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베바 Sep 23. 2016

0. 우연은 택배 상자를 타고

첫 만남



  굳이 멀쩡히 두 눈 잘 뜨고 살아있는 디카와 dslr을 두고선 책상 구석에 박혀있는 토이 카메라를 꺼내게 된 것, 필름 한 롤을 다 채우고 나서 받아본 결과물들에 마음이 동한 것, 그로 인해 필름 카메라를 사야겠다는 충동질이 온 것, 큰돈을 쓰기 전에 이 마음이 한낱 스쳐가는 욕망인지 시험해보자는 생각을 하게 된 것, 그리고 그 시험을 '일회용 카메라'를 통해 하기로 한 것 모두

우연이었다.


  생각해보면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더 많이 쓰이는 우연이라는 말. 그때 내가 그곳에 가지 않았더라면, 그런 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우연이 인연이 되는 일은 없었을 거야' 하며 우연에서 인연, 나아가 필연이 되기까지에 대한 출처를 더듬는 일이 아니더라도 우연이라는 말은 입에서 머금고 있는 자체만으로 묘한 설렘을 준다. 그리고 이 설렘은 사람과 사람 사이뿐만 아니라 사람과 사물 사이에서도 유효하다.


   어디서 파는 걸 본 적도 없는 듯한 일회용 카메라를 사기 위해 검색창에 '일회용 카메라'라는 글자를 두 엄지로 두드리고선 두 가지 생각을 하게 됐다. 첫 째, 한 번 쓰고 버리는 것이라는 '일회용'이라는 어감으로부터 오는 떨떠름함. 내가 지금 환경파괴에 가담하고 있는 건가... 둘째, '일회용 카메라를 썼던 때가 언제였더라....'하는 추억 더듬기. 필름 카메라를 가장 많이 사용했던 초등학생 때만 하더라도 직접 필름을 감지 않아도 셔터만 누르면 알아서 다 해주는 자동카메라였었지.. 음.. 그러니 내가 스스로 사서 쓰는 건 처음이구나!






  하나 당 만원 남짓의 가격. 여러 개를 산 이유는 순전히 배송비 2500원을 아끼기 위함이었고, 시중에 판매하는 몇 안 되는 일회용 카메라 중에서 사람들이 많이 사용하는 듯한 코닥의 펀 세이버와 후지필름의 퀵 스냅을 샀다.



  알록달록하고 반짝이는 선물 포장을 벗기는 순간의 두근거림을 어떤 것에 비할 수 있을까. 일회용 카메라의 겉 비닐을 벗길 때도 비슷한 마음의 동요가 일었다. 머리맡 놓여있던 크리스마스 선물을 열어 보듯이, 허겁지겁 뜯어냈고 그 속엔 맨들 맨들하고 앙증맞은 일회용 카메라가 있었다. 셔터를 안 누르곤 못 배기겠지? 하고 말하는 것 같은 모양으로.


  그렇게 매일 가방에 넣고 다니는 물건이 하나 더 늘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