푹푹 빠져도, 이 길을 가야 한다

by 장보철

그 해 겨울, 미 동부 전역은 그야말로 엄청나게 쏟아진 폭설로 난리가 아니었다.

매일매일 어디를 가도 하얀 눈 천지였다.

낭만적으로 바라보자면 더할 나위 없이 예쁘고 빛나는 세상이었다.

필라델피아라는 도시가 주는 매력은 참 특이했다. 매우 위험한 도시였지만, 나에게는

무척 새로운 삶의 의욕을 불러일으켜준, 나에게 맞는다고나 할까. 그런 도시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온통 눈으로 덮여서 멋진 풍경을 자아냈던 그 도시의 모습을

낭만적인 눈으로만 바라볼 수 없었다.

나는 돈이 필요했다. 돈이 없는 나에게 폭설은 내가 처한 현실을 일깨워주었다.

당장, 버스 운행 횟수가 줄어들었을 뿐만 아니라, 배차 시간도 훨씬 길어졌다.

운이 좋은 날이면 시간에 맞추어 온 덕분에 크게 힘이 들지 않았다.

그러나, 기록적인 폭설은 나에게 더 이상의 편의를 제공해 주지 않았다.



신문을 뒤적였다. 일할 곳을 찾아야만 했다. 그것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였다.

내 신분은 엄연히 템플대학교 랭귀지 코스에 속한 유학생이었다. 신분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유학생 규정을 따라야만 한다.

무단으로 결석하거나 규정 출석 일수를 채우지 못하면 당장 불법체류자로 신고해 버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단, 나에게는 당장 먹고살 수 있는 돈을 벌어야만 했다.

"여기는 독립적인 문화란다. 남의 신세 지는 것을 안 좋아해."

외숙모님의 차분한 음성이 들려온다.

"어차피, 넓은 세상 보려고 온 거. 까짓것! 내 힘으로 해 보자."

내 손에 들어온 신문은 그곳의 대표적인 주간신문인 <선데이토픽>이었다.


전공도 전공이고, 그래도 잘할 수 있는 일이 '글쓰기'이니만큼 신문사 기자직을

찾아보았던 것이다.

"저, 혹시 기자 필요하지 않으세요?"
"기자 경험은 있나요? 미국 온 지 얼마나 되었죠?"

"전공이 신문방송학이고요. 템플대 랭귀지 코스에 있어요."
"그럼, 이력서 가지고 한 번 오세요."

"지금 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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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사는 고바우센터 지하에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고바우는 필라델피아의 명소였다.

오랫동안교포들의 희로애락이 살아있는 증인인 셈이었다.

나에게 이력서가 있을 리가 없었다. 간신히 하얀 백지를 구한 나는,

고바우 1층 모퉁이에 있던 낡은 책상에 쭈그리고 앉아 대충 작성하였다.

"다음 주부터 나오세요. 그 대신에 주급은 많이 못 줍니다."

전공덕을 본 셈이었다. 주급은 간신히 그런대로 한 주 버틸 만큼은 되었다.


그 후부터, 나는 졸지에 미국 교포신문사 기자가 되었다.

제법 그 지역에 이름이 널리 알려진 사장 덕분에,

나는 크고 작은 온갖 행사와 유명 인사 인터뷰까지 도맡아

여기저기 휘젓고 다녔다.


그러나, 그 일이 결코 쉽지만은 않았다. 평일에는 템플대에서 버스와 지하철을 타고 갔었기에

그런대로 갈 만했었다.

그러나, 토요일에는 내가 살던 뉴 세컨드 스트리트에서 고바우까지는 제법 먼 거리였다.

주말에다가 폭설까지 내려 버스가 오지 않는 날이 많았다. 그런 날이면 어김없이 걸어서 가야 했다.

조금만 걸어도 푹푹 빠지는 길을 하염없이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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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위를 돌아보면 거리에는 아무도 없는 조용한 토요일 오전 8시 즈음.

나 홀로 필라델피아의 어느 숲속을 헤매고 있었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길. 거의 한 시간 정도를 그렇게 걸어가서 출근했다가

끝나면, 고바우에서 집까지 또 걸어서 왔다.

잘 모르겠다. 그때는 왜 그리 그 길을 걸으면서도 행복했는지.

걷고 또 걸으면서, 내가 살아온 인생길을 보았고, 또 앞으로 가야 할

아직은 보이지 않는 미지의 길을 상상해 보았다.


양복을 멋지게 입고 넥타이를 매고 폼 잡고 직장에 다니던 모습이,

학생들을 가르치며, 제법 강사티를 내면서 자장면을 먹던 '그 저녁' 학원에서의 추억이,

중앙 언론사 기자가 되겠다고 3년 동안 엄청난 책들을 들고 다니던 한 폐인이,

그날 아침 필라델피아의 눈 덮인 거리를 홀로 헤매던 내 모습과

어지럽게 교차되고 있었다.


이 시대의 청년, 경력 단절을 잇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3, 40대의 어머니,

그리고, 명퇴 또는 은퇴 후에 재취업을 하려는 아버지,

우리 모두는 가고 가도 푹푹 빠지는 삶이 주는 무게감 때문에

힘들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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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푹푹 빠져도 우리는 각 자의 길을 가야 한다.

가다 보면,

운 좋게도 눈이 녹아서 좀 더 수월하게 갈 수도 있을 것이다.

어느 날, 우연히 나를 알아본 누군가가 태워줄 수도 있을 것이다.

길을 헤매다가, 버스가 와서 좀 더 편하게 갈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녹은 눈길을 걸으려면, 선한 사마리아인을 만나려면,

기다리던 버스를 타려면,

일단, 우리는 이 길을 멈추지 말고/포기하지 말고 계속 가야 한다.

그 길을 가려면 깨끗한 신발로만 가려고 해서는 안 된다.

언 눈길, 녹은 길을 가려면 신발쯤이야 더럽혀질 수 있다.


그것이 무서워서 길을 가지 않는다면,

우리는 고바우까지 갈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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