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아, 안 죽어》 20190315 김시영 作
이 책은 제목부터 참 마음에 들었습니다. 《괜찮아, 안 죽어》 라니. 제목에서 시니컬함과 쿨내가 폴폴 풍기는 느낌 아닌가요. 또 어떤 삐딱한 반항아가 세상에 대한 불만을 토해놓았나 싶었습니다.
표지 우측 상단에 작게 쓰여 있는 "오늘 하루도 기꺼이 버텨낸 나와 당신의 소생 기록" 이라는 문구도 제 스타일이었습니다. 전쟁같은 하루하루를 보내고 돌아와 '휴, 오늘도 죽을만큼 아팠지만 어쨌든 안 죽었으니까.'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직장생활 시절의 제 모습이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책은 제목에서 지레 짐작했던 것처럼 '시니컬하고 쿨하고 세상에 상처받아 뾰족뾰족 가시를 세운' 글은 아니었습니다. 제목에서 풍기는 쿨내와는 달리, 훨씬 사람지향적인 한 의사의 따뜻한 글이었습니다.
나는 한때 아프다고 말하는 사람들, 살기가 녹녹지 않다고 투정하는 사람들에게 '괜찮아, 안 죽어'라는 결론을 내어 주는 것이 의사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위로라고 믿었다. 그렇게 제한된 결론 속에 스스로를 가두며 끊임없이 벽을 쌓는 동안 세상은 더욱 넓어졌고, 나는 점점 좁아지는 틈에 갇혀 옴짝달싹할 수 없게 되었다.
이런 나를 살려낸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내게서 '괜찮아, 안 죽어'라는 소리를 듣던 사람들이다. 그들은 끊임없이 찾아와 '힘들어 죽겠다'는 말로 나를 흔들어 깨웠고 마침내 '우리 죽지 말고 같이 살아가자'며 내 손을 잡아 일으켰다.
어쩌면 여기 모여 있는 글들은 죽을 듯 나락으로 떨어지던 나를 살려낸 내 사람들이, 나를 시켜 써놓은 소생 기록인지도 모른다.
- 《괜찮아, 안 죽어》 p.10
《괜찮아, 안 죽어》 의 작가는 응급의학과 의사입니다. 한 때는 응급실에서 빠르고 격렬한 죽음을 일상처럼 경험했던 사람입니다.
응급실에서 죽고 사는 사람들을 매일 목격하던, 심지어 그 죽음과 소생의 과정에 아주 깊이 관여하던 젊은 시절의 내게 '죽음'은 버거킹 와퍼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개입했던 생존과 죽음은 길어야 몇 시간, 좀 더 구체적이고 정확하게 표현하면 수 분 안에 결정되는 일이 흔했다. 그러다 보니 때로는 햄버거를 주문하고 쟁반을 받아 드는 시간보다 더 짧은 시간에 삶과 죽음이 결정되기도 했다.
- 《괜찮아, 안 죽어》 p.26
작가는 "죽음을 버거킹 와퍼처럼" 지나보냈던 응급실을 떠나, 이제는 엘레베이터도 없는 작은 건물 2층에서 '동네병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괜찮아, 안 죽어》는 그가 동네병원을 운영하며 써내려간 자신의 이야기, 환자들의 이야기, 그리고 다시 환자들을 만나 변화한 자신의 이야기를 엮은 책입니다.
작가는 스스로를 '나쁜 의사'라고 겸손하게 칭하지만, 책 속에서 제가 발견한 작가는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가끔은 환자들의 억지에 짜증을 내기도 하고, 현실의 벽에 좌절하기도 하지만, 결국에는 자기도 모르게, 어쩔 수 없이 자꾸만 몸이 사람에게로, 환자의 마음에게로 기울어지는 사람 말이에요.
시간 참 빠르다. 세상모르고 대기실을 뛰어다니던 코흘리개 꼬맹이들이 교복을 입고 나타나고, 교복을 입은 채 '헐! 대박!'을 입에 달고 살던 녀석들이 여대생이나 군인이 되어 인사를 한다. 숨을 헐떡거리면서 계단을 올라와 힘들어 죽겠다고 하던 어르신들 가운데 몇몇은 이미 돌아가셨고, 아직도 계단을 올라오고 있는 몇몇 어르신들은 이전보다 더 가쁜 숨을 몰아쉰다.
(중략)
오늘 교복을 입고 이곳에 다녀간 또 다른 아이가 '저, 결혼해요'라고 말하게 될 그 언젠가가 되면 나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여전히 '시간 참 빠르네. 내가 여기 온 지 몇 년째지?'라고 생각하며 손가락을 꼽아 보고 있으려나...
그저 그때는 지금보다 조금 덜 충격적이면 좋겠다. 지나버린 시간에 대한 후회와 아쉬움이 지금보다 조금 덜하면 좋겠다. 흘러간 시간에 대해 백퍼센트 만족하지는 못해도 '그래도 열심히 잘살았네, 뭐'라고 말할 수 있으면 좋겠다.
-《괜찮아, 안 죽어》 p. 205
《괜찮아, 안 죽어》에는 노인 환자들의 이야기가 상당히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동네 병원이라 원래 노인 환자들이 많은 것인지, 아니면 기억에 남아 글로 쓸 만한 환자들 중에 노인들이 많은 것인지, 아니면 작가가 노인 환자들에게 특별한 애정을 갖고 있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응급실에서 '인스턴트 식' 죽음과 사투하던 작가는, 동네 병원에서 일을 하면서 감기환자나 노인성 만성질환 환자를 주로 만나게 되고, 자신이 이제는 죽음을 목격할 수 없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 죽음은 늘 그의 곁에 있었습니다. 다만 좀 더 길고 느리게 다가왔고, 그래서 그 슬픔도 더 길고 느리게 사라졌을 뿐.
그리고 나는 오늘 또 한 번의 죽음을 경험했다. 과거와 달리 내가 발을 딛고 서 있는 현장, 내 눈앞에서의 죽음이 아니라 '석 달'이라는 단어를 통한 죽음이긴 하지만.
-《괜찮아, 안 죽어》 p.126
이제 더 이상 그런 급박하고 괴로운 일들과 마주하지 않아도 되는 조그만 동네 의원의 진료실로 옮겨 온 나는 그 고통으로부터 완벽하게 도망쳤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인지하지 못했을 뿐 나는 여전히 죽음과 마주하고 있었다. 매일 죽음을 목격하던 곳에서 조금 벗어나 있을 뿐 여전히 내 사람들은 죽고, 살아나고, 떠나고, 남겨지고 있었다.
-《괜찮아, 안 죽어》 p.130
늘 90대의 노모를 모시고 병원에 오던 70대의 '젊은 아들'이 먼저 암에 걸려버린 이야기, 은퇴한 의사였던 남편이 세상을 떠나기 전 작가에게 아내의 주치의가 되어 달라며 아내의 증상과 처방 약을 상세히 일러주고 간 이야기, 또는 진료가 아니어도 동네 사랑방처럼 병원에 들르던 노인 환자가 어느 날부턴가 오지 않아 궁금해하다가 그 자녀들에게서 부고 소식을 전해듣게 된 이야기.
작가를 통해, 자기도 모르는 새에 아주 느리게 죽음에 한 발 한 발 가까워지고 있는 노인 환자들의 이야기를 들여다보고 있자니, 늙어가는 것, 죽는다는 것에 대한 생각이 많아집니다.
늙어간다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요. 이제 막 30대에 접어든 제게는 실감이 나지 않는 단어입니다.
작년에 할 수 있었던 일을 올해는 할 수 없게 되는 것, 거울 속 동그랗고 초롱초롱했던 눈매가 점점 아래로 쳐지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이 세상의 '새로움'들에 신기함보다 피로감이 앞서는 것, 얼마 전 반갑게 만났던 이가 오늘 거짓말처럼 세상을 먼저 떠나도 아주 이상한 일이 아니게 되는 것. 그래서 누군가를 만나면 '오래 사시오'를 습관처럼, 안부인사처럼, 기도처럼 외게 되는 것. 그런 것일까요?
두 사람 중 '조금' 젊어 보이는 할매가 자기보다 나이가 많아 보이는 할매의 손을 꼭 잡더니 귀에 대고 소곤소곤 속삭인다. 할매들에게는 '소곤소곤'이지만 역시나 병원 어디서도 정확히 들을 수 있는 볼륨이다.
"언니!!"
"응."
"오래 살어!"
"그래, 고마워. 동상도 오래 살어!"
(중략)
오래 살라는 인사...
40년 조금 넘게 살아온 (이 역시 짧은 시간은 결코 아니지만, 암튼...) 나에게 이 인사는 아직도 낯설기만 하다. 이건 사실 인사라기보다 나이를 한참이나 먹은 노인들의 소원과도 같은 기도가 아닐까 생각한다.
하지만 어느덧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너무도 적은 그들에게, 내게는 당연한 '다음의 만남'이 당연하지 않을 수도 있는 그들에게 '오래 살라'는 인사는 거창한 소원이나 기도라기보다는 그저 '내일 또 만나요'와 같은 평범한 진짜 인사인지도 모른다.
-《괜찮아, 안 죽어》p.63
누차 말씀드렸다시피 《괜찮아, 안 죽어》의 작가는 의사입니다. 책에는 '서비스직'으로서 의사가 온갖 종류의 사람들을 매일 대해야 하는 고단함, 그리고 그것을 견디게 하는 소소한 기쁨들이 느껴집니다.
동시에 '죽음에 가장 가까이 서 있는 인간'으로서의 의사가, 본인이 어찌 할 수 없는 삶과 죽음을 매일 대면하며 느끼는 안타까움을 엿볼 수 있기도 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는 것, 그리고 살아간다는 것은 사실 늙어가는 과정이며 죽음에 다가가는 과정이라는 것, 그리고 늙어가고 죽어가는 삶의 아름다움에 대해 생각해보고 싶은 분들께 《괜찮아, 안 죽어》를 추천합니다 :)
"할매."
"왜?"
"괜찮아, 안 죽어요."
(중략)
진료실을 나서려던 할매가 천천히 몸을 돌려 나를 물끄러미 쳐다본다. 인사를 하시려나 생각하며 고개를 들어 마주 보는데 할매가 말한다.
"다 죽어, 사람은."
안 죽는다, 그러나 다 죽는다.
-《괜찮아, 안 죽어》 p.31
늙음에 적응해 간다는 것이 어쩌면 이렇게 조금은 서글프고, 또 조금은 따뜻한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괜찮아, 안 죽어》p.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