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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졔졔 Nov 20. 2021

외계 생활 39일 차

큰 회사는 원래 그런 건가

조난 39 . 조난지는 풍족한 자원과 자연환경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무언가 이상하다. 무엇이 비어있는 것일까? 무엇이 비어서  풍족한 환경 중에서도 기갈을 느끼는 것인지 모르겠다.  조난지의 풍족함을 바탕으로 나는  시기를 버텨낼  있을까. 혹은 기갈 따윈 아예 잊고 이곳에 정착하게 될까.


목적지가 다른 3장의 티켓이 있었다. 그중 내가 티켓을 골라 이곳으로 왔다. 그래, 엄연히 말하면 이곳은 조난지가 아니다. 나의 행선지였다. 이럴 줄 몰랐던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이미 이럴 줄 알았다 한들 이 기갈을, 풍요 속의 궁핍을 어떻게 예방하고 대처할 수 있었을까.


늘 콘크리트 틈새에서 억지로 뿌리내리며 이만큼 자라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풍부한 물과 토양, 일조량 그 모든 것이 갖춰진 곳이라면 더더욱 아무 생각 없이 위로, 위로, 위로 올라가기에 최적의 환경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성장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이곳으로 오는 티켓을 택했다. "아마 '재크와 콩나무'에 나오는 콩나무처럼 성장할지도 모르는 일이야." 생각했다. 나는 콩나무처럼 크게 크게 성장하려고 이곳에 왔다.


내가 자란 곳은 척박하던 곳, 어떤 때는 끈적이는 열기가 모든 것을 녹게 할 것 같은 분노가 있던 곳, 그 열기를 원동력 삼아 성장하거나 한기를 녹였다. 그 열기는 열정이라고도 불렸고, 열정은 때로 배고픔과 자원의 부족 딛고 성장하게 하고 서로를 먹이고 살리는 자원이 되었다. 조금 더 괜찮은 날엔 벌과 나비가 자꾸 품을 파고들었다. 이룩해둔 성과와 성장, 향기를 보고 꽃이 폈을 시절만 잠시 찾아와 꿀과 수분을 잔뜩 묻히곤 이내 떠나긴 했지만 그래도 벌과 나비가 있어 외롭지 않았다. 그들은 나와 같은 동료들이 가까이 멀리 새로 싹 틔울 수 있게 하는 존재였다. 어떤 날은 귀찮은 진딧물만 한가득이었다. 한기를 열정으로 돌려내어 피워가고 있는 성과에 빌붙기만 하는 것들.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는 것들. 삶이란 늘 그런 것이라고, 나를 떼놓고 네 삶이란 있을 수 없다고 외치는 것 같은 그들은 늘 내가 성장하는 속도보다 더 빠르게 번성했고, 내가 이룩해나가는 성장을 저해하곤 했다. 좌절스러운 날들이 있었다. 그래도 그 진딧물들이 있어 내게 무당벌레가, 실잠자리가 찾아오기도 했다. 자연스럽게 세상은 원래 내어주고받는 것이고 어떤 날은 내어준 것 이상으로 받을 수도 있고 어떤 날은 내어준 것이 무색하게 아무것도 받을 수 없는 것이라고 믿게 되었다. 그렇게 10년을 넘게 살았다. 어느 날 언제까지고 이럴 수 없다고 생각했다. 떠나야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뿌리 내려오던 나의 행성과 가장 멀리, 멀리, 멀리 가는 선택을 하고 싶어 졌고 그래서 가장 높이 높이 성장할 수 있을 아무 걱정 없이 성장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이 행선지를 내 손으로 골랐다. 이제 열정은 필요 없다. 배고픔도 더 이상 없다. 따뜻한 금융과 복지의 햇살이 나를 비춰줄 거니까.


그리고 39일. 이런 환경을 누구보다 원했기에 이 행선지가 결국 나에게는 조난지로 느껴진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20일을 보냈다. 그리고 19일이 더 지난 지금,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곳은 나와 맞지 않는다. 예상했던 바와 같고, 원하던 바와 같은 곳이지만 그래서 이 '대기업'이라는 행성은 내가 살기 적합하지 않다. 나중에 가서 딴 소리 할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아직은 그렇다.


이 행성의 생명체들은 (당연히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지나치게 깔끔하다. 지나치게 웃자라 있다. 길게 뻗어 자라 있는 그들은 삶의 귀찮음들이 수반되어야 번성도, 친구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잘 모르는 것 같기도 하다. 뻗어 나가기 위해 허리를 곳곳이 세운 그들은 독야청청 어쩐지 가늘고 위태해 보인다. 그들은 서로에 기대지 않기 위해 애쓰는 것 같다. 정확히는, 자신들에게 아무도 기대지 못하기 위해 애쓰는 것 같다. 꿀을 빼앗길까 봐 향기를 내지 않으려 노력한다. 잎이 뜯길까 풍성히 잎을 내지도 않는다. 서로 조금이라도 닿을라 치면 소스라치게 놀라는 것 같다. 내 영역이니 넘지 말라고 소리친다. 그러면서 땅 밑에서는 분주히 발을 놀려 조용히 그들의 영역을 넓힌다. 알코올이나 담배가 함께하면 이 조용한 영역 확장이 더욱 은밀하고 다 망하게 이루어지는 것 같다. 겉으로는 모른 체하면서 서로의 뿌리를 엉겨낸 이들끼리는 단단히 결속하기도 하는 것 같다.

웃자람의 정도에 따라 이들은 가지를 펼쳐 낮은 키를 가진 이들을 가리거나 서로의 가지 아래 들어오게 하려는 것 같다. 이런 곳에선 평등이 있을 수 없다. 공동체를 만들 수 없다. 귀찮은 일도 사람도 적겠지만 대신 혼자 부들거리며 버텨내야 한다.


다시 내가 있던 행성을 생각한다. 갈등은 있지만 모두가 평등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각 개인들이 소중하기에 공동체를 만들어야 한다고, 서로가 서로에게 말을 걸어야 한다고 말하던 곳. 여성도 남성도 같은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어린이도 1인분의 사람으로 존중받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우리가 언제 나이 들지 모르니 노인을 혐오하기보다는 이해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했던 곳. 부동산을 소유가와 자산이 아니라 삶의 공간과 터전, 공동체의 근간으로 고민하던 사람들이 그런 고민을 나누는 것이 어색하지 않던 곳. 우리 행성에 닥친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서 누군가가 해결해주길 바라는 것이 아니라 다른 동물의 피와 살점을 매개로 내 살을 불리지 않겠다는 선언을 하기를, 이를 결심하고 실행하기를 택하는 이들이 귤 팁을 공유하던 곳. (*귤 팁: '꿀'도 사실은 벌을 착취하면서 나오는 생산물이다. 비인간동물의 착취를 통해 얻어지는 꿀을 지나치게 달콤하고 좋은 지점만 강조하는 표현으로 쓰는 것에 대한 불편함의 대안으로 귤 팁을 쓰고 있다.) 설령 그렇게 살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그런 고민이 오가던 곳을 생각한다.


어제는 월급이 들어왔다. 월급과 시간이 조금 더 쌓이면 이 기갈이 사라질까? 내어주지도 않고 대신 받지도 않으며 독야청청 위로 자라는 것이, 혹은 독야청청인듯하나 발 밑의 공모로 만들어지는 이 세계의 진짜 모습인 땅 밑의 이면을 자연스레 받아들이게 될까?


외계 생활 39일 차 나는 그 작고 척박한 행성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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