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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졔졔 Aug 13. 2021

소화 불량에 글 쓰기를 처방합니다.

나를 돌아보고 대화하는 최고의 방식

이 글은 아마도 내 첫 브런치 글이 될 것이다.


글을 쓰는 것을 두려워하거나, 글을 쓰는 것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다. 외려 좋아하는 쪽에 가깝기 때문에 남들이 아름답거나 흥미로운 이미지를 올리는 인스타그램에 사진 한 장을 올릴 때도 논문을 쓰게 되곤 한다. 쓰고 싶지만 잘 쓰게 되지 않는 스스로를 등 떠밀어보려고 글을 쓰고자 하는 사람들과 시간을 정해 온라인으로 만나 각자, 또 같이 자기만의 방을 틀어보고자 하는 것도 쓰는 것이 좋기 때문일 것이다.


왜 쓸까? 나는 왜 쓰는 것을 좋아한다고 할까? (그리고 왜 안 썼을까? 그렇게 좋아한다고 하면서 안 썼을까? 이 얘긴 다음 글에서 해보려고 한다.)


부지런한 사람들이 정리한 감정 오버랩!

영화 <인사이드 아웃>에 나오는 캐릭터들은 기쁨(Joy), 슬픔(Sadness), 버럭(Anger), 까칠(Disgust), 소심(Fear)은 인간의 대표적인 감정 5가지를 의인화해서 만들어졌다. 주인공이 어떤 사건을 기억할 때, 이 캐릭터들은 각 사건을 겪을 때 어떤 감정들이었는지를 각 사건에 덧입혀 기억하도록 한다. 주인공의 어린 시절에는 이 과정이 단순하고, 각 사건이 5가지 감정으로 명확히 카테고라이징 되어 기억을 저장하는 일에 무리가 없지만, 점차 어떤 사건에는 여러 감정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다양한 감정이 덧씌워지는 형태가 되기도 한다.



모두의 삶이 늘 평탄하기만 하지는 않을 터, 내 삶에도 명확하게 정의하기 어려운 감정이나 사건이 종종 발생한다. 어떤 기억들은 끝끝내 언어로 정의되지 않을 것 같아 아득하다. 보따리 속에 꽁꽁 싸매어 보이지 않는 깊은 마음의 창고 속에 처박아두고 싶은 일들이 몇 톤이다. 하지만 켜켜이 처박아둔 사건들 사이에 습기가 차고, 억지로 욱여넣은 자루가 삭고, 그냥 쌓아둔 잡동사니 같은 일과 마음들에는 좀이 끼기 마련이다. 결국 하기 싫더라도 정면으로 바라보고 해석해서 '기억의 구슬'로 정제해 보관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미룬 청소를 하듯, 마음이 좀 먹지 않기 위해서.


인간의 마음은 유약하고도 강해서, 당장 청소해내지 않는다 하여, 괴로움에 게으름 피우게 된다 하여 내면이 무너지지 않는다는 점이 안도하게 되는 지점이지만 너무 늦지 않을수록 좋다. 기억이 휘발되면 기억이 이리저리 엉기고 먼지가 쌓이면 어떤 감정이었는지, 어떤 사건이었는지 정제해내는 것이 더욱 괴롭고 고통스러워지기 때문이다. 오래 쌓였던 기억들이 외로워지기 때문이다.


외로움은 사건을 소화하는데 어떤 도움도 되지 않는다. 이 청소와 정제의 과정에서는 꼭 대화의 상대가 필요하다. 대화의 상대는 다양할 수 있다. 어떤 사건은 정말 고통스럽기 때문에,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나 기억과 사건을 훑는 것에 길잡이가 필요하기 때문에 전문가와의 대화가 필요하다. 어떤 사건은 잘 들어주는 좋은 귀, 들은 내용을 품는 넉넉한 품을 가진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대화가 필요하다.


어떤 사건은 너무 사소하거나 너무 거대해서 나 스스로와 직면하는 대화의 시간을 요구한다. 나에겐 큰 의미가 있지만 이야기를 듣는 누군가에게는 너무 사소할까, 엄살 부리는 것처럼 들릴까 싶은 마음에 목에서 걸려버린 말들은 나에게 할 수 있다. 너무 거대해서 배 속에 갇혀버린 말들도 도무지 소화가 되지 않는 것들도 배설물 같은 말들도, 나에게 할 수 있다.


그리고 글쓰기는 나 자신과의 좋은 대화의 시간을 선사한다.


그래서 쓰는 것을 좋아한다. 쓰는 것 앞에서는 약해진다. 목에 있는 걸 켁켁 거리며 토해냈다가 다시 읽어보며 머쓱해진다. 내 글에 투영된 나는 어떤 땐 너무 망상 환자 같고 어떤 때는 너무 자아가 비대해 보이고, 어떤 날에는 어린아이 같기 때문에. 소화되지 않았던 것을 배설하고 나서는 스스로의 잔인함, 여유 없음, 형언할 수 없는 분노와 슬픔에 놀라는 경우도 적지 않다. 다른 사람 앞에서라면 쉬이 내보일 수 없을 이야기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끝내 이야기하며 나 스스로를 위해 비워내고 정의하고, 정제해야 할 것들.


글을 통해 내가 나와 대화하면 스스로가 별로인 지점도 투명하게 보이지만 글쓰기를 통한 대화는 기본적으로 '내 시점'으로 재구성된 이야기에 '내 시점'으로 구성된 해석을 전제하기 때문에 '까도 내가 깐다'는 말처럼 선택적 객관화와 주관적 편들기, 내로남불을 시전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믿었던 이로부터 '까이면' 더 괴로울 텐데'라는 불안감 없이 안전할 수 있다.


동시에 엉키고 맺혀있던 감정들을 하나, 둘 나열하면서 사건을 설명할 언어를 찾게 된다. '기억의 구슬'의 색을 남의 언어, 외부의 목소리를 통해서가 아니라 내가 주도적으로 정리할 수 있게 된다. 그때는 설명할 수 없던 사건들이기에 처 박아 놓았던 사건들에 대해 선명히 생각을 정리할 수 있게 된다. 성추행의 경험은 수치심이 아니라 분노와 불쾌감이었다는 것을, 임신 중단의 사건에는 슬픔도 존재했지만 안도가 더 크게 존재했다는 것을, 폐업의 경험은 두려움이기도 했고 수치심이기도 했다는 것을. 하나하나 글로 짚어내지 않았으면 찾아내기 어려웠을 적확한 단어를 찾는 것. 그때서야 소화가 된다. 막혔던 목이 트이고 더부룩한 속이 개운해진다.


이렇게 쓰인 글쓰기의 결과물이 '좋은 글'일지를 물으면 쉬이 그렇다 답하긴 어렵겠지만, (특히 상업 출판이라고 할 때 더더욱 쉬이 답하기 어렵겠지만), '나는 왜 쓰는 것을 좋아할까?'에 대해서는 다시 읽어봐도 그럴듯하다. (선택적 객관화를 시전 중이다.)


오늘도 오히려 쓰면서 알게 된다. 나는 생각보다 청소의 중요성을 알고 있다는 점 (집 청소도 해야겠다.), 그리고 기억을 나만의 언어로 소화하고 싶을 때 스스로에 글 쓰기를 처방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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