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가 만들어낸 또 다른 문화
광주에 살 때 예비군 향뱡작계를 받는 공원 앞에는, 아주 오래된 곰탕집이 있었습니다. 나주곰탕이라고 적힌 그 식당은, 초등학생 때부터 봐왔습니다. 때문에 저는 당연히 나주곰탕이 유명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온 뒤, 사람들과 전라도 음식에 대해 얘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광주 출신인 저에게 유명한 전라도 음식을 물어보길래, '음.. 나주는 곰탕이 유명해'라고 말했습니다. 다들 눈이 청포도처럼 커지며, 묻더군요. '나주가 어디야?' 아뿔싸, 서울 토박이인 그들에게 나주는 평양보다 생소한 도시였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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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나주는 인구 10만 명을 겨우 넘은 전남의 소도시에 불과합니다만, 몇백년전만 해도 아시아의 베니스라고 할 수 있었던 도시였습니다. 삼국시대 이전에 존재했던 마한의 중심지였으며, 조선시대에는 전주 다음으로 큰 도시였습니다.(당시 광주는 촌마을에 불과했었죠) 오늘날, 전남과 전북을 합쳐 부르는 전라도(全羅道)가 전주와 나주의 앞글자를 따온 것입니다. 조선시대에는 중요 해상운송로였던 영산포 항이 위치했습니다. 내륙 항구임에도 등대가 있을 정도였으니, 그 위세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났을 때에는 동학군이 점령하지 못할 정도로 양반의 위세가 강했던 곳이기도 합니다.
나주는 호남 곡창지대의 중심지 였습니다. 평야의 농축산물과 해안지방의 해산물들이 위쪽 지방으로 올라가기 위해, 항구가 있던 나주 영산포로 모이게 됩니다. 사람이 모이니 자연스럽게 5일장이 형성됩니다. (우리나라 최초 5일장이 나주 5일장입니다.) 거기에 음식재료가 넘쳐나니, 음식의 종류도 다양해집니다. 게 중 유명한 것이 소의 여러 부위를 고아낸 곰국이었습니다. 다른 지역은 소 뼈로 육수를 우려서 국물이 뿌연 색을 띠지만, 나주에서는 고기를 넣고 오래 고았기 때문에, 맑은 국물이 특징이었죠.
곰탕(곰국)은 조선시대, 왕의 수라상에 오를 정도로 귀한 음식이었습니다. 1527년 중종 때 발간된 한자 자습서, 훈몽자회(訓蒙字會)에는 '손이 많이 가는 귀한 음식'이라 적혀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름이 곰탕인가? 조선시대에는 곰의 부위를 넣어서 만들었던 것인가?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요. 사실은 '고다'라는 말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우리말로 고다는 음식을 오랫동안 끓이는 행위를 뜻합니다. 이 말에 ㅁ을 붙여 '곰'이라는 명사를 만든 뒤, 국물 요리를 뜻하는 '탕'이 합쳐져서 곰탕이 탄생한 것입니다. 정리하자면 오랫동안 끓인 국물 요리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나주에서 만든 맑은 국물의 곰탕이, 수라상에 올라가면서 유명해졌구나 라는 생각이 들 수 있는데요. 사실 수라상에 올라간 것은 나주 곰탕이 아니었습니다. 그냥 곰국이었던 거죠.
실제로, 나주곰탕이 알려진 것은 일제강점기 때문입니다. 일제는 나주에 다케나카 통조림 공장을 세워, 군수품으로 소고기 통조림을 주로 만들었습니다. 공장에서는 통조림으로 쓰지 못하는 여러 부위를 근처의 상인에게 싼 값에 넘겼는데요. 이 부위들을 푹 고아서 만든 것이 오늘날 나주곰탕의 시초가 되었습니다. 이후 여러 이름으로 불리다가, 한 식당에서 '나주곰탕'을 상표등록을 하면서 명칭이 통일되었다고 전해집니다.
오늘날 나주에는 곰탕거리가 조성되어 있습니다. 1910년부터 '나주곰탕'을 상표로 등록한 곳도 아직 영업 중입니다. 주말이 되면 이곳은 곰탕과 수육을 먹으러 온 사람들로 북적북적 거리는데요. 곰탕 한 그릇에 수육 한 접시를 시켜 초장에 찍어먹는 그 맛, 전라도가 왜 음식의 도시인지를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