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우리였던 날들을 기억해요》 20190318 박형준 作
《우리가 우리였던 날들을 기억해요》 는 열 다섯편의 영화에, 사랑에 대한 작가의 이야기를 끼얹은 에세이입니다. 브런치에 연재했던 글을 모아 엮은 책이라고 해서 왠지 더 반가운 기분이었습니다. (작가 박형준 님의 브런치 ☞ https://brunch.co.kr/@basenell )
책에는 보석 같은 영화 열 다섯 편이 실려있습니다. <이터널 선샤인>, <라라랜드>,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처럼 '사랑 영화'하면 누구나 떠올릴 만한 작품들도 있고, 제게는 다소 생소한 <라이크 크레이지>나 <블루 발렌타인> 같은 작품들도 있습니다.
장면 장면이 눈앞에 선하게 그려질 만큼 좋아하는 작품들을 책에서 다시 만났을 때는 무척 반가웠고, 책 덕분에 만나게 된 낯선 작품들은 책을 덮고 달려가 감상하고 싶을 만큼 매력적이었습니다.
작가는 세상에 존재하는 다양한 사랑의 모습을 차 우려내듯 찬찬히 들여다보고 또 곱씹습니다. 심장이 터질 것 같은 사랑의 시작과 씁쓸한 이별후애(離別後愛), 여름 한계절의 짧고 뜨거운 사랑과 오래도록 잔잔하고 은근한 사랑, 앞뒤 가릴 것 없이 달려드는 풋사랑과 깊고 성숙한 어른의 사랑까지.
불가역을 뒤흔드는 불가항력의 사태가 바로 사랑이 아닐까. (중략) 그 사람과 나 사이에 구분을 두지 않는다는 얘기고 그 사람과 나를 하나라고 여긴다는 얘기다. 말하자면, '내가 너였고, 네가 나였던 날들.'
- 《우리가 우리였던 날들을 기억해요》 p.38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언젠가 네가 사라지고 나면 난 길 잃은 조개껍질처럼 혼자 깊은 해저에서 데굴데굴 굴러다니겠지."라고. 그리고 이 사랑이 언젠가 끝날 거라는 걸 알고 있다고. 그러면서 덧붙인다. 그것도 그런대로 나쁘지는 않다고.
- 《우리가 우리였던 날들을 기억해요》 p.50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함께 행복한 만큼이 사랑이다. 그것이 끝이 난다고 사랑 아닌 게 아니다. 함께 있는 것이 좋아서 시작한 두 사람의 관계와 감정이 사랑이다. 더 이상 함께할 수 없을 때의 그 감정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마무리하는 것도 또 하나의 사랑법. 더 이상 사랑하지 않아도 사랑한 순간들은 서로에게 남아있다. 그리고 사랑의 기억 또한 각자의 것. 'If' 또는 'If not'.
- 《우리가 우리였던 날들을 기억해요》 p.180 (라라랜드)
여러 가지 영화를 소재로 여러 가지 사랑의 양상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만, 결론적으로 저는 작가가 '사랑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랑을 사랑하고 사랑을 믿는 사람. 사랑의 진실함과 아름다움과 따뜻함을 믿는 사람. 때로는 아름답던 사랑이 구겨지고 찢어져 끝을 맞을지라도, 여전히 자신의 삶에 아름다운 한 페이지가 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 사람. 그래서 또다시 새로운 사랑에 겁없이 몸을 던질 수 있는 사람.
작가가 그 동안 경험한 사랑이 진실되고 따뜻했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작가가 특별히 운이 좋은 것일까요. 혹은 성숙한 내면을 가진 작가가 꼭 자신처럼 성숙한 사람을 만나 성숙한 사랑을 했는지도 모릅니다. 그것도 아니라면, 혹시 "아직" 나쁜 사람, 나쁜 사랑에 크게 데이지 않은 것 뿐이지 않을까, 하는 다소 꼰대(?)같은 생각도 잠시 해보았습니다.
저도 언젠가는 그런 사람이었던 것 같은데, 이제는 잘 모르겠습니다. 현재의 남편을 만나고 결혼을 하면서 이 관계에 정착하기로 결심했고, 그 이후로 사랑의 시작과 끝, 설렘, 이별, 미련 같은 것들을 제 인생에 당면한 문제로 생각해본 지 너무 오래되어 희미하게 흐려진 것 같기도 합니다.
《우리가 우리였던 날들을 기억해요》는 작가의 경험과 생각을 담은 글이지만, 읽는 이에게도 각자의 현재와, 미래와 과거의 사랑에 대해 생각하게 합니다. 책 속의 영화들, 작가의 목소리, 그리고 독자의 경험이 삼위일체를 이루는 경험을 선사한달까요.
지나간 사랑을 끊임없이 되새김질 하며 수많은 'If'와 'If not' 사이에서 수많은 밤을 지새우고 있는 분들. 현재진행중인,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를 지나고 있는 분들. 그리고 아직 오지 않은 사랑의 길잡이가 필요한 분들꼐 추천합니다.
만약 이 연애의 지리멸렬함과 끝의 추함까지 모두 경험한 뒤에도 그 사람과 교제하기 이전으로 되돌아간다면, 나는 다시 그 미래를 선택할까? 이토록이나 아픈 생채기를 낸 연애였음에도 재빨리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나는 기억한다. 그 사람과의 이별로 내 모든 걸 빼앗기를 느낌이었음에도, 그 아픔과 생채기가 그 사람과 함께했던 순간순간의 찬란함을 지울 만큼은 아니었다고. 지금의 내 선택은 내가 알고 있는 미래일지도 모른다고. 그리고 그 미래는 고통만 있는 게 아니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렇게 날은 저물고 내일의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
- 《우리가 우리였던 날들을 기억해요》p.170 (컨택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