 '응? 이 장영희가 내가 아는 그 장영희일까?'생각하며 책날개에 쓰여있는 저자의 이력을 읽어보았다. 내가 아이들을 가르치며 그 교과서 '두산(장)'이라는 이름의 폴더로 시험 대비 문제집 파일을 저장했던 그 장영희 교수님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호기심 반, 설렘 반으로 책을 샀다. 집에 오자마자 그 책을 끝까지 다 읽었다.
문학잡지 '샘터'에 기고되었던 서른아홉 편의 에세이를 한 권으로 엮은 책이었다. 책의 제목도, 표지도, 중간중간 나오는 정일 화백의 그림도, 글에 담긴 작가의 생각과 사람들의 모습도 아름다웠다. 책에는 저자가 영문과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며 겪은 에피소드, 소아마비로 인한 장애인으로서의 경험, 미국 유학 생활, 가족의 이야기 등을 솔직하고 유머러스하며 잔잔하게 풀어내고 있었다. 에세이를 통해 그분의 성격, 습관, 일상을 엿볼 수 있어서 참 재미있었다. 책의 마지막 장이 다가오는 것이 아까워서 일부러 천천히 아껴가며 읽었다.
매사에 완벽할 줄만 알았던, 그리고 약간은 차가울 것 같았던 똑 부러지는 이미지의 교수님이 나처럼 엄청난 방향치에 길치라는 사실에 깜짝 놀랐고 살짝 반가웠다. 운전하다 길을 잃으면 차를 그냥 길에 두고 와서 그다음 날 찾으러 갔다는 에피소드에서는 혼자서 크게 웃기도 했다. '아! 나도 운전하다 길 못 찾겠으면 그곳이 어디인 줄만 알아놓고 세워두고 집에 택시 타고 오면 되겠지.' 하는 용기까지 품게 되었다. 심지어 비행기 탑승시간이든, 학생들의 성적을 입력하는 것이든, 출판사에 글을 보내는 것에서든 매사에 지각을 한다는 것, 며칠을 집안을 치우지 않아서 먼지가 쌓여있어도 기침 한 번 안 한다는 부분에서는 '어쩌면 나도 조금 그렇게 살아도 되지 않을까?' 하는 여유를 느끼곤 했다. 미국에서 박사학위 논문을 완성하고, 언니네 집으로 향하다 잠깐 만난 친구의 집에서 차 한잔 하는 사이 논문이 들어있던 가방을 도둑맞아 그 자리에서 기절했던 일, 그리고 1년 동안 다시 논문을 쓰셨다는 부분은 곱게 책갈피를 끼워 놓았다. 그리고 나의 박사학위 논문을 쓰며 마음이 사정없이 흔들릴 때마다 이 부분을 찾아 읽곤 했다.
소아마비 장애를 가지고, 유방암 투병을 하는 중이었지만 주어진 삶에 대한 감사와 의지, 사랑이 글마다 녹아 있어 읽는 내내 마음이 포근해졌다. 그분의 글에는 인간적인 매력과 위트, 풍부한 지식이 자연스럽게 묻어 나오기에 내용을 한 줄 한 줄 필사를 하며 기록해놓고 싶은 책이기도 하다. 2009년, 교수님이 작고하시던 그 해 가을에 산 이 책을 나는 이 글을 쓰는 오늘까지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몇 번의 이사와 몇 번의 대청소와 책 정리를 하면서도 혹시나 실수로 버릴까 염려하여 우선순위로 먼저 챙겨 책장 두 번째 칸, 내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오는 곳에 꽂아 놓았다.
장영희 교수님을 생각하면 단발머리의 총명한 눈빛, 환한 미소, 그리고 목발이 떠오른다. '좋은 글을 쓰려면 좋은 삶을 살아야 한다'라는 강원국 교수님의 말씀처럼, 교수님은 참 좋은 삶을 사셨기에 그렇게 좋은 책을 남기고 가셨다는 생각이 든다. 더 오래 사시면서 우리에게 삶 속의 기적을 메시지로 남겨주셨으면 좋았을 텐데. 참 아쉽다. 긍정, 유머, 소망, 감사라는 키워드를 독자들의 가슴에 키워드로 새겨주고 가신 교수님이 문득 그리워진다. 나도 그분처럼 읽고 나면 마음이 노근 노근 해지는 글, 기분이 상쾌해지는 글, 재미있어서 웃음이 나는 글, 그런데 다시 읽으면 가슴이 뭉클해지는 그런 좋은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
맞다, 지난 3년간 내가 살아온 나날은 어쩌면 기적인지도 모른다.
힘들어서, 아파서, 너무 짐이 무거워서 어떻게 살까 노심초사했고 고통의 나날이 끊이지 않을 것 같았는데,
결국은 하루하루를 성실하게, 열심히 살며 잘 이겨 냈다.
그리고 이제 그 내공의 힘으로 더욱 아름다운 기적을 만들어 갈 것이다.
-장영희, 2009.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