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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졔졔 Aug 13. 2021

그러니까 늘 이게 문제였다.

제대로 못하느니 안 하는 게 낫다는

만약 당신이 나의 이전 글을 읽어준, 나에게 관심을 두고 있는 누군가거나, 시간이 많이 있는 부러운 이라던가, 혹은 어쩌다 보니 그러고 있는 다정한 사람이라면 '감히' 쓰는 것을 좋아한다고 자신 있게 얘기한 앞선 문장을 기억할 것이다. 쓰는 것을 좋아한다고 하면서도 이제야 브런치라는 세계에 발을 들여두었다는 점도.


쓰는 것을 좋아하지만, 좋아하는 것을 한다고 늘 기쁜 것은 아니라는 게 (적어도 나라는) 인간의 교묘한 함정이다. 쓰는 것은 좋아하지만, 속풀이 하듯 그냥 쓰는 것이 아니라 쓴 것을 누군가와 공유하는 결심을 하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했다. 적어도 한 번 이상의 깊은 들숨과 날숨이 필요했고, 나의 경우에는 978,437,238,890 회의 숨이 필요했다.


혼자 쓰는 것과 달리 브런치에 글을 쓰는 건 언젠가 누군가에게 살포시 열어 내보이고자 하는 마음으로, 조심스레 '저기요'라며 지나가는 이의 귓바퀴를 건드려 '저는 이렇게 생각하는데요...'라며 말을 거는 일이 될 수도 있으니 조심스러웠다. 그리고 그때부터 나는 브런치에 글을 쓴다는 행위를 멀리멀리 미뤄두었다.


쓴 것을 내보여야 할 때, 나는 울고 싶다.


어쩌면 쓰기 전부터  것을 내보이는 행위의 슬픔과 슬픔이 시작된다. 나의 이야기를 누군가 어떤  명은 읽어주지 않을까,  사람 마음비옥한 땅에 내려앉은 풍성한 솜털의 민들레 씨처럼 자리 잡게 되진 않을까 하는 설레는 마음이 쓰기 전부터 밀려들면, 나는 이미 운다. 이미 벅차 버리는 것이다.


반대로, 쏟아지는 활자의 시대에 너무 좋은 글들 사이에 아무렇지 않게 구겨져 쓸려가 버리면 어쩌나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한다. 조예은의 장편소설 <스노볼 드라이브>에서 녹지 않는 첫눈이 내리던 날 발목이 꺾여 무기력하게 바닥에 앉아있을 수밖에 없던 주인공 '모루'처럼 내 글이 누구에게도 닿지 못하고 힘 없이 쓰러져 버리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 마치 글이 내 구겨진 자아인 양 의기소침해진다. 이 경우에도 이미 운다.


어찌나 이렇게 감정 조루일까 싶다. 어쩌면 나는 이 정도로 쓴 글을 공유한다는 것을 내 내면과 타인의 내면이 밀접한 관계를 맺는 행위로 생각하는 것일 테다. (사실, 고등학생 때는 대학원서를 쓰며, 대학 졸업 즈음에는 입사 원서를 쓰며 이미 붙거나 떨어진 마음으로 슬펐던 날들에 대한 기억이 갑자기 밀려오는 것을 보면 내가 원래 잠재적 미래의 감정을 미리 느껴버리는 인간인 까닭도 있을 것 같다.)


어쨌든 이래도 저래도 울 것 같은 마음이 된다면 다른 사람의 마음 한 구석에 글이 있던 흔적을 남기는 글을 쓰고 싶다. 그래. 나는 잘하고 싶은 것이다. 앞서 얘기한 조심스러움은 사실 자기 기만에 뻥에 가깝고, 이 글 좀 쓴다고 하는 사람들이 뭉텅이로 모여있는 글쟁이들의 플랫폼에서 '잘하고' 싶은 것이다.


고양이들과 침대에서 뒹굴다 번뜩 든 생각을 일필휘지로 내질러 써도 명문이면 좋으련만 그럴 그릇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이미 알고 있다. (아, 인정하기 싫다. 하지만 알고 있다. 나는 안다. 아, 알고 싶지 않다.) 그렇기에 숙고하고 퇴고하며 글을 다듬어, 천재의 호쾌한 필치는 아니더라도 수재가 내놓은 듯한 반듯하고 성실한 글은 써내고 싶다. 독자로 하여금 읽으면서 지나치게 갸우뚱하지 않도록 하는 글 정도는 써내고 싶다. 더 솔직히 말하면 누군가 내 글을 좋아해 줬으면 좋겠다. 그런데 그렇게 세상이 녹록할 리가 없다. 이 세상의 법칙 53278조는, '누군가 나를 좋아해 주길 열망하면 보통 더 매력 없이 느껴지고 외면 받음' 이니까. 그래서 외면 받음을 외면하기 위해 브런치에는 절대 글을 쓰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흔한 직장인 A 씨 모드로 '아, 나도 브런치에 글 써야 하는데' (자매품으로 '아, 나도 유튜브 시작해야 하는데')라는 머뭇거림의 언어만 반복하는 Ms. 아가리라이터 (* 쓰겠다고 백 번 천 번 말로만 쓰는 작가로, 주요 입 저서로는 공상과학 소설 '드디어 써서 내보였다.'가 있다.)로 남아 있었다. 혹시 내가 못할까봐, 못하는 나를 인정해야 할까봐.


어떻게 보면 늘 그랬다. 내 안의 완벽주의자 성향은 일정 수준을 갖춰 마무리 짓고 성공하거나 결실을 맺지 못할 것 같은 일들은 시도하지 않게 했다. 그리고 반작용으로 일단 시도한 것은 또 너무 잘하려다가 나 자신을 지나치게 혹사시키게도 했다. 제대로 못할 일은 시작하지 않는 것, 시작한 일이라면 엄청 잘 해내고 싶은 마음은 '믿고 일을 맡길 수 있는' '일잘러'의 이름표와 함께, 점점 좁다고 느껴지는 안전지대, 가보지 않은 길들에 대한 미련, 손가락 통증을 덤으로 선사했다. 그리고도 모자란 지 끝끝내 번아웃을 선물했다.


한참 그러던 중 친구가 책을 냈다. 친구가 브런치에도 글을 쓰고, 여행 중 '구독'이라는 형태를 빌어서도 송고하고 있다는 것도 알았지만 독립도 아닌 상업 출판 작가가 될 줄은 몰랐는데! 친구의 글은 많은 사랑을 받았고, 받고 있다. 나도 그 글을 사랑한 사람 중 하나이다. 또 다른 친구 하나도 흠모하며 읽었던 문장의 주인들과 함께 앤솔러지의 작가가 됐다. 그 글 역시 사랑했다. 친구들의 글이 적힌 종이 모퉁이를 매만지며, 손 끝에 닿는 활자들을 마음에 담으며, 쓰지 않았으면 현현되지 않아서, 쓰고 공유하지 않았으면 존재를 몰라서 외면받았을 이야기들이 쓰이고 공유되었기에 글이 되고 책이 되어 내가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는 지점이 손가락 끝을 통해 정확히 감각되었다.


때마침 이 시대의 현자들이 다 모여있는 것 같은 트위터에서도 어느 누군가가, 본인은 완벽주의자인 편인데 앞으로 완성주의자가 될 것이라는 트윗을 날린 것을 보게 되자 차곡차곡 쌓인 우연들이 계시가 되었고 잘하고 싶어서 결국 978,437,238,890 회의 들숨 날숨을 쉬느라 미루던 일, 브런치에 글을 쓴다.


작가 신청도 해두었는데, 차일까 봐 두려워서 시도하지 않던 일이다. 설렌다. 사랑받지 못할까 봐, 잘하지 못할까 봐 사랑받을 기회를, 잘해 볼 수 있는 기회를 흘려보낸 시간의 레이어만큼 설렌다. (늘 그렇듯 이미 울 것 같은 눈썹 모양을 하고 있지만.)


실패하거나, 사랑받지 못할까 봐 시도하지 않았고 가지 않았던 길들 과 지나쳐 보낸 얼굴들을 떠올린다. 가봤거나 잡았다면 잘할 수 있었다던가 더 사랑하고 사랑받을 수 있지 않았을까 되짚는다. 그리고 매 번 후회를, '그랬다면'을 되짚기만 하지 않기 위해 오늘은 쓴다. 그리고, 공유할 마음을 갖춰본다. (브런치 담당자분이 발행하게 도와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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