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나보다 옳다
오늘 아침, 동동이를 어린이집에 데려다 주려 집을 나서며 휴대폰을 확인했다. 그런데 오전 9시 8분에 부재중 통화가 한통 와 있었고, 전화를 건 이는 무려 '다홍이 담임 선생님'이었다. 평일 아침에 아이의 학교 담임선생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는 것은 일반적인 일은 아니다. 아이 선생님 앞에만 서면 특별한 이유 없이 작아지는 나는 별일 아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래, 통화 버튼 잘못 누르신 거겠지..' 하는 마음으로 전화를 드렸다. 담임선생님은 오늘 현장체험 학습 날인데, 아직 아이가 집합장소에 도착하지 않아 걱정되어 전화하셨으며, 어쩔 수 없이 '지각 처리'해야 한다고 하셨다. 나는 차마 선생님께 다홍이가 아침에 늦게 일어났으면서, 머리를 감고 드라이를 한참 하더니, 앞머리 고데까지 깔끔하게 하고 가느라 늦었을 것이라고는 말씀드릴 수 없었다. 그저 알겠다고, 정말 죄송하다고 말씀드릴 수밖에... 선생님께서 다홍이가 방금 막 도착했다고 하셨다. 선생님의 다정함이 담긴 단호하게 우리 아이를 부르시는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전화가 끊겼다.
"거기, 지각생 이리 와!"
선생님과의 짧은 통화 이후 씁쓸함이 채 가시기도 전에, 서둘러 집을 나섰다. 아직은 비교적 내 통제권 안에 속한 아들을 어린이집에 데려다줘야 하니까. 집에서 도보로 15분 정도 걸리는 어린이집에 가며, 아이 손을 잡고, 노래도 부르고 같은 반 친구들 이름도 한 명씩 불러보고, 편의점에 들려 캔커피 한 캔과 과일 주스도 한 팩 샀다. 시간이 넉넉해서 어린이집이 보이는 벤치에 아들과 나란히 앉아 가을의 햇볕을 받으며 마실 생각이었다. 아이의 주스팩에 빨대를 꽂아주는데, 이번에는 모르는 휴대폰 번호의 전화가 걸려왔다. 보통 070으로 시작되거나, 02로 시작되는 번호는 잘 받지 않는 편인데, 휴대폰 번호니까 어쩔 수 없이 전화를 받았다.
"안녕하세요? 혹시 다홍이 학생 어머니 되시나요?"
성인 여자의 목소리였다. 5초도 안되는 시간에 덜컥 걱정부터 되었다. 아까 아이는 현장학습 장소에 도착했는데, 그사이 무슨 일이 또 생긴 건가? 이 여자는 누구지? 아픈가?
"여기는 OO재단이에요. 다홍이가 '전국 감사편지 공모전'에 응모했답니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 아이가 한번 이야기한 적이 있다. 학교 친구들이랑 감사편지 공모전에 응모했는데, 어쩌면 재단에서 엄마에게 전화를 할 거라고, 그때 휴대폰 번호로 올 거니까 꼭 받으라고 했다. 일말의 희망이 스치고 지나갔다.
'혹시, 상을 탄 것인가?'
"수상 여부와 상관없이, 아이에게는 좋은 추억이 되었을 것입니다."
'아, 예... 수상은 못했군요. 그런데 전화는 왜 하신 걸까?'
"그런데, 다홍이 학생이 너무 기특하게도 '감사 나눔 실천 약속 및 어린이재단 감사 나눔 안내 수신'에 동의 체크를 해서요. 필수가 아니라 선택사항인데, 고맙게도 동의해서요. 저희 재단은 보육 시설에서 보호 대상 아동 자립 지원 캠페인을 하고 있는데, 후원에 동참해 주십 사하여 연락을 드렸어요."
내 그럴 줄 알았다. 다홍이는 이런 일에 늘 앞장선다. 지난번에도 코엑스 아쿠아리움에 갔다가 자립 청소년 지원 사업을 하고 있는 한 NGO 단체의 홍보 부스에서 자신의 용돈을 쪼개어 후원하겠다며 지원서를 썼다. 분명히 나는 용돈에서 후원금이 빠져나가면 그만큼 딸이 사용할 수 있는 돈이 줄어드는 것이라고 말했다. 다홍이는 괜찮다고 자기가 돈 쓸 일이 뭐가 있겠냐면서 어려운 친구들을 위해서 기부하고 싶다고 했다. 한참 하고 싶고, 놀고 싶은 다홍이에게 돈 쓸 일이 없을 리가 없지. 후원금 내느라 매번 재정난에 허덕이는 아이를 보다 못해 결국 우리는 아이의 용돈 체크카드에 후원금까지 더 하여서 입금해야 했다.
솔직히 말하면, OO재단 전화를 받고서는 사실 후원을 할까 말까 고민을 잠깐 했다. 그렇지만, 커피 몇 잔만 아껴서 도움이 필요한 청소년들에게 조그마한 힘이 된다면 그보다 보람 있는 일이 어디 있겠나 싶었다. 하루하루 바쁘게 전쟁처럼 사느라 남을 돌아볼 여유가 없던 나의 마음에 불현듯 착한 생각이 스며 들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나는 다홍이 이름으로 정기 후원을 하게 되었다. 동동이가 벤치에 앉아 과일 주스를 다 먹을 때 즈음 나는 계좌번호를 불러주고, 후원 약정 동의를 끝냈다. 아침부터 다홍이 덕분에 나도 착한 일 한 개는 한 것 같아 기분이 덩달아 좋아졌다. 간만의 선행이 나의 마음을 더 착하게 만들어 주었는지, 오늘은 웬만한 일에는 짜증도 안 난다.
다홍이는 늦잠 자다가 지각을 잘한다. 방은 거의 난장판이다. 숙제도 못해갈 때가 많고, 준비물을 놓고 가는 바람에 점심시간에 집에 온 적도 있다. 실내화를 운동장에서 신고 다녀서 벌점도 받았다. 그러나, 지구온난화 때문에 죽어가는 북극곰을 걱정하고, 쓰레기 줍는 봉사활동에 진심이며, 어려움에 빠진 어린이들과 친구들에 대한 관심이 아주 많다. 나는 다홍이의 선한 동심이 무척이나 자랑스럽다. 그리고 다홍이 만할 때, 지각 한번 한적 없고 숙제를 안 한다든지 준비물을 놓고 간다든지 하는 부주의함은 보인 적 없는 명백한 모범생이었으나, 타인에 대한 관심이 거의 없었던 나의 모습을 반성하게 된다. 사춘기에 무뚝뚝하고, 실수도 많이 하는 딸이지만 사회활동 참여와 나눔의 마음에 있어서 만큼은 그녀가 나보다 옳다.
봉사와 나눔에 진심인 아이를 보면, 먼저 나부터 선한 마음을 잊지 않고 살아가야겠다는 묵직한 책임감이 느껴진다. 아이의 수학 점수가 올라도 기분이 (너무나) 좋겠고, 갑자기 아이가 모범생이 되어 벌점을 하나도 안 받고, 아침부터 담임선생님의 전화를 가슴 졸이며 받지 않아도 좋을 것 같다. 그러나 사실, 우당탕탕 다홍이라도 좋으니 순수하고,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계속 이어지기를 간절히 바란다. 아이 덕분에 약간 억지로 후원에 동참하긴 했으나, 앞으로도 어려운 일에 처한 이웃에게 먼저 손을 내밀어 주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물과 빵을 기꺼이 나누어 줄 수 있는 우리 가족이 되기를 소망한다.
사족:
방금, 다홍이 체크카드 결제 문자가 왔다.
"출금, 1800원 /피에스타 피씨."
집에 와서 못다 한 수학 숙제한다더니, PC방에 갔나 보다. 괜찮다. 오늘은 끝까지 착한 엄마 되기로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