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잊은 그대에게> 20150615 정재찬 作
<시를 잊은 그대에게>는 사실 제 책장 속에서 1년이 넘도록 묵혀뒀던 책이었습니다. 작년 언젠가 서점에서 책장을 주르륵 넘기다가 마음에 들어서 집어들고 왔지만 그 이후로는 왠지 손이 가지 않았습니다.
최근에 운전을 시작하면서 팟캐스트의 세계에 빠져서 여러가지 독서 관련 방송을 찾아 듣기 시작했는데, 그 중의 한 방송에서 이 책을 다시 만날 수 있었습니다. 수 회에 걸쳐 밀도있게 진행되는 저자와의 대화, 그 인트로만 듣고도 저는 책을 처음 사던 그 날처럼 다시 한 번 이 책에 반했습니다. 그리고 묵혀뒀던 책을 꺼내어 읽기 시작했습니다.
시와 아름다움과 낭만과 사랑이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여야 한다는 것을.
허나 한 세월 살다 보면, 제법 잘 살아왔다고 여겼던 오만도, 남들처럼 그저 그렇게 살아왔다는 겸손도 문득 힘없이 무너져 내리고 마는 그런 날이 오게 마련입디다. 채울 틈조차 없이 살았던 내 삶의 헛헛한 빈틈들이 마냥 단단한 줄만 알았던 내 삶의 성벽들을 간단히 무너트리는 그런 날, 그때가 되면 누구나 허우룩하게 묻곤 합니다. 사는 게 뭐 이러냐고.
그래요, 잊어서는 안 되는 거였습니다. 잊을 수 없는 것은 어차피 잊히지가 않는 법, 잊은 줄 알았다가도 잊혔다 믿었다가도, 그렁 그렁 고여 온 그리움들이 여민 가슴 틈새로 툭 터져 나오고, 그러면 그제야 비로소 인정하게 되는 겁니다. 시와 아름다움과 낭만과 사랑이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여야 한다는 것을.
- <시를 잊은 그대에게> p.5 머리말 中
저 역시 인생의 크고 작은 굴곡마다, 막다른 골목에서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방식으로 저를 다독여준 것은 글이었습니다. 무언가를 잊기 위해서, 또는 무언가를 잊지 않기 위해서 저는 탐닉적으로, 강박적으로 읽고 쓰고 읽고 쓰며 이겨냈던 시간들.
그래서 저자의 머리말이 참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아마도 종류와 깊이를 막론하고, 글을 곁에 두고 살았던 사람이라면 다들 그러하리라고 생각합니다.
위에 소개한 머리말에서 저자는 "시와 아름다움과 낭만과 사랑이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 때 '시'란 단순히 운문만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과 낭만과 사랑"에 대한 고민과 표현은 모두 '시'가 될 수 있습니다.
시를 글감의 일부로 활용한 "아름다움과 낭만과 사랑"에 대한 저자의 에세이
저자는 오랜 기간 일선의 학교에서 국어교사로 일했고, 지금은 한양대 국어교육과 교수로 부임해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중고등학교에서 접한 '국어 교육'의 딱딱하고 근엄한 이미지와는 반대로, 저자의 책은 아주 말랑말랑합니다. '국어학'의 측면에서 매우 엄격하게 '문학 작품'을 분석하고 해석한 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저는 <시를 잊은 그대에게>가 단지 '시의 쉬운 해석'을 담은 책이 아니라, 차라리 시를 글감의 일부로 활용한 "아름다움과 낭만과 사랑"에 대한 저자의 에세이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시를 읽는다는 건 제게 산문을 읽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교과서에서 배운 시는 밑줄과, 별표와, 은유 직유 심상 따위의 분석과 해체로만 가득 차있었습니다. 입시에서 벗어나고서 스스로 시를 즐기겠다는 야심찬 각오로 시집이나 시선집에 도전해보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피상적인 이해에 그치고 말았습니다.
"음..... 뭔가 깊은 뜻이 있어 보이네. 뭔가 마음이 몽글몽글 해지는데...? 자세히 무슨 말인지는 모르지만 왠지 감동적이어야 할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
읽은 후에는 이런 알쏭달쏭한 감동이랄까 물음표만이 제 머릿속을 둥둥 떠다니기 마련이었습니다.
시를 잘 이해할 수 있는 설명을 고명처럼 얹어줍니다
<시를 잊은 그대에게>는 그런 저에게 정말 정말 좋은 책이었습니다. 저자는 교조적인 태도를 매우 경계하면서도, 시를 잘 이해할 수 있는 시대적 배경, 시인 개인의 이야기 등 다양한 맥락적 설명을 고명처럼 얹어줍니다. 책을 읽고 나면 여러 번 마주치고 막연하게 참 좋다- 고만 생각했던 작품들에 한 발 더 가까워진 기분이 듭니다.
아래에는 제게 특별히 인상깊었던 시 작품과 저자의 해설을 소개합니다.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너와 헤어져 돌아오는
눈 쌓인 골목길에 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데,
가난하다고 해서 두려움이 없겠는가
두 점을 치는 소리
방범대원의 호각소리 메밀묵 사려 소리에
눈을 뜨면 멀리 육중한 기계 굴러가는 소리.
가난하다고 해서 그리움을 버렸겠는가
어머님 보고 싶소 수없이 뇌어보지만
집 뒤 감나무에 까치밥으로 하나 남았을
새빨간 감 바람소리도 그려보지만.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내 볼에 와 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
돌아서는 내 등뒤에 터지던 네 울음.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 신경림, <가난한 사랑노래-이웃의 한 젊은이를 위하여>
가난한 이 혹은 노동자로 하여금 인간적인 삶을 포기하게 만드는, 우리 현실에 대한 분노와 자조
그러나 정작 이 시가 실린 교과서의 교사용 지도서를 볼 때, 그리고 거기 실린 해설이 지금까지도 이 시를 다루는 거의 모든 참고서의 주류를 지배하고 있음을 목도하게 될 때마다 나는 얼굴이 화끈거린다. 그에 따르면 이 시의 주제는 '따뜻한 인간애' 혹은 '인간적 진실의 따뜻함과 아름다움'이라는 것이다.
(중략)
이뿐 아니라 진실로 이 시의 주제가 따뜻한 인간애라면 이 시는 사뭇 부드럽고 따스한 어조로 낭송을 해야 할 터, 나는 도저히 이 시를 그렇게 읽을 방도가 없다. 특히 점층적 고조에 이른 마지막 부분,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라는 대목은 울부짖듯이 읽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강의 시간에 실제로 이 시 구절 뒤에 욕설 하나를 슬쩍 붙여서 읽어 보이기도 한다.
아무리 보아도 이 시의 초점은 가난한 노동자의 따스한 마음에 가 닿는 것이 아니라 그로 하여금 단지 가난하다는 이유로 모든 것을 포기하게 만든 이 현실을 향한 것으로 보아야 옳기 때문이다. 즉 이 시의 주제는 가난한 이 혹은 노동자로 하여금 인간적인 삶을 포기하게 만드는, 우리 현실에 대한 분노와 자조라고 말하는 편이 에누리 없는 진실이라 할 것이다.
-<시를 잊은 그대에게> p.26
돌이켜보니 학창시절 국어시간에 배운 시의 해석에 대해 반대의견은 커녕 조금의 의문조차도 가질 엄두를 내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스스로 해석해보려는 시도를 해보지도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저 배운대로 시험지에 잘 옮겨야 하기 때문이었겠지요.
저자의 해설을 읽고 다시 읽어보니, 1970년대에 쓰인 이 시에 '헬조선'과 '오포세대'를 자조적으로 읊는, 저를 포함한 오늘날의 젊은이들의 모습이 겹칩니다. 가난하다고 해서 평범한 직장과 연애와 결혼과 출산을 포기당하고 있는, 거세당해버린 청년 세대가 아프게 떠오릅니다.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라는 구절 뒤에 욕설 하나를 슬쩍 붙여서 읽는다는 저자의 생생한 해설에 슬며시 미소가 지어지며 무릎을 탁 치게 됩니다. 그 욕설이 무엇인지 책에 써놓은 것도 아닌데, 아주 자연스럽게 그 피를 토하는 외침이 '음성지원' 되지요.
4.19가 나던 해 세밑
우리는 오후 다섯시에 만나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불도 없이 차가운 방에 앉아
하얀 입김 뿜으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
어리석게도 우리는 무엇인가를
정치와는 전혀 관계없는 무엇인가를
위해서 살리라 믿었던 것이다
결론 없는 모임을 끝낸 밤
혜화동 로터리에서 대포를 마시며
사랑과 아르바이트와 병역 문제 때문에
우리는 때묻지 않은 고민을 했고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는 노래를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노래를
저마다 목청껏 불렀다
돈을 받지 않고 부르는 노래는
겨울밤 하늘로 올라가
별똥별이 되어 떨어졌다
그로부터 18년 오랜만에
우리는 모두 무엇인가 되어
혁명이 두려운 기성 세대가 되어
넥타이를 매고 다시 모였다
회비를 만 원씩 걷고
처자식들의 안부를 나누고
월급이 얼마인가 서로 물었다
치솟는 물가를 걱정하며
즐겁게 세상을 개탄하고
익숙하게 목소리를 낮추어
떠도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모두가 살기 위해 살고 있었다
아무도 이젠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적잖은 술과 비싼 안주를 남긴 채
우리는 달라진 전화번호를 적고 헤어졌다
몇이서는 포커를 하러 갔고
몇이서는 춤을 추러 갔고
몇이서는 허전하게 동숭동 길을 걸었다
돌돌 말은 달력을 소중하게 옆에 끼고
오랜 방황 끝에 되돌아온 곳
우리의 옛사랑이 피 흘린 곳에
낯선 건물들 수상하게 들어섰고
플라타너스 가로수들은 여전히 제자리에 서서
아직도 남아 있는 몇 개의 마른잎 흔들며
우리의 고개를 떨구게 했다
부끄럽지 않은가
부끄럽지 않은가
바람의 속삭임 귓전으로 흘리며
우리는 짐짓 중년의 건강을 이야기했고
또 한 발짝 깊숙이 늪으로 발을 옮겼다
- 김광규,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얼마 전 오랜만에 어린 시절의 친구들을 만났습니다. 다들 대기업에서 일을 하거나 소위 입신양명의 대명사라는 고시를 통과한 친구들이었습니다. 우리는 모여서 앞으로 이 막막한 직장생활과 또 결혼과 육아에 대해 걱정과 한탄을 한보따리 늘어놓았습니다.
안정적인 삶 따위, 행복한 보통의 아내와 엄마의 삶 같은건 시시해보였고, 뭔가 모험과 도전으로 가득찬 '글로벌 리더'가 되겠다고 덤비던 우리들은, 10년이 지난 지금 적당한 월급과 적당한 근무 강도와 적당한 안정성이 보장되는 일이 최고라며 우는 웃음을 지었습니다. 스스로를 헛똑똑이들이라며 자조적인 농담을 했습니다.
열아홉의 우리는 어느덧 나이가 들었습니다. 열아홉의 우리가 현실에 불시착한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이 시를 그냥 넘길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취직을 해야 했고,
먹고 살기 위해 아니 살기 위해 살고 있었으며
그들이 젊은 시절 바랐던 것은, 탈정치나 정치에 대한 환멸을 넘어, 정치보다 더 영원한 가치, 정치를 초월하는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었다. 아마도 그것은 '문학'과 '예술' 같은 것이었으리라. 그러나 현실의 엄혹함은 그런 약속과 다짐을 한갓 꿈으로 만들고 만다. 그들은 취직을 해야 했고, 먹고살기 위해 아니 '살기 위해 살고' 있었으며, 그러다 보니 필경 젊은 시절의 꿈들은 잊힌 채, 그리하여 아무도 이젠 노래를 부르지 않게 되었던 것이리라.
-<시를 잊은 그대에게> p.162
현실에 대한 부끄러움, 그러나 어찌할 수 없는 그 삶의 진실
그러므로 이 시가 아무리 순수한 옛 시절에 대한 그리움을 담고 있다고 해서, 막연히 그 시대로 돌아가자거나 그 열기를 지금 회복하자는 것으로 귀결되면 그것은 순수한 게 아니라 지나치게 순진한 것이 되고 만다. 그것은 마치 지나간 옛사랑에 미련을 두는 것과 마찬가지다. 아파도 어쩔 수 없다. 지나간 사랑은 보내야 하듯 말이다. 따라서 이 시는 지난날에 대한 그리움보다 현실에 대한 부끄러움, 그러나 어찌할 수 없는 그 삶의 진실을 주제로 삶는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란 제목을 단 이유라고 나는 본다.
-<시를 잊은 그대에게> p.166
시대를 뛰어넘는 공감과 위로
앞서 소개한 <가난한 사랑노래>와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모두 수십년이 지난 지금에까지 큰 울림을 줍니다. 저자가 말하는 문학, 시의 힘이란 이렇게 시대와 공간을 뛰어넘어, 읽는 독자 각각에게 다른 의미로 다가오며 공감과 위로를 선물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한 작품들 다수가 아주 맛깔나게 소개되어 있으니 시를 어려워했던 분이라면 <시를 잊은 그대에게>를 꼭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