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애란 <칼자국>
나는 어머니가 해 주는 음식과 함께 그 재료에 난 칼자국도 함께 삼켰다. 어두운 내 몸속에는 실로 무수한 칼자국이 새겨져 있다. 그것은 혈관을 타고 다니며 나를 건드린다. 내게 어미가 아픈 것은 그 때문이다. 기관들이 다 아는 것이다. 나는 ‘가슴이 아프다’는 말을 물리적으로 이해한다. 김애란의 단편소설 <칼자국>
나는 내 몸속에 난 엄마의 칼자국 덕분에 맛난 음식을 먹고 자랐다. 남도의 온갖 재료를 활용하는 지역정서와 당뇨로 천연조미료로 자연의 맛을 고수했던 엄마는 당신의 솜씨를 혼자 길렀으되, 딸에게는 전수하지 못했다. 나는 쉰을 바라보는 나이에 집밥을 유난히 좋아하는 남자를 만났고, 그를 닮은 두 아이들과 함께 맛있는(어쩌면 엄마와 비슷한 맛을 내는) 반찬가게의 몇 가지 요리로 식단을 전전하고 있다.
왕비처럼 살게 해 주겠다는 남자말에 속은 여자 손이 마를 새가 없었다는 내게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혼자 살아본 적이 없었던 길고 까맸지만 고운 손의 여자는 25살 결혼한 뒤에서야 밥을 짓는 사람이 이제는 나여야 한다는 사실을 비로소 알았다. 형제자매들과 자취생활을 할 때만 해도 광주 사는 엄마가 일주일 단위로 해서 고속버스 당일탁송으로 부쳐주시는 온갖 밑반찬을 데워 차리면 되었고, 밥솥 밥만 새로 해서 보태면 되었으니 직장생활의 고단함도 엄마의 손맛으로 잊을 수 있었다. 엄마의 밥이 나를 키웠음에 감사한 마음도 들었다. 엄마가 재료 하나하나 공들여 손질하고 조리해서 얼리는 데 걸리는 시간에 혀를 내두르지만, 오빠가 정말 좋아했다는 말로 대체할 뿐 말리지는 않았다. 그때만 해도 여자는 집밥이 좋았다. 단 내가 한 것이 아닐 때에야 집밥이 정말 좋은 것임을 미처 알지 못했을 뿐이다.
남편과 아내가 된 뒤로부터 우리 집 끼니에 대한 걱정은 나만의 것이 되었다. 애인사이일 때 내가 좋아하는 메뉴로 밖에서 맛난 음식들을 사주던 구남자 친구는 짠돌이 남편이 되어 '있는 반찬에' '대충'먹는 사람이 되었다. 사랑의 콩깍지로 나는 남편이 좋아할 만한 엄마가 시골에서 해주었던 요리를 하나씩 시연했다. 깻잎조림, 꽈리고추찜, 찐 가지나물무침 등 우리 남편은 X세대는 잘 알지 못할 요리를 내가 엇비슷하게 해내는 것에 감탄의 박수를 쳐주곤 했다. 가끔은 너무 짜거나, 국물이 너무 많아 끓어 넘치는 상황에도 '칭찬은 섣부른 아내를 요리하게 한다'를 굳게 믿었던 모양이다. 2년 뒤 아이가 태어나고, 다시 2년 뒤 둘째가 태어나는 동안 나는 아이를 위한 무첨가 반찬에 심취했으며, 모든 재료는 유기농으로 구비해 배달음식자체를 멀리하고 살았다. 맛없지만 건강한 음식들을 가까이하고, 그 뒤로도 아이들이 커가는 동안 집밥을 해주어 누군가가 배부르게 먹으면 내 인생의 보람이라고 굳게 믿었었다.
아이들은 내 의도대로 자랐다. 남편처럼 집밥을 좋아한다. 두 아이의 좋은 습관 중 하나는 '아침식사'를 제대로 먹는 거다. 아이들은 유치원 다닐 때부터 성년을 맞은 지금까지 아침에 밥, 국, 밑반찬에 계란프라이나 생선구이로 구성된 가정식 백반을 먹는다. 아이들의 아침밥은 최근 10년 전쯤 간편식으로 대체될 뻔했지만, 국을 데워 스스로 먹는 것으로 명맥은 유지하고 있다. 아침밥 대 혼란기는 엄마가 새벽공복 달리기를 시작했을 무렵 맞이하게 되었다. 새벽에 일어나 아침에 에너지원을 섭취하기 전 운동은 체지방을 연소하는데 좋다. 7~8시간의 공복을 유지한 뒤에 하는 운동이니 새벽이 가장 좋은데, 아이들의 아침 식사를 챙겨야 하는 나로서도 잠을 조금만 줄이면 된다는 측면에서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살을 뺄 목적으로 운동을 해오던 시간이 1년쯤 되었고, 아침 공복유산소는 마지막 피치를 올리는 작업이었다. 달리기 시작 전후를 비교해 보면 5kg 감량의 효과를 봤으니 공복 달리기는 내게는 동아줄과도 같은 비책이었다. 처음 3km를 달릴 때 약 30분이 필요했다. 실질적으로 달리는 시간 전후의 스트레칭을 포함하고 빠르지 않은 속도로 뛰어도 가슴이 몸 밖으로 뛰쳐 나올 듯 심하게 뛰어 벌건 얼굴로 발소리보다 더 큰 숨소리를 내쉬며 뛰었던 나날이다. 아파트 단지 한 바퀴가 1km이니 그걸 3바퀴 하고 나면 흘린 땀만큼 몸이 가벼워짐도 느낄 수 있었다. 좀 더 뛰어볼까 생각해서 5km로 늘렸을 때부터는 시간에 쫓기기 시작했다. 페이스는 그다지 빠르지 않은데 어제도 5km 뛰었는데 오늘은 그것보다 조금 더 뛰거나 최소한 그만큼은 뛰어야지 하고 스스로 정한 목표는 나를 옭아매고 있었다.
전후 스트레칭까지 포함해서 5 ~ 6km 거리를 뛰려면 아파튼 단지를 6바퀴 돌거나, 인근 근린공원을 갔다가 돌아오는 루트를 밟아야 한다. 같은 곳을 뱅뱅 도는 것은 내 성미에 맞지 않는다. 또 목표지를 갔다가 돌아오는 여정은 바뀌는 풍경에 지나는 사람들의 달라진 행색을 보는 즐거움, 집에서 떨어진 곳까지 왔다는 성취감까지 다양한 감흥을 일으켰다. 지근거리에 있는 식물원은 계절이 어떻게 바뀌는지 식물들의 생김새에서 알 수 있었고, 철마다 달리 피는 꽃을 보는 재미도 쏠쏠했다. 문제는 이것을 하려는 시간이 점점 늘어난데 있다. 집 밖을 나서기만 하면 코에 바람이 들어 좋아 흥얼거리고 다녔으니 에미를 믿고 잠이 든 두 아이들은 아침에 허둥지둥할 수밖에 없었다. 엄마의 부재에 대한 적응도 귀찮았겠지만 아침의 달콤한 잠을 양보하기 싫었던 아이들 탓에 나는 운동시간의 부족을 늘 원망했다. 또 스스로 일찍 일어나지 못하면 아침밥을 포기할 것이지 부득불 아침에 밥을 먹느냐며 두 아이들이 눈치 없다고 탓하기도 했다.
엄마의 칼자국이 나를 키웠다면, 나의 칼자국은 이제는 더 이상 쓰이고 싶지 않다고 선언했던 셈이다. 단련되어 다리가 가벼워질수록 나는 칼질을 하고 싶지 않았다. 아이들은 처음에는 "꼭 그 시간에 운동을 해야겠냐?"라고 묻던 것에서 내일은 정말 늦으면 안 된다며 스스로 자기 몫을 챙기는 모습으로 변화하기도 했다. 시리얼에 우유는 아니어도 엄마가 챙겨주는 주먹밥이나 계란장조림 비빔밥을 불평 없이 잘 먹는 것으로 협상점을 찾을 수도 있었다. "새끼들 입에 밥만 들어가도 배가 부르다"는 말은 적어도 내게는 통용되지 않았다. 나는 내가 다리 아프게 뛰는 게 내 아이들 배불리 먹는 것보다 좋았다. 아이들도 이내 적응되었는지 누적 거리에 향상된 페이스에 만족스럽게 웃는 내 모습을 보며 아이들이 내게 "엄마는 그게 그렇게 하고 싶어?" 물었다.
나는 내 엄마가 아팠다면, 내 아이들은 적어도 나를 아파하지 않아도 될 테니 그걸로 족하다. 나로서도 엄마역할을 하느라 포기하거나 애초부터 시도하지 않은 일들이 꽤 있지만 가족들에게는 자기 불편함이 주로 기억에 남을 것이다. 고은손 공약을 고무장갑으로 대체하고 있는 남편은 가장 큰 반대 측이다. 그래서 나는 주말에 좀 더 일찍 일어난다. 어머니 아들 입에 밥이 들어가야 평화로운 주말을 맞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오늘도 다리 힘이 주춤하고 풀리지만 누군가의 뱃속을 채울 칼질을 하고 있다. 예전보다는 덜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