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10km를 뛰고 울뻔한 이야기
아이들 키우면서 몸이 점점 후퇴하고 있는 건 느꼈지만. 체력은 끄덕 없노라고 자부했다. 두 아이를 안고 업고 쇼핑몰을 누벼도 밤에 자고 일어나면 다음날 완충까지는 아니어도 80프로 정도는 복구되고, 나머지는 육아의 시간이 지난 뒤 마시는 500ml 한 캔의 맥주로 족하다고 생각했다. 점점 무너지고 있다는 걸 느낀 건 두 아이 모두 한 유치원에 다녔던 해 개최된 체육대회였다. 5,6,7세로 나뉘고 각 연령별 3개 반이 있었던 유치원에서 반별 대표 어머니 200m 계주가 있었고,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반대표 선수가 되었다. 그러니까 내 등 뒤에는 반 아이들 25명과 그네들의 부모들까지 약 5~60명의 응원이 딸려 있었다. 막중한 책임감을 느끼고 나는 정신없이 뛰었고, 결승선에 가까이 자리한 우리 반 아이들의 우렁찬 응원소리에도 불구하고 꼴등을 했다.
그들의 실망감에 대해 느낄 새도 없이 나는 그날 내 심박 소리를 다른 사람도 들었으라 생각했다. 거센 숨을 내쉬며, 장기중 가장 중요하다는 심장이 고장 난 건 아닌가 의심할 지경이었다. 그렇다. 나는 2회의 임신과 7년간 육아를 하는 동안 뛰어본 게 단 한차례도 없었다. 살을 빼기 위해 굶으면 굶었지 운동하는 걸 죽도록 싫어했던 내게 임신과 육아기는 내 몸을 마음껏 방치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그 당시 나는 출산 3년 후에도 5kg 정도밖에 줄지 않아 여름에는 뱃살 사이에 땀이 흥건히 고이는 "비만"여성이었다. 두 아이가 모두 유치원에 등원하게 되면 살을 빼리라 다짐했건만, 아이들의 등원시간에는 집안일과 동네 차모임 등을 아이들 하교 후에는 놀이터에서 3 ~ 4시간 놀고 저녁식사 후 맥주 한잔으로 일과를 마무리하는 생활을 지속하고 있었다.
임신중반에 입었던 남편 바지를 입으면서도 임신 전 입었던 내 옷을 버리지 못했고, 그렇다고 언젠가 뺄 살이니 지금 내 몸에 맞는 옷을 사 입지 않아 몸의 곡선을 전혀 드러낼 수 없는 다이어트 중이지만 노력은 하지 않는 상황이었다. 유치원 체육대회에 가족끼리 맞춰 입은 핑크색 면티 사이즈가 남편과 같은 100이었으니, 아이들은 남편이 가리킨 대로 "아빠곰은 날씬해, 엄마곰은 뚱뚱해"를 의심 하나 없이 따라 부르고 있었다. 체육대회는 3시에 마쳤고 집으로 돌아와 나는 그날 아이 씻기고 정리할 새도 없이 잠들어 다음날 새벽 동틀 때에 깨어났다. 200m 뛰었을 뿐인데, 온몸이 아팠다. 목 뒤의 승모근(당시에 어깨라고만 생각했던)이 뻐근했고 허리와 엉덩이가 부서질 듯 아팠다.
어기적거리며 안방을 빠져나온 나를 새벽부터 블록을 쌓고 있던 아들이 반겼다. "엄마 아팠어? 인제 괜찮아?" 다정한 아들은 내 걱정을 잃지 않았다. 그리고 한마디 "엄마 살이 후두두둑 흔들렸어." 말이 늦게 틔어 어휘력이 빈곤했던 아이가 내가 뛰던 모습이 우습게 기억했던 모양이다. 나는 괜히 머쓱해서 "꼴등도 괜찮은 거야. 엄마가 최선을 다했으니까."라고 말했지만 마음이 쿵 내려앉았다. 당시 걱정될 정도로 심하게 마른 체형의 딸 옆에 설 때 사람들은 "아이가 엄정 날씬하고 길쭉해서 예뻐요.. 근데 엄마는 좀 다르네." 그 '좀'이라는 말이 내 마음을 파먹어 들었다. 내가 이렇게 취급당해도 살을 안 빼면 사람이 아니다. 란 마음으로 체중감소제(한약이나 시판용 식품)만 안 썼지, 탄단지 고르게 갖춘 식단과 규칙적 운동까지 생활 전반을 바꾸게 되었다.
근력운동부터 요가까지 생활을 바꾸고 채식 위주로 식단을 바꾸니 몸이 달라졌다. 달리기는 5kg 정도 빠진 후 정체기가 왔을 때 시작했다. 처음 시작할 때는 체육대회날 내뿜던 거친 숨소리가 새 나왔다. 이른 시간 운동하는 아줌마 아저씨들 사이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뛰었다. 그렇게 100일가량은 비 오는 날을 제외하고 꼭 하루 8 천보 이상을 달리기로 채웠다. 살이 빠지는 재미도 좋았지만, 새벽에 아이들 깨기 전 혼자 있는 시간이 잊고 있던 해방감을 느끼게 했었다. 5km를 처음 달리던 날, 내게 러닝화를 하나 선물했었다. 운동화는 발이 편하면 수년도 신는 거라 생각했는데, 6개월 빠짐없이 운동했더니 멀쩡해 보였던 신발 밑창이 닳아 미끄러지는 느낌을 받았다. 내 생애 최초로 신발을 밑창이 닳아 바꾸는 된 경험은 이후로도 나는 뛰는 사람으로 살겠다는 의지를 북돋았다.
그렇게 계속해서 인근 근린공원 400미터 트랙을 12바퀴 도는 루틴을 만들었다. 달린 지 1년쯤 지날 때 코비드 19 대유행기가 도래했다. 돈 벌러 나가는 사람만 외출이 허락된 시기까지 갔을 때 야외 운동장도 폐쇄가 되었다. 당시 뛰는 사람이 마스크를 쓰지 않으면 '공중도덕을 무시한 파렴치한'으로 취급되던 때였다. 숨이 가라앉긴 했지만 여전히 큰 소리의 호흡(과호흡)을 하는 사람인 내게 인근 근린공원은 위험한 곳이 되었다. 아이들도 학교를 안 가고, 종일 집에서 수업을 듣던 그때 할 수 있는 유일한 운동이 또 멀리까지 나가서 뛰는 거였다. 집에서 한강까지는 직선으로 2km 거리다. 방화대교밑의 한강공원까지 보행로를 타고 나가 가양 대교에서 집에 돌아오는 거리가 10km 정도 남짓이다. 코로나에 걸릴까 봐 겁도 나고, 인근에서 내가 이렇게 운동에서 집착하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도 귀찮았다. 그래서 강서구를 벗어날 때는 늘 교통수단을 이용했던 내가 한강을 겁도 없이 혼자 나가게 된 셈이다.
10km 그중 2km 남짓은 걸었지만, 집에서 시작해 한강에 도착해 그것을 바라보는 마음은 제법 벅찼다. 내가 내 집을, 내 생활 반경을 벗어나는 모험을 했다! 는 성취감과 아이들이 찾아도 돌아오는데 적어도 30분 이상이 걸리니 서로 분리할 수 있는 독립심을 갖게 했다. 헐떡이며 도착해서 미처 보지 못했던 한강의 넘실거리는 큰 물결이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내게 자주 보자고, 여기까지 오는 길이 쉽지 않다 하더라도 멈추지 말라고 응원해 주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길로 나는 머리가 새하얗게 새도록 달리는 할머니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나는 마라토너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