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BeautiPo May 26. 2018

망해도 괜찮을 수 있는 방법, 후계동 사람들 이야기.

tvN 드라마 《나의 아저씨》 2018

본 글은 tvN 드라마 《나의 아저씨》 의 리뷰입니다. 내용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을 수 있으니, 드라마를 보지 않으신 분들은 유의해주세요!

.

.

.

.

.

.



카메라 촬영과 편집이 개입하는 영화나 드라마와는 달리, 시간적·공간적 제약이 큰 연극에서는 현실적인 설정들을 상당 부분 포기할 수 밖에 없습니다.


예컨대 배우들이 좁은 무대를 빙빙 도는 행위는, 등장인물들이 아주 빠르게 도망가는 장면인 "셈 치자"는 약속입니다. 배우 A가 배우 B와 마주보고 이야기하다가 배우 A가 갑자기 관객들을 향해 서면, 그 때부터 그가 하는 대사는 배우 B에게는 들리지 않는 독백인 "셈 치자"는 약속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tvN 드라마 《나의 아저씨》는 참 연극같은 드라마입니다. 비현실적인 설정을 통해 가장 현실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나의 아저씨》는 소위 '명대사'로 회자되는 장면들이 유독 많은 드라마이기도 한데요. 뒤집어 생각해보면, 그 명대사들을 실제로 내 앞에 실존하는 어떤 이의 입을 통해 듣는다고 생각하면, 속된 말로 오그라들기 그지 없습니다.


그만큼 비현실적인 대사, 그러나 무엇보다 현실의 중심을 꿰뚫고 있는 대사들이 매 화마다 쏟아집니다. 대사는 배우들의 입을 통해 나오지만, 마치 작가가 모니터를 넘어 저를 똑바로 응시하며 대사를 쏟아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나의 아저씨》에는 극단적인 설정을 가진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극단적으로 불행한 과거를 가진 소녀 이지안. 극단적으로 흔들림 없이 올바른 중년 박동훈. 요즘 세상에 어디에도 없을 것처럼 극단적으로 끈끈하고 따뜻한 동네 후계동.


이 극단적인 설정들 속에서 이 드라마는 가장 현실적인 것들에 대해서 적나라하게 펼쳐놓습니다. 지리멸렬한 현실, 지지리궁상이라 지워버리고 싶은 일상, 더럽고 치사한 세상 돌아가는 법칙들, 못나고 모자란 나 자신의 모습까지.


후계동, '경계 뒤에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 이 드라마는 망하고 상처받은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망했지만, 그래도 꿋꿋하게 사는 사람들, 안괜찮은 상황 속에서 저마다 괜찮을 수 있는 방법을 찾은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지안이는 평생 '괜찮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 지안이가 '망했지만 망가지지 않은' 후계동 사람들 사이에서 '괜찮을 수 있는 방법'을 배워갑니다. 극 초반, 상처받아 발톱을 잔뜩 세운 어린 짐승같던 지안이는 점점 슬픔과 두려움을 느낄 수 있고, 누군가의 앞에서 아이처럼 펑펑 울 수 있는 평범한 소녀의 모습을 찾아갑니다.




또는, 《나의 아저씨》는 각자 인생의 숙제를 해결해가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지안이는 아저씨를 만나기 전까지, 평생동안 가슴에 사무치는 고민을 안고 살아왔습니다. 삶은 왜 이렇게 지긋지긋할까, 삶은 왜 내게만 유독 이렇게 끔찍하게 괴로울까.


박동훈은 평생 자신에게 솔직한 적 없이 살아왔습니다. 자신의 욕망보다는 세상의 도리와 당위가 늘 먼저였던 사람.


심지어 아내의 외도를 알고도 '자신이 안다는 걸 아내가 모른다면,' 그렇게 해서 가정을 유지할 수 있기를 바라는 사람입니다. 동생은 그를 "욕망과 양심 사이에서 항상 양심 쪽으로 확 기울어 사는 인간, 제일 불쌍해." 라고 이야기하고, 지안은 "성실한 무기징역수 같다"고 말합니다.


이지안과 박동훈은 결국 각자의 숙제를 해결해냅니다. 지안은 '나도 아주 조금은 괜찮은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결론을 얻게 되었고, 박동훈도 아주 조금은 자기 자신에게 솔직할 용기를 갖게 되지요.



이지안과 박동훈 외에도, 극중의 모든 인물들은 각자의 숙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나의 아저씨》가 정말로 매력적이었던 것이 바로 이 점입니다.


모든 인물은 자신의 인생에 풀어야 할 숙제를 가지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그 어떤 인물도 미워할 수 없습니다. 


심지어는 지안이를 그렇게 괴롭히던 사채업자 광일이조차도 말이지요. 지안을 괴롭히는 광일의 광기어린 눈빛 속에는 때때로 상처와 망설임, 흔들림이 보입니다.


세상 착한 남편 박동훈을 두고 바람을 핀 아내도, 박동훈의 아내와 바람을 피고 세상에서 가장 쪼잔한 모습으로 박동훈을 괴롭히던 도준영에게도 나름의 사연이 있습니다.


나의 아저씨는 철저하게 이지안과 박동훈을 중심으로 한 이야기이지만, 박동훈의 아내 강윤희를 주인공으로, 또는 도준영을, 또는 주저앉은 여배우 최유라를, 또는 실패한 영화감독 박기훈을, 또는 사업에 실패하고 이혼 위기에 처한 박상훈을, 또는 사랑하던 남자가 출가해버린 기구한 팔자의 정희를, 또는 극중의 그 누구를 새로운 주인공으로 세워도, 완벽하게 아름다운 또다른 드라마를 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것이 이 드라마의 정말 큰 매력입니다.





《나의 아저씨》를 다룬 보도자료에서 가장 많이 눈에 띄었던 것은 '어른'이라는 단어였습니다. '박동훈은 이지안이 처음으로 만난 어른다운 어른'이라는 이야기가 기억에 남습니다. 《나의 아저씨》 OST 의 타이틀곡 제목도 <어른>이지요.


극중의 박동훈은, 본인 스스로 한없이 나약하고 위태로우면서도, 가장 '괜찮은 척'을 잘 하는 사람입니다. 박동훈이라는 극중 인물은, 작가가 굉장히 상징적으로 세워놓은 인물처럼 보입니다.


상처받은 아이들은 너무 일찍 커버려. 그게 보여. 그래서 불쌍해.


항상 외력보다 내력이 세면. 인생도 어떻게 보면 외력과 내력의 싸움이야. 무슨일이 있어도 내력이 있으면 버티는거야.


누군가에게서 위로받고 싶었던 작가 자신의 모습을 이지안에 투영한 것인지, 아니면 작가가 박동훈처럼 멋진 어른이 되어 위로하고 싶었던 누군가가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여간 작가는, 자신이 이 드라마를 통해 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박동훈의 입을 통해 쏟아냅니다.


세상의 멋진 어른들은 아마도 박동훈의 모습을 아주 조금씩 닮은 이들일 것입니다. 정말로 구린 구석이 하나도 없이 꿋꿋하기만 한 인물은 현실적이지 않으니까요.


마찬가지로 우리 모두는 이지안의 모습을 아주 조금씩 닮아 있습니다. 이 세상이 너무 거칠고 힘들어서, 우리 모두는 겁에 질려 도망가고 싶은 순간, "아무 것도 아니야"라고 나를 안심시켜주는 누군가를 필요로 합니다. 지안이처럼 스무한살의 어린애든, 아니면 박동훈 부장처럼 마흔을 넘긴 어른이든 말이죠.


그래서 우리가 이 드라마에 이토록 열광한 것일까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안이처럼 사채업자에 쫓겨본 적도, 살인을 해본 적도 없지만, 지안이의 어떤 모습엔가에서 자신을 발견했을 것입니다. 지긋지긋한 삶의 연속에 눈물조차 흘리지 않는 지안의 모습에 가슴이 아프고, 어두운 방안에서 믹스커피를 약처럼 마시는 지안이의 모습은 출근길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들이키는 나 자신을 떠올리게 합니다.




저는 최종화를 다 보고나서도 지안과 동훈의 모습이 어른어른 눈 앞에 남아 눈물을 멈출 수 없었습니다.


사실 결말은 제 마음에 썩 들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힘든 일들을 지났지만, 그렇게 기구한 사연들을 뒤로 하고 결국 모두모두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 라는 아름다운 결론. 현실적인 이야기를 지나 너무나 비현실적인 결론.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아저씨는 제 인생드라마 목록의 맨 위를 차지할 것입니다.


구질구질해도 이를 악물고 괜찮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아 꾸역꾸역 살다보면 괜찮아질수도 있다는 그 메시지가 제게는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 모든 '망한 것들'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겐 행복할 의무가 있다는 그 메시지가 제게는 절실했기 때문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Movie] 슬픔, 증오, 사랑, 위로의 영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