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프티 피플》 20161121 정세랑 作
《피프티 피플》 은 굉장히 특이한 구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주인공의 이름을 소제목으로 한 짧은 챕터 50개가 줄줄이 엮여 있어, 언뜻 보기에는 단편소설집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고작 대여섯 페이지만으로, 각각의 챕터는 놀라울 정도로 실감나고 세밀하게 한 사람 한 사람의 인생을 비추고 있습니다. 그 상황에 처하지 않고서는 미처 생각하지 못할 만한 부분까지 파고들어 조명하는 것에 저는 감탄을 금치 못했습니다.
심지어 한 명이 아니라 50명의 인생인데 말입니다. 이렇게 다양한 인생들을 이렇게 자세히 묘사하기 위해 작가는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고 들었을까요.
다른 걸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숨만 쉬며 공부만 하면 엄마의 생활비에 얹혀 살 수도 있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영화도 보고 여행도 가고 연애도 하고 옷도 사고, 스물두살 나이를 스물두살답게 살고 싶어서 찾은 게 임상시험 아르바이트였다.
- 《피프티 피플》 p.218 (박이삭)
클래식을 계속했으면 좀 나았을까, 가끔 궁금하긴 했지만 그것도 후회와는 거리가 멀었다. 누군가가 악기를 트럭으로 대신 옮겨주는 건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가볍게 지나가는 정도였다. 결국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가장 잘하는 일이 돈을 별로 못 버는 일일 수 있다. 씁쓸하지만 현의 주변은 다들 엇비슷했으므로 속상할 일이 자주 있지 않았다.
- 《피프티 피플》 p.225 (지현)
그로부터 얼마 안 있어 의식조차 찾지 못했다. 엄마의 코에서, 귀에서 진물이 흐르고 있었다. 엄마는 안쪽부터 부패하고 있었다. 셋째는 엄마를 찾을 때마다 제발 이제 그만 돌아가시라고 울었다. 죽음은 추한 것이었다.
- 《피프티 피플》 p.354 (방승화)
《피프티 피플》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아주 다양합니다. 그리고 《피프티 피플》에 등장하는 모든 이들은 ‘점잇기 그림’의 한 점이 됩니다. 작가는 50여명의 사람들을 날실과 씨실처럼 하나 하나 엮어 아름다운 작품을 만들어 냅니다. 의사와 환자, 젊은이와 노인, 아르바이트생과 손님, 부모와 자식, 한 때 사랑했던 옛 연인. 이 외에도 수없이 많은 관계들로 등장인물들 전부는 얼기설기 얽혀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어떤 의미에서 모두 ‘결핍’을 가지고 있습니다.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는 노동자, 꿈이 좌절된 뮤지션, 판자촌에 사는 가난한 아이, 부당한 성차별을 받는 의사, 치매에 걸린 노모를 부양하는 중년의 자녀, 공황장애를 가진 사람, 젊음을 모두 지나 보내고 죽음의 순간을 덜 추하게 맞기를 원하는 노인.
‘결핍’이나 ‘약자’라는 단어에서 흔히 떠올릴 수 있는 키워드 외에도, 작가는 매우 집요하게, 그리고 매우 다양한 잣대로 사회에 존재하는 수많은 부조리와 수많은 ‘약자’를 수면 위로 끄집어 내고 있습니다.
작가가 《피프티 피플》 를 통해 보여주는 사회는, 누구 한 명이 가해자이고 다른 누군가가 피해자인 단순한 그림이 아닙니다. 서로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타인의 삶에 큰 슬픔을 드리우기도 하고, 한 인생에 비극이 감당되지 않을 만큼 흘러 넘쳐 다른 인생에 더 큰 비극을 가져오기도 합니다. 반대로 그 안에서 부지불식간에 서로에게 작은 위로가 되기도 하고, 심지어는 쓰러질 듯 말 듯 위태로운 인생을 서로가 지탱하고 있기도 합니다.
한편, 개인적으로 작가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에는 공감했지만, 작품 후반부로 갈수록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이 다소 부담스럽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하루는 돌아오는 길에 아내가 말했다.
"복지가 좋긴 좋다"
"응?"
"복지잖아. 어머님 좋은 데 모시는 거 보조금 나오는 것도, 문화센터도."
찬복은 새삼 놀랐다. 굳이 말하자면 신자유주의자로 오랫동안 살아왔다. 금융계에서 내내 일했으니 말이다. 그런데 복지의 혜택을 받고 있었다니. 이게 복지구나. 겪어보기 전에는 몰랐다.
- 《피프티 피플》 p. 296 (임찬복)
50명 등장인물의 캐릭터와 배경 설정, 그리고 이야기 전개를 통해서 충분히 작가의 목소리가 전달되고 있는데, 작가는 그것만으로는 안심이 되지 않는지 뒷부분으로 갈수록 등장인물의 입을 빌려 작가가 직접 직설적으로 이야기하는 느낌입니다.
그 주제의식에 동의하지 않는 바는 아니나, 그 방식이 다소 촌스럽고 부담스럽게 느껴지는 대목들이 있었습니다. 갑자기 ‘소설’에서 ‘신문기사’가 된 느낌이랄까요. 마치, 충분히 대화가 가능한 거리에서 상대방이 갑자기 큰 소리를 질러가며 이야기하면 깜짝 놀라고 당황스러운 것처럼 말이죠.
그러나 여전히 《피프티 피플》은 추천할 만한 작품입니다. 특히, 눈에 보이지 않는 아픔과 설움을 눈에 보이는 어떤 것으로 아주 절묘하게 빗대어 묘사하는 정세랑 작가의 필력만으로도 충분히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울다가 얼굴에 구멍이 나겠구나."
누가 그렇게 말한 적이 있다. 누구인지 기억은 안 나지만. 그 사람 말이 맞았다. 정말로 구멍이 생겼다. 얼굴에는 아니지만 어딘가에 구멍이 있다. 영린은 자주 구멍의 존재를 느끼곤 한다. 엄마가 죽으면서 최초의 작은 구멍이 만들어졌고, 끝없이 우는 과정이, 누군가 찾아온 사람이 영린을 두고 불쌍하다고, 불쌍해 죽겠다고 쓰다듬는 과정이 그 구멍을 계속 넓혀왔다. 가장자리가 무너지고 또 무너지면서 커다랗게 입을 벌렸다.
- 《피프티 피플》 p.121 (문영린)
《피프티 피플》은 가장 현실고발적인 이야기를 가장 시적인 표현으로 풀어내고 있습니다. 작가가 무엇을 위해 이렇게 핏대를 세워가며, 그 핏대세운 모습이 소설을 넘어 독자인 저에게까지 느껴질만큼, 목소리를 높였을까 궁금했습니다. 그리고 그 답을, 저는 작품 중간 즈음 한 등장인물의 대사를 통해 찾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하는 일이 돌을 멀리 던지는 거라고 생각합시다. 어떻게든 한껏 멀리.
개개인은 착각을 하지요. 같은 위치에서 던지고 사람의 능력이란 고만고만하기 때문에 돌이 멀리 나가지 않는다고요. 그런데 사실은 같은 위치에서 던지고 있는 게 아닙니다. 시대란 게, 세대란 게 있기 때문입니다.
소 선생은 시작선에서 던지고 있는 게 아니에요. 내 세대와 우리의 중간 세대가 던지고 던져서 그 돌이 떨어진 지점에서 다시 주워 던지고 있는 겁니다. 내 말 이해합니까?"
"릴레이 같은 거란 말씀이죠?"
"그겁니다. 여전히 훌륭한 학생이군요. 물론 자꾸 잊을 겁니다. 가끔 미친 자가 나타나 그 돌을 반대 방향으로 던지기도 하겠죠. 그럼 화가 날거야.
하지만 조금만 멀리 떨어져서 조금만 긴 시간을 가지고 볼 기회가 운 좋게 소 선생에게 주어진다면, 이를테면 40년쯤 후에 내 나이가 되어 돌아본다면 돌은 멀리 갔을 겁니다.
그리고 그 돌이 떨어진 풀숲을 소 선생 다음 사람이 뒤져 다시 던질 겁니다. 소 선생이 던질 수 없던 거리까지."
-《피프티 피플》 p.381 (소현재)
그러니까, 정세랑 작가는 《피프티 피플》을 통해, 우리 세대의 몫만큼 돌을 던지고 있는 것입니다. 혼자 던지는 것만으로는 돌이 충분히 멀리 나가지 않겠지만, 이 책을 읽은 누군가가 또다시 돌을 주워서 던질 것이고, 그 다음 세대는 한참 앞선 어느 지점에선가 또 돌을 던지겠지요.
저도 저의 자리에서 돌을 던져야겠습니다.
한사람이라도 당신을 닮았기를, 당신의 목소리로 말하기를 바랍니다. 바로 옆자리의 퍼즐처럼 가까이 생각하고 있습니다.
- 《피프티 피플》 p.394 작가의 말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