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은 안경을 쓴다. 멋 부리는 걸 모르는 남편은 생일즈음이 되면 인터넷에서 가격대가 있는 안경테를 검색한다. 생일을 명분으로 좋은 안경테를 하나 사기 위함이다. 결혼 초에는 마음에 드는 안경테가 있으면 나에게 링크를 보내고 어울릴지도 물어보곤 했다. 그러면 안경에 대해 잘은 몰라도 '이것은 패션의 일환'이라는 생각으로 몇 개의 안경테 후보 중에 남편에게 어울릴만한 안경을 골라주곤 했다. 또 같은 안경테를 싸게 파는 매장이 있다고 하면 같이 사러가기도 했었다. 남편과 둘이 살 때 내가 안경에 신경 쓰는 것은 딱 그 정도 수준이었다.
안경을 사고 나면 항상 안경을 두는 자리에 두었고, 남편 외에는 아무도 건드릴 사람이 없었다. 다 큰 어른 둘이 사는 집에서 물건에 발이 달리지 않는 이상에야 안경은 항상 놓인 자리에 있었다. 혹여 제자리에 있지 않더라도 어차피 그 안경에 손을 댈 사람은 남편뿐이었다. 안경이 바닥에 뒹굴러 다니는 게 아닌 이상 내가 굳이 손댈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남편이 안경을 바닥에 뒹굴릴만큼 개념이 없진 않으니 내가 집에서 안경에 신경 쓸 일은 딱히 없었다.
안경을 쓰지 않는 나로서는 안경 쓰는 불편함을 잘 몰랐다. 남편이 몇 번 이야기를 해주었지만 그런가 보다 생각할 뿐 깊이 공감하지 못했다. 그래서 남편도 언제인가부터 안경에 대해 딱히 나에게 말하거나 묻지 않았다.
아이가 태어나 성장하면서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던 남편의 안경을 신경 써야 하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잡고 서면서부터는 손이 닿은 위치에 있는 자잘한 물건들을 모두 치워야 했다. 그래서 남편의 안경도 옷장 안으로 옮겨두고 보관했다. 그런데 아이가 크니 서랍이며 옷장이며 가릴 것 없이 모든 문짝들을 열어 그 안에 보관된 것들을 끄집어냈다. 안경이 몇 번 아이에 손에 닿았다 보니 안경보관함은 또다시 제자리를 잃어 옮겨졌다. 남편은 책상 위로 안경을 옮기면서 이제는 안전하겠거니 생각했단다. 그러나 조금 더 시간이 지나니 아이는 의자를 밝고 책상 위까지 올라가기 시작했다. 까치발까지 들어 책상 위에 올려진 안경을 손에 쥐고 내려와 가지고 놀다가 아무 데나 열려있던 서랍에 넣어두는 일도 있었다. 안경을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서랍을 닫아버려 남편이 나중에 안경을 한참 찾기도 했었다. 그때쯤엔 아이가 어느 정도 컸을 때라 안경이 깨지면 위험하고, 아빠에게 소중한 물건이니 만지면 안 된다고 주의를 주면 잠깐은 통하던 때였다. 그나마 커서 말귀를 알아들으니 반복해서 주의를 주며, 위험한 행동을 스스로 인지하고 되풀이하지 않도록 할 수 있는 것이 다행인 건가 싶었다. 그렇게 같은 주의를 수백 번은 주었던 것 같다. 그 정도하고 나니 아이는 책상 위에 놓인 안경을 만지면 안 된다는 것을 인지했다.
그런데 문제는 다른 데서 또 나타났다. 아이가 엄마랑 놀면서 긴 머리카락을 움켜 잡으며 즐거워하듯, 아빠랑 놀면서는 자신의 손에 잡히는 안경을 잡아챘다. 아마도 아빠는 머리카락이 짧기에 잡을 것이 없어 대안으로 안경을 잡는 듯했다. 한 번은 남편의 얼굴에 씐 안경을 휙 낚아채어 빼면서 안경 코받침에 콧대가 긁혀 피가 났다. 아이가 조금 더 크고 나서는 놀이가 과격해지면서 발로 남편의 얼굴 쪽을 건드려 안경이 벗겨지기도 했다. 또 어떨 때는 안경 쓰는 것이 궁금했는지 아빠 안경을 집어 스스로 써보기도 했다.
"새별아, 아빠 안경에 손대지 말라고 했잖아. 그리고 아빠랑 놀이할 때 너무 과격하게 놀다가 안경이 깨질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해."
"알겠어. 아빠가 맨날 안경 쓰니까 나도 궁금해서 한번 써본 거야"
"그러면 나중에 아빠한테 '안경 한번 써보고 싶어요'라고 얘기한 후에 아빠가 허락하시면 써야지. 네가 마음대로 안경을 만지면 아빠가 화내시잖아."
예전에는 남편이 안경의 불편함을 이야기해도 잘 와닿지 않았었다. 그런데 아이가 한번 안경을 만지고 나면 알에는 온통 지문자국이 났고, 놀이하다가 아이가 휘두른 팔에 잘못하여 안경이 날아가면 다리가 휘어있기도 했다. 아이에게 좀처럼 큰 소리를 내지 않는 남편도 안경이 망가지면 간혹 큰 소리를 냈다. 몇 번 경험을 해보니 남편이 없을 때도 내가 아이로부터 안경을 수호하고 있었다.
아이가 크면서 안경으로 인해 큰소리가 나는 일이 많이 줄었다. 그래도 가끔 아이가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놀다가 아빠가 쓰고 있던 안경을 쳐 떨어뜨리는 경우가 있었다. 그럴 때 남편은 버럭 화를 냈다. 그렇다고 애한테 화를 내냐 싶었지만, 나도 아이가 머리카락을 휘어잡아 당겼을 때를 생각하면 눈물이 찔끔 날 정도로 아파서 버럭 소리를 지르는 일이 있었으니 비슷한 고통이 느껴지나 보다 생각했다.
아이가 6살이 되니 이제는 잘잘못을 가리고 상대방이 잘못한 것은 분명하게 짚고 넘어갔다. 그리고 엄마 아빠가 무언가 저에게 미안해야 할 일이 있으면 사과를 요구했다.
하루는 남편이 소파에서 낮잠을 잤다. 잘만큼 잤는지 어느새 일어나 제 할 일을 하고 있었다. 아이는 아빠가 떠난 자리에 앉아서 TV를 보고 있었다. 잠자코 앉아 있는가 싶더니 좀이 쑤시는지 몸을 베베 꼬며 일어나 소파를 딛고 올라갔다. 그러고는 헤드레스트에 엉덩이를 대고 더 높은 위치에서 TV를 보고 있었다. 좋아하는 만화 주제가가 나오자 가끔 엉덩이를 들썩들썩했다. 중심을 잡으려고 했는지 손바닥으로 엉덩이 양 옆을 짚었다.
잠시 후 아이가 우는 소리를 했다.
"엄마, 여기에 아빠 안경이 있었어."
"어디에?"
"소파 위에. 내가 손으로 눌어서 찌그러진 거 같아."
남편이 낮잠을 자면서 안경을 벗어 소파 헤드레스트 위에 올려둔 게 분명했다. 남편의 잘못을 아이 앞에서 비난하듯 얘기할 수 없어 크게 의미를 두지 않고 아이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래? 안경이 거기 왜 있었을까?"
"나도 몰라. 아빠가 벗어놨나?"
아이가 답하고 있는데, 남편이 나타나 자신의 안경 가까이에 아이 손이 있는 걸 보고는 약간 높아진 목소리를 냈다.
"박새별! 너 또 아빠 안경 만졌어?"
그런데 아이가 새초롬한 눈으로 아빠를 쳐다보며 대답했다.
"아빠가 안경을 제자리에 두지 않아서 망가질 뻔했잖아!"
그 말에 남편이 아! 하면서 탄식하더니 껄껄껄 웃고 한마디 했다.
"아빠가 한 방 먹었네. 새별이 말이 맞아. 아빠가 안경을 제자리에 두지 않아서 아빠가 잘못한 거야. 미안~"
이 말을 마치고 남편은 안경을 제자리에 가져다 두었다.
둘의 대화를 듣고 있자니 대견함과 만족스러움이 동시에 느껴졌다. 내가 먼저 아이에게 아빠가 안경을 제자리에 두지 않았다고 말했다면, 나로 인해 아이가 일방적으로 아빠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가지게 되지 않았을까? 하지만 내가 던진 질문에 짧은 시간이지만 아이는 스스로 '왜 안경이 여기 있을까?' 생각했던 것 같다. 그리고는 아빠가 안경을 제자리에 두지 않았음을 깨닫고 평상시처럼 본인의 안경을 건드렸다고 호통을 치려는 아빠에게 팩트폭행을 날렸을 것이라 생각했다. 아이가 대견한 대목이었다.
더불어 내가 남편에게 아이들 손이 닫기 전에 얼른 안경을 치우라고 닦달했다면, 나도 남편도 기분이 좋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이런 잔소리를 해야 한다는 것에, 남편은 이런 잔소리를 들어야 한다는 것에 기분이 상했을 것임이 분명했다. 그런데 아이가 말하면서 화기애애하게 남편이 안경을 제자리에 가져다 두었다. 이 부분이 만족스러운 대목이었다. 이제는 바른말을 곧 잘하는 아이의 입을 빌려 좋은 분위기를 만들어 남편을 잘 부려봐야겠다 생각이 드는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