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는 기쁨
드디어 자치단체의 <평생학습관>에서 시행하는 2학기 학습 과정이 종료되었다.
지난 8월부터 매주 화, 목 오후 두 시에 <왕초보 영어> 강좌를 수강했다. 재직 시에는 저녁 강좌를 수강한 적이 두 차례 있었다.(영어 중급반, 이라고 했으나 수강생의 반, 이상이 사실상 초급에 해당하는 수준이었다.) 지금은 낮에 시간이 많은 은퇴자이다 보니 굳이 저녁 강좌를 수강해야 할 이유가 없다. 낮 시간을 잘 사용하는 것이 중요한 목표다. 게다가 나는 밤에 활동하는 것을 싫어하는 성격이다. 그러니 낮 강좌를 신청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주간(晝間)에는 영어 강좌가 두 개 과정이 운영되고 있는데 <생활영어>와 <왕초보 영어>다. 퇴직 후 엄마를 돌보다 보니 <평생학습관>의 프로그램을 이용하기 어려웠다. 당해 기관의 시스템을 잘 모르고 있다가 어느 날 검색을 했을 때, 수강신청 기간이 막 끝나고 미달과목에 대한 2차 수강신청이 시작되는 시기였다. 다행히 <왕초보 영어>는 신청할 수 있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나는 영어를 좋아했고 그나마 신청할 수 있는 강좌가 남아 있었으니 고마울 뿐이었다.
사실 그 당시 나는 영어가 아니더라도 무슨 과목이든 신청하리라, 했던 절박한 상황이었다. 무조건 밖으로 나가야 했다. 나를 밖으로 이끌 수 있는 명분을 찾아야 했다. 엄마를 저 세상으로 보내고 몇 달을 슬픔에 잠겨 있다 보니 어느 날 견딜 수 없는 고립감이 찾아들었다. 공포스러운 고립의 느낌이었다. 노인들이 가장 힘들어한다는 그 고립이 어떤 것인지 절실히 체감하고 있었다. 나는 집에서 즐길 수 있는 여러 가지 취미를 가지고 있고, 나름대로 좋은 친구들이 많아서 그것을 자랑으로 여기는 사람이건만 갑자기 다가오는 이 불청객은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아! 이건 아니구나... 밖으로 나가야 한다. 이런 감정을 느끼면서 살기에 나는 아직 너무 젊다. 극복해야 한다. ... 그래서 신청하게 된 영어 강좌다.
40대 후반에 나는 영어에 좀 빠졌던 경험이 있다. 우연한 기회에 영어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는데 내가 영어를 그렇게 좋아할 줄은 나도 모르던 일이라 스스로도 놀랐다. 공부를 하면서 가슴 설레고 행복할 수 있다니 그야말로 신나는 경험이었다.
회사에서는 직원들 교육복지의 일환으로 회사의 <사이버 연수원>에서 월, 1 강좌의 외국어를 수강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수강신청하면 교재도 받을 수 있는 절호의 찬스였다. 특히 내게는 대박 기회였으니 놓치지 않고 열심히 수강했다. 시간이 지나갈수록 회화는 생각보다 느리고 답답하게 성장했지만 내공(內工)은 그보다 빨리 축적되었다. 중요한 것은 취미 영어를 하면서 생활이 즐겁고 기쁘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때때로, 자주 행복했다. ... 하지만 5년 전 '코로나 19 팬데믹' 출현과 함께 나의 영어에 대한 열정도 차차 식어갔고 공부를 안 하니 망각도 쉬웠다. 그래도 나는 공부하면서 느꼈던 기쁨과 행복을 잊을 수 없었기에 조만간 그 귀한 감정을 반드시 되찾으리라, 했다.
"왕초보 과정이면 어때? 초급이든 중급이든 Speaking은 같지" 하는 마음으로 설레면서 첫 시간에 출석했다. 그런데 첫인사를 하면서 나는 알아챘다. ' 이 class는 그야말로 심각한 왕초보 반이로구나.'
구성원은 내 나이 또래가 1/3, 4~50대가 1/3, 7~80대가 1/3이었다. 특히 연세 많으신 분들은 치매 예방을 위해 참여하게 되었다고 하는데 "굿 모닝 " "하우 아 유 " 조차 읽지 못하는 어르신도 계셨다. ' 아! 내가 잘못 신청한 건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는 나의 계속 출석 여부에 대해 나, 보다 선생님이 더 우려하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무엇이든 시작하면 중도에 포기하지 않는다. 어르신들과의 편차는 있었지만 나는 이 과정이 재미있었고 흥미로웠다. 회를 거듭할수록 그분들이 존경스러웠다. 때로 눈물겨웠다.
특히 세 분 어르신들이 생각난다.
한 분은 85세인데 과거 초등학교 교장 선생님이셨다. 그분은 치매 초기라고 하는데 수업과정에서 동문서답하는 등, 그 증세가 조금씩 나타나기도 했다. 하지만 전혀 수업 진행을 방해하지는 않으셨고 오히려 웃음을 많이 주셨다. 귀여우신 분이었다. 항상 사모님이 모시고 오셨는데 출석률이 90% 이상이었다.
또 한 분은, 매 번 교재가 닳아서 오래된 느낌이 들기에 처음에는 중고책인가 보다 했다. 그런데 어느 날 보니 그게 아니라 그분이 집에서 열심히 선행 공부를 해서였다. 책이 너덜할 만큼 공부하시는 것이었다. 감동으로 가슴이 뭉클했다. 나는 가끔 훌륭하시다고 격려해 드렸다. 그분이 포기하지 않도록...
또 다른 한 분은 항상 마스크를 착용하고 다니셨다. 신체 어딘가가 불편하신 듯했다. 열심히 출석하시는 분인데 수업에 오시기 전에는 자치단체의 노인 일자리 지원 사업에 참여하여 일하신다 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강좌 막바지에는 출석을 안 하시기에 선생님께 여쭤보니 입원하셨다고 한다. 마음 아팠다. 시간을 쪼개어 공부하러 오시는 분들은 적어도 생활고에 시달리지는 않는 것으로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다. 그분이 부디 쾌차하셔서 편안해지기 빈다.
마지막 시간에 어떤 이는 내게 다음 학기에는 중급반에 가라고 농담하기도 했지만, 나는 스스로 영어회화를 잘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의 실체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역시 자신(自身)이니까.. 그들보다 젊은 나이에 일정 기간 먼저 공부했던 경험이 잘하는 것처럼 보였을 수는 있으나 리딩(reading)도 발음도 제대로 하는 게 없다. 짧고 쉬운 말을 문법에 어긋나지 않게 아주 조금 구사할 수 있다는 것, 그게 전부다. 그러므로 나는 왕초보 과정을 좋아한다. 이 교재에 실려있는 대화만 표현할 수 있다면 영어로 못 하는 말이 없을 것이다. 어디를 가도 영어고수라는 말을 들을 것이다. 기초이면서 가장 중요한 과정이다. 그런 면에서 이번 <왕초보 영어> 강좌는 내게 많은 도움이 되었다. 강의와 함께 선생님과 짧은 대화를 할 수 있는 기회를 만나면서 잊어버렸던 단어, 숙어, 표현방법 등등 끊임없이 상기시키고 재생시킬 수 있었다. 길지 않은 기간, 만족할 만큼 가성비 높은 강좌였다. 선생님은 60대로 보이는 여성이었는데 매시간 열정적이었다.
이 경험을 계기로 앞으로는 영어의 끈을 놓지 않고, 규칙적으로 공부에 좀 더 정진해 보기로 다짐한다. 70대, 80대 어르신들과 비교하면 나는 얼마나 가능성 많은 젊은이인가!
" I have a long long way to g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