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에서 소변을 보고,
냉장고가 없어도 인생은 아름답다

by 장보철

1993년 12월 2일 필라델피아에서 나의 첫 미국 생활이 시작되었다. 답답하고 막힌 듯한 한국에서의 27년을 뒤로하고, 미국으로 떠났다. 뭔가 새로운 삶의 의미를 찾고 방향을 잡기 위해서 한국에서의 평범한 일상들을 남기고, 훌쩍 찾아간 곳, 바로 필라델피아였다. 필라델피아 국제공항에 도착하니 시간은 어느새 저녁. 사방이 온통 어두웠다. 겨울의 저녁이라, 밖이 캄캄하기도 했지만, 유난히도 흑인들이 많은 곳이라, 더 어둡다는 느낌을 받았다.


"보철아, 어서 와라. 피곤하지!"마중 나온 외삼촌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를 따라 차가 기다리고 있는 주차장으로 가는 길에 느껴지는 필라델피아의 겨울밤공기는 너무나도 상쾌했다. '이곳에서 나는 무얼 하려는 것인가?' 나는 더 이상 서울의 한 거리를 헤매던 젊은 영혼이 아니었다. 미국이라는 한 번도 가보지 못했던 땅에서 나는 새로운 인생의 막을 올리고 있는 것이다. 더군다나, 나에게 가진 것이라고는 고작 4천 불이 전부였다. 그런데, 내 안에서는 이미 생에 대한 기운이 솟아올랐다. 이곳에서 나는 뭔가를 해야만 했다. 다시 사는 것이다. 많은 좋은 조건들을 마다하고 넘어온 곳이었기에 헛되고 방황만 하다가 한국으로 다시 돌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니,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다행히도, 필라델피아의 첫인상과 미국 공기는 나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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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철아, 나 좀 잠깐 보자" 외삼촌댁에서 짐을 푼 지 두 달이 좀 되었을 즈음에 외숙모님이 할 말이 있다고 올라오라고 한다. 외숙모님의 목소리에서 약간의 불안감과 긴장감이 돌았다. 사실, 처음 만난 후, 두 달 동안 나는 외삼촌 식구들과 한 식구처럼 너무나 잘 지냈다. 조카인 미셸과 폴과도 잘 어울렸고. "오빠, 미국 이름 존이 어때요?" "존이라고?" 미셸은 나에게 존이라는 미국 이름을 붙여주었다. 그 이후로 3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나의 미국 이름은 존이다. 존 장이다. 자칫하면 '젠장'이 되버린다.


"보철아, 여기는 미국이란다. 미국은 남의 신세 지는 것을 아주 싫어한단다. 이젠 너도 여기 생활에 조금 익숙해졌으니 독립해야 되지 않겠니?" 아니, 이게 무슨 일인가? 이제 겨우 미국 생활에 익숙해지고 학교 생활도 재미있어질 만한데, 나보고 집을 나가서 독립하라고? 앞이 캄캄했다. 템플대학교에서 어학연수를 하고 있던 나는, 그렇잖아도 갈수록 은행잔고가 뚝뚝 떨어지고 있던 참이었다. 한국에서 가지고 온 4천 불에서 1학기 어학연수비 2500불을 내고, 이것저것 필수 비용을 쓰고 나니, 갈수록 답이 없어서 알바자리를 찾고 있었던 참이었다.


"외삼촌이 싸게 지낼 방을 구해 준다고 하니. 그때까지는 있어도 괜찮아. 아마 네가 일할 자리도 곧 나올 거란다." 외숙모님은 친절하게 내가 지낼 방과 일자리까지 설명해 주었다. 나는 지하에 있던 넓은 거실 겸 방으로 돌아왔다. 하나님밖에는 의지할 때가 없었다. 그리고 충격에서 정신을 차리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 지를 생각해 보았다. 그 후, 일주일 뒤에 나는 외삼촌과 이민 초기부터 친하게 알고 지내고 있다던 소피 아줌마의 집 3층 한 방으로 옮겨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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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워낙에 인상이 좋고 싹싹해서 그런 지, 까탈스러운 소피 아줌마는 나에게 그런대로 살갑게 대해 주었다. 다만, 그녀가 나에게 엄격하게 주문한 것은 단 두 가지였다. 하나는, 자기가 집으로 돌아오는 9시부터 1시 까지는 절대로 시끄러운 소리를 내지 말 것. 둘째, 방과 복도와 주방이나 화장실을 깨끗하게 사용할 것이었다. 그녀는 밤부터 이른 아침까지 미국 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하고 있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잠을 잔 뒤, 점심을 먹고, 1층에 있는 자기가 소유한 가게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녀와의 약속을 지키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녀가 병원으로 출근할 때에는 괜찮았는데, 문제는 그녀가 집으로 돌아와 자는 시간대였다. 그 집은 오래된 낡은 건물이었기에, 각 층으로 오르내리는 계단에서 삐그덕 대는 소리가 유난히 자주 났던 것이다.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으면 계단의 소리가 안 나는 부분을 미리 시뮬레이션을 돌릴 정도였었다. 아무튼, 병원에서 야근하고 돌아온 직후였기에 유난히도 신경이 예민해진 상태의 그녀를 피하는 것이 상책이었다.


그러나, 결국 염려했던 일이 터지고야 말았다. 그 일 후에 나는 거처를 옮겨야만 했는데. 그녀가 돌아와 자고 있던 시간에, 갑자기 소변이 너무나 마려웠던 것이다. 2층에 있는 화장실로 달려가자니 소리가 날 것이고, 할 수 없이 방안에 있던 플라스틱 용기에 일을 보고, 침대 밑에다 숨겨두었다. 그런데, 그 후, 이틀이 지난 어느 날 이른 저녁에 소피 아줌마가 내 방으로 할 말이 있다고 들어왔다. 말을 하던 그녀의 미간이 조금 찌푸려지더니만, "미스터 장. 무슨 냄새나지 않아?" 하면서 코를 킁킁대는 것이었다. 아뿔싸! 소변 그릇을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아, 오후에 좀 새큼한 음식을 먹어서 그런 거 같아요." "아닌데, 이상한 냄새가 나는데"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리고 나갔다. 나는 그날 밤에 그녀가 병원으로 가자마자, 오줌을 버렸고, 일주일 뒤에 그 집을 나와 다른 곳으로 거처를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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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 세컨드 스트리트. 영어로는 new second street. 나는 이 거리를 지금도 잊지 못한다. 소피아줌마 집을 나와 두 번째로 내가 머문 집이 있던 거리 이름이었다. 아주 싼 값에 머물렀던 소피아줌마 집을 떠나, 교포신문을 열심히 뒤적이던 나는 마침내 한인교포 집 지하 1층의 한 달에 250불짜리 방을 얻었다. 방 외에는 혼자 쓸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샤워실과 화장실은 5명 정도의 학생들이 공동으로 사용해야만 했다. 냉장고는 당연히 없고, 정 필요하면 위층에 있는 주인 냉장고를 써도 좋다고 했지만,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집을 옮긴 뒤, 어느 날 오후에 웬 소포가 문간에 있어서 확인해 보니 한국에서 어머니께서 뭔가를 보내셨다. 뜯어보니 겨울옷과 김, 그리고 맛있는 반찬이 들어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옷도 입어보고, 오랜만에 김도 뜯어먹어 보고 난리법석을 피웠는데, 얼마 못 가서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나에게는 냉장고가 없단 말이야! 그렇다. 맛있는 밑반찬통들을 넣어둘 냉장고가 없었다. 그렇다고 주인집 냉장고에 넣어둘 수도 없고. 창밖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가 문득, 한 가지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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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땅을 파자!" 추운 겨울이었기에 땅속에다가 며칠이라도 보관하면 상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간단한 도구를 들고 밖으로 나와 땅을 파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공간이 나오자, 거기다 반찬통을 넣어두고 그 위에 비닐로 덮은 후 단단한 돌을 얹어놓았다. "괜찮은걸!" 내 입가에 미소가 맴돌았다. 다음 날부터 반찬이 먹고 싶을 때면 급조된 비닐하우스 냉장고에서 반찬을 꺼내다 먹고 또 묻고를 반복하였다. 그래도, 그 며칠동안은 행복했다. 어머니의 손맛이 담긴 아름다운 음식을 이렇게라도 해서 먹을 수 있다는 것이 너무나 감사했다.


1994년 겨울. 나는 그 겨울을 지금까지 잊지 않고 있다. 문득문득 지금의 내 삶이 건조하고 지겨워지고 있다고 느낄 때, 나는 그 해 겨울을 기억한다. 난생 처음 내 오줌 냄새를 누군가가 맡고 있다는 그 순간의 당황스러움과 약간의 수치심. 그 흔한 냉장고 하나 없어, 미 동부 역사상 최악의 폭설과 추위로 몸을 떨고 있는 밤에, 얼어붙은 땅을 파고 있던 나의 모습. 한국에서는 도저히 상상 조차 할 수 없는 일들을 나는 온몸으로 받아내고 있었다. 그런데 말이다. 나는 그 순간, 내 인생의 행복을 만끽하고 있었다. 그 어느 하나, 만족스럽거나, 세상이 말하는 행복의 조건들을 거의 하나도 가지지 못했던 나는, 그저 행복했다. 무엇이 그리 행복했느냐고 묻는다면, 그 어느 시인의 말처럼, "그저 행복하지요!"라고 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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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은 그리고 인생의 희망은 타인과의 비교나 세상이 강요하고 있는 수치들에서 나오지 않는다. 만일, 그러한 것들을 좇는다면 우리는 어쩌면 절대로 행복이나 희망을 발견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왜냐고? 정말 그 답을 모르는가? 우리는 절대로 타인과 세상의 기준을 만족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교수이자 기독교작가로서 세상의 잣대로는 어느 정도 성공한 것인지도 모르는 지금, 나는 단연코 말할 수 있다. 1994년 겨울, 그 혹독했던 겨울을 지났던 그 시간과 나를 사랑한다고. 너무나 행복한 순간이었다고. 그 순간들을 외면하지 않고 껴안으며 살았기에 바로, 지금 내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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