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태죄 폐지 1년 4.10 공동행동 발언문
그 누구도 자기 몸, 시간, 정신을 도박판 위에 걸고 ‘임신하면 중단하면 되지~’라는 안이한 생각으로 임신하지 않습니다. 저도 피임에 열심이었습니다. 그러나 2012년 12월, 2019년 4월, 저는 두 차례 피임에 실패했습니다. 태어나 가졌던 수 많은 성관계 속에서 두 번만 실패했다는 것은 실은 상당히 높은 피임 성공률을 의미하는 것임에도, 셀 수 없는 피임 성공 기록은 두 번의 ‘실패’ 앞에 무의미한 것이 되었습니다. 피임 실패는 수 십년을 쌓아온 학업, 커리어, 경제적 상황, 가족과 사회에서의 평판, 건강을 한 번에 위협합니다. 지금까지 쌓아온 모든 성취와 권리는 임신한 몸 앞에서 한 없이 취약해집니다. 모든 것을 잃을 위기 앞에서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 선택할 수 있는 한 가지는 임신 중단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두 차례 임신을 중지했습니다.
두 번의 임신 중지 경험은 서로 닮아 있으면서도 달랐습니다. 6년이라는 두 임신 중단 시점 사이에, ‘낙태죄’는 위헌 판결을 받았고 저 개인은 학생에서 직장인이 되어 경제적 상황이 변했습니다. 이로 인해 처음의 임신 중단보다 두 번째 임신 중단의 심적 부담이 상당히 경감 되었습니다. 그러나 두 번 모두 법과 사회가 재생산권리를 적극적으로 보장하지 않는 상황인 점은 같았습니다. 저는 많은 돈을 지불하고도 의료진의 호의에 기대는 모양의 상대적 약자였습니다. 이는 1) 임신 중단에 관한 부족한 설명과 정보 전달, 2) 근거를 알 수 없는 높은 비용과 소비자로 보호 받기 어려운 형태의 비용 지불, 3) 의료진의 모욕적 언사, 태도 및 절차에 대한 경험으로 이어졌습니다.
2013년 1월, 첫 임신 중단 시 임신 중지는 불법이었기 때문에 적정한 임신 중지 관련 정보를 얻기 어려웠습니다. 임신 중단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는 병원을 찾기 위해 인터넷을 뒤지고 병원들에 조심스럽게 발신자 표시 제한으로 전화해야 했습니다. 그렇게 찾은 한 병원에서는 흡입, 유산유도제 등 몸에 무리가 덜한 임신 중단에 대한 방식이 있음을 안내는 했지만, 소파술을 통해 ‘확실한’ 임신 중단을 할 것을 제안했습니다. 병원은 의료 서비스 제공 기록이 남지 않도록 현금 90만원을 요구했고 향후 임신 계획이 있다면 30만원 상당의 영양제를 투여할 것을 추가로 권했습니다. 당시 학생이었던 저는 120만원을 혼자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으나, 그저 운이 좋아 정자제공자가 수술비 전액을 지불해 너무 늦지 않게 수술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만약 그가 임신 중단을 하려했던 제 의사에 반해 수술 동의도, 수술비 제공도 거절했다면 어땠을 지를 종종 생각합니다. 실제로 그런 상황이 두려워 플랜B를 마련하기 위해 학생에게도 돈을 빌려준다는 대부업체 사이트를 뒤적였었습니다.
한 시간이면 충분히 회복한다던 안내와 달리, 제가 깨어난 것은 한참 뒤였습니다. 마취 기운에 침대에서 떨어지기까지한 후였습니다. 오한과 오심으로 고생하며 마취 사고로 깨지 못했어도 의료 기록이나 비용 지불 기록이 남아있지 않으니 보상받지 못했으리란 생각을 했습니다. 혹은 후유증이 있더라도 오늘 벌어진 일을 누군가 아는 것이, 범죄자가 되는 것이 두려워 함부로 신고하지 못했으리란 생각을 했습니다. 안전을 보장할 수 없는 순간을 지나 살아남았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두 번째 임신 중단은 갓 낙태죄 위헌 판정이 있던 2019년 5월이었습니다. 이때는 다행히 병원에서 요구한 비용 80만 원을 지불할 경제적 여건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몸의 괴로움은 동일했지만 경제적 여건을 갖추니 더 신속한 임신 중단 결정이 가능했고, 비용 마련으로 인한 스트레스와 불안도 훨씬 낮았습니다. 그러나 ‘비도덕적 진료행위로 규정된 중절수술을 하지 않습니다.’라는 병원에 붙어있던 포스터, 임신 중단 경험이 있음을 말했을 때 의료인의 경멸하는 듯한 눈초리 등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는 여전히 심리적인 압박으로 다가왔습니다.
게다가 그 병원은 정자제공자에게 수술 동의서에 더해 강간을 시인하는 문서에 서명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이는 저의 성적 자기 결정권을 스스로 부인하게 하는 것으로 제게는 모멸감을, 정자제공자에게도 향후 해당 자료가 강간의 증거로 활용되진 않을까 하는 우려를 주는 것이었습니다. 서명을 잠시나마 망설이던 정자제공자를 보며 경제력을 갖췄음에도 타인의 결정으로 임신 중단을 하지 못하면 어쩌나 불안했습니다. (이제야 뒤늦게, 해당 병원이 서명된 강간 시인 문서를 활용해 건강보험 급여를 청구한 것은 아닐지 의심되지만 현재 해당 병원의 폐업으로 확인이 어렵습니다.)
우리는 2019년 낙태죄 위헌 판결, 그리고 2021년 공식적 폐지를 통해 내 몸에 대한 선택으로 처벌받지 않을 권리를 되찾았습니다. 그러나 2022년 봄 현재까지도, 오랜 시간 임신 중단을 부도덕, 무책임과 동일시 해온 사회적 시선과, 대체 입법 공백으로 인해 여성들은 안전한 임신중지라는 당연한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는 실질적으로 여전히 여성들이 임신 중지 과정에서 사회적, 경제적으로 ‘처벌’의 대상이 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성분을 알 수 없는 안전하지 않은 유산유도제가 시중에 비싼 가격으로 유통되고 있고, 이를 복용 후 부작용을 호소하는 여성들이 있음에도, 식약처는 유산유도제를 아직까지 승인하지 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위민온웹’ 등 적정 가격에 안전한 유산유도제를 공급받을 수 있는 통로를 유해사이트로 지정해 여성의 접근을 차단하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여성들은 세계보건기구에서 권하지 않는 소파술을 포함, 여성의 몸에 많은 무리를 주는 외과적 방식의 임신 중단을 어쩔 수 없이 택하고 있습니다. 이에 따른 비용은 여전히 터무니 없습니다. 2013년 당시, 제게 청구된 임신 중지 비용 120만원은 당시 최저임금이 월 101만원인 것을 고려했을 때, 지금으론 230만 원 정도로 체감되는 금액입니다. 이는 2020년 20-24세 여성 중위 소득 181만원을 훌쩍 넘는 비용이고, 25-29세 여성의 중위소득에 준하는 비용입니다. 수 많은 여성들이 피임의 실패를 만회하고, 자신의 인생을 지속하기 위한 기본 권리에 대한 비용으로 지나치게 많은 금액을 청구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누군가는 이 돈이 없어 안전하지 않은 의료 서비스를 택하거나 적절한 시기를 놓쳐 신체적/정신적으로 더 위험한 임신 중단을 경험하게 됩니다.
저는 사회/경제적 상황에 따라 여성의 임신 중지와 이를 둘러싼 선택들이 얼마나 차이 나는 지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모든 여성은 사회적 위치, 경제적 능력과 상관없이 안전하게 임신 중지할 권리가 있습니다. 국가는 개개인의 사회경제적 차이와 상관없이 임신 중지 경험이 차별적이지 않도록 보장하십시오. 정부와 국회는 그 수단으로 임신 중단 의료 서비스 접근권 향상을 위해 유산유도제를 빠른 시일 내 승인하고, 전 임신 중지 의료 서비스에 건강보험을 적용할 수 있도록 하십시오. 헌법 제34조 3항에 명시된 ‘여자의 복지와 권익의 향상을 위한 노력’의 의무를 다하십시오.
앞으로도 여성들은 수 없이 많은 피임에 성공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기치 않게 종종 실패할 것입니다. 수 많은 성공 중 단 한 번의 실패가, 여성들이 한 인간으로 쌓아온 모든 것을 순식간에 백지화 시킬 수 있기 때문에, 저는 여성들의 존엄과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지키기 위한, 재생산의 권리를 기본권으로 보장하길 촉구합니다. 임신 중지는 문란하거나 비도덕적인 소수 여성의 이야기가 아니라 가임기의 어떤 여성이 주인공이어도 이상하지 않을 생애 주기의 보편적인 사건이기에, 임신 중단을 보편적 보건/의료 권리로서 실질적으로 보호하고 보장하길 촉구합니다. 정부와 국회는 재생산권리보장에 관한 기본법을 제정하여 실질적 성과 재생산권을 보장하십시오.
모두에게 안전한 임신중지, 모두에게 평등한 재생산권!
위 글은 낙태죄 폐지 1년 4.10 공동행동 발언문 중 하나로 작성되었으며, 안전하게 '낳지 않을 권리'를 주로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낳지 않을 권리'만큼 '낳을 권리' 역시 중요하며, 비장애인, 장애인, 트랜스젠더, 논바이너리 등의 재생산권리와 정의에 대한 더 발전된 논의가 함께 필요함을 함께 적어둡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