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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졔졔 Apr 02. 2022

고양이 다리와 닭 다리

어느 날 그 다리가 그 다리 같아서

내가 사는 빌라는 서른 살이 훌쩍 넘어 여기저기가 자주 망가지곤 한다. 그럼에도 이 빌라에서의 전세 기간을 연장하기로 한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채광 때문이다. 계절에 따라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열 한 시부터 서 너 시까지 방 안으로 떨어져 내리는 햇살이 황홀하다. 물론 해를 향해 통유리가 펼쳐진 더 좋은 집에서 맞는 햇살들에 비할 바 아닐 수 있겠지만 그럼에도 우리 집 햇살이 만드는 광경은 내겐 그 어떤 것보다 특별하다. 또렷이 흘러들어오는 이 해를 홀로 맞지 않고 같이 맞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함께 사는 세 명의 고양이들은 방에 해가 들 때면 온 몸을 이 시간에 충실히 맡긴다. 해가 잘 들지 않는 날씨로 유명한 북유럽 어느 나라의 시민들처럼, 해를 쬐기 위해 걸쳤던 것들을 거추장스레 여기며 집어던지고 공원 한복판에 기꺼이 눕는 이들처럼, 우리 집 고양이들도 햇살에 몸을 널어둔다. 겨드랑이에, 허벅다리에, 턱 밑과 목덜미, 몸의 구석구석에 마르지 않으면 안 되는 빨래가 있는 것처럼 야무지게 스스로의 몸을 해 밑에서 구워낸다.


그때 그들과 같이 사는 인간인 내가 그들을 보는 것은 호사가 아닐 수 없다. 일단 회사 같은 곳에 가지 않고 위험한 집 밖을 다니지 않은 채 해가 좋은 날 낮에 집에 있기 때문이다. 또, 집 안에 예술 작품을 두고 가까이 감상하는 기분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공중에 둥둥 뜬 먼지를 얄짤없이 비추는 투명한 빛이 고양이들의 털을 한 올 한 올 비추며 만드는 털 끝의 모양은 어지간한 대가의 작품에서도 보기 힘든 섬세한 0.5호 붓 터치를 감상하는 기분을 준다. 모공에선 살짝 굵게 시작되어 털끝에선 그 어느 것보다 가늘게, 부드럽고 강하게 제멋대로 뻗어나간 털들. 날씨가 좋은 날이면 각 나무의 선이 더 잘 드러나 새삼스럽게 '산이란 각자 다양한 모습의 나무가 모여 이루어진 것이구나.' 생각하게 되듯, 고양이의 털들도 각자의 마음대로, 또 같이 군집을 이뤄 질서 정연한 결을 만들고 있는 모습을 만들고 있구나 생각하게 된다. 게다가 전시회에 이런 세밀하고 아름다운 작품이 있다면 모두가 만져보고 싶어 할 것이라 잘 관리된 유리 뒤 편에 있어야 할 테지만, 집에선 전혀 그럴 필요 없단 사실도 이 시간을 더없는 호사로 만든다. 마음껏 손으로도 고양이들의 아름다움을 감상한다. 반사되는 빛을 통해 시각적으로도 확인할 수 있는 속 털의 대책 없는 부드러움과 코팅된 듯한 겉 털의 매끄러움을 조심스레 빛의 결을 따라 쓰다듬으며 촉각으로도 확인한다.


해를 받은 콩떡의 털은 빛난다.


손바닥으로 목덜미에서 꼬리까지, 다시 목덜미에서 꼬리까지를 쓰다듬어 내리다 보면 이미 햇빛에 살짝 데워진 고양이들의 몸이 기분 좋게 골골 소리를 울려내기 시작한다. 고양이들은 몸의 긴장을 더 풀어내고, 새근새근 숨쉬기 시작한다. 몸이 부풀어 올랐다 가라앉았다, 다시 부풀어 올랐다 가라앉았다 한다. 부드럽게 심장이 뛰고 있구나, 안심하고 있구나 생각하며 이때 나는 고양이들의 몸을 샅샅이 훑는다. 털 밑에 숨겨진 맑은 분홍의 피부를 확인하며 다친 곳은 없는지, 여드름이 난 곳은 없는지, 귀 안에 귀지는 없는지 햇빛을 진료실 라이트 삼아 살펴본다. 다리로도 손이 향한다. 발바닥에 굳은 살은 없는지, 뒷발 허리의 털이 너무 까져있진 않은지, 대퇴에 적당히 근육과 살이 붙어있는지를 손 끝으로 살핀다. 탄탄하고, 적당히 말랑말랑한 넓적다리에서 거의 살이 붙어있지 않은 뒷발 허리를 쓸어내린다.


문득 고양이의 넓적다리가 쫀득쫀득하다고 쫄깃한 느낌이라고 느낀다. 이 모양이 무엇과 닮았다는 것을 문득 깨닫고 소스라친다. 닭의 다리 모양이다. 닭의 다리 감촉이다. 통닭의 다리 모양이나 촉감과 같다. 심장이 쿵쾅거린다.


나는 고양이를 먹을  없다. 햇살을 받고 잔뜩 늘어진 고양이의  쉬는 모양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들이 감정을 표현하고 사랑을 표현하는 모습이 어떠한지, 그들이 얼마나 따뜻하고 생명력 있는 존재인지, 나는   가지 이상의 기억을 갖고 있다. 고양이는 나한테 살아있는 존재이다. 모두가 각자 다르게 생긴 고유성을 지닌 개별의 존재들로 얼굴이 있다. 각자가 지닌 화난 얼굴, 기분 좋은 얼굴, 졸린 얼굴, 심심한 얼굴, 그리고  얼굴을 보다 보면 우리가 서로 다른 종이지만 같은 생명이구나 생각하게 된다.


나는 닭을 먹는다. 털을 만져본 적은 없다. 닭이 어떻게  쉬는지 모른다. 닭이 불안하고 슬플  어떤 표정을 짓는지 모른다. 각자가 다른 얼굴을 가졌을 텐데 식탁에 오르는 닭들에겐 얼굴이 없다.  살해된 닭을 만났다. 죽임 당한 얼굴과  마주치지 않아도 되어 살아있는 닭의 얼굴을 상상해보지 않아도 되었다. 마트나 정육점에선 이들이 살아있던 생명이란 것을 최대한 지운 형태로 닭을 보여준다. 원래  같은  없던 것처럼 털은  제거하고 물에 불어버린 시신과 같은 피부를 하고 내놓는다. 원래 얼굴은 없던 것처럼  많은 참수된 머리와 얼굴들은  어디로 사라졌나.


이 두 종의 생명과 전혀 다른 관계를 맺어왔기 때문에, 당연히 고양이는 먹을 수 없고 닭은 먹을 수 있었다. 그런데 햇살 좋은 어느 날, 골골 소리를 내며 사랑을 잔뜩 표현하는 고양이의 다리가 내가 매일 먹던 닭의 다리와 닮아있는 것을 문득 알아버린 것이다. 호사를 깨고 진실이 다가온 그날, 살아있는 닭의 얼굴을 상상해보게 되던 그날, 나는 그날 이후로 닭을 먹지 않는다. 아니, 먹을 수 없게 되었다.






당장 이 글을 등록하려고 태그에 닭을 달려고 하는데, 태그에 '닭고기', '닭가슴살' 외의 닭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고기로서 착취할 대상 외에 생명으로서의 닭의 얼굴을 철저히 지우고 있다.


닭의 얼굴이 궁금하신 분들을 위하여,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7543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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