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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랑 Mar 17. 2022

산이 좋아, 캠핑족이 된 아빠

캠핑에 대한 첫 기억

우리 아빠는 내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캠핑을 다녔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산이 좋았다는데, 그러던 중 지금은 엄마가 된 여인마저도 산에서 만났단다. 참으로 기이한 일이다. 대한민국의 아빠들은 왜 이리도 산을 사랑하는가? 산을 사랑하다 못해 산에서 만난 여인까지도 사랑하는 낭만이란 ...


내가 엄마 뱃속에 있을 때부터 뺀질나게 캠핑을 다녔다는 사실은 아빠에게는 대단한 자부심이다. 우리 딸 인생 통틀어 전국 곳곳에 안 데려간 곳이 없고, 전국에 별별 특산물도 안 먹여본 적이 없다! 뭐 이런 바이브인 건데, 사실 그 딸내미는 기억이 안나는 곳도 아주 많다. 단지 기억이 안 난다고 말할 수 없을 뿐.


캠핑족 아빠에 대한 태초의 기억을 찾아가자면, 두 세 살쯤이다. 허접한 텐트 속, 그때 아빠와 엄마는 격하게 분노하고 있었다. 잠시 텐트에서 낮잠을 잤나, 잠시 텐트를 비웠나 한 사이에 누군가 아빠의 지갑과 카메라를 가져갔기 때문이다. 지갑도 알겠고, 카메라도 알겠는데. 그래도 사람이라면 메모리 카드는 두고 가야 하는 게 아니냐며. 


그렇게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지만 결국 범인은 찾지 못했다. 주변에서 함께 텐트 치고 놀던 사람 중 하나였겠지만, 일일이 그들의 텐트 속을 탐문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엄마 아빠는 즐겁게 여행가서 괴로운 마음만 묵직하게 안고 택시에 올랐다. 물론 택시 요금은 후불이었으며, 그 머언 산골짜기에서 부산까지 에스코트했다면 꽤 눈물나오는 금액이었을 거다.




그래도 아빠는 캠핑을 사랑했다. 이제 와서 물어봐도 지갑도 카메라도 잃어버렸지만, 그때 아이들을 잃어버리지 않고 온 게 어디냐며 허허 웃고 마신다. 그래도 메모리 카드 훔쳐간 도둑놈은 대대손손 탈모 오길 바란다. 남의 소중한 걸 앗아갔다면 당신의 소중한 것도 사라지는 게 인생의 이치여.


다음 기억은 아빠 친구들의 가족들과 함께 떠난 캠핑이다. 그 무리는 꽤나 웃겼다. 우리 아빠는 평소에 욕을 안 쓰는데, 꼭 아빠 친구들만 만나면 그렇게 어울리지도 않는 욕을 썼다. 지금도 내가 남자들의 센 척이랄지, 가오랄지 그런 것이 우습지 않고 귀엽게 느껴지는 건 그때의 아빠 모습에서 비롯된 것 같다. 


그래도 김치 공장을 하던 '준우' 아저씨보다야 우리 아빠 욕은 건전했는데. 그 아저씨야말로 생전 처음 들어보는 비속어들을 어린 아기들 앞에서 서슴없이 내뱉을 줄 아는 시대를 앞선 래퍼였다. 술을 물 먹듯이 들이키고, 발라드를 고래고래 부르다 종종 욕설도 섞어주던 잔망스러움. 그러한 준우 아저씨는 아내에게 등짝 스매싱이라는 박수를 여러 차례 유도하였고, 다른 의미로 영혼까지 판 아티스트였다.


새벽 3시까지. 고기에 술만 남아 있으면 노래부르던 아빠와 친구들. 그땐 캠핑족이 별로 없어서 망정이지 지금 같았으면 바로 소음 공해라며 싸그리 경찰서에 잡혀 갔을 것이다. 그래도 배가 불러 오고, 찹찹하게 새벽이 깊어질 때에는 중간에 불 하나 피워두고 감자에 고구마까지 줄줄이 넣고서는 함께 찔러 보았는데. 숯으로 둘러싸인 호일을 벗겨내면 뽀얀 속살이 보이는 고것들을 입에 넣고, 후후 하 뜨겁다. 하며 먹을 때는 나름대로 고요한 시골 풍경이었다.




다음 날이 되면 꼭 잠자리들이 허공을 가르고, 도대체 어디서 키우는 닭들인지 일찍부터 시끄럽게 아침을 알렸다. 청아하게 짹짹거리는 산새소리에, 아침 잠 없는 몇몇은 먼저 일어나 어제 다 치우지 못한 설거지를 하러 나섰다. 아침 9시까지만 따뜻한 물을 틀어주는 시절이었기에, 찬 물을 싫어하는 고상한 이모들은 서둘러 목욕 가방을 챙겼고. 잠에 쩔어 있는 아재들과 그들을 똑디 닮은 아이들은 이불을 걷어찼다, 끌어당겼다 하며 여전히 꿈나라였다.


먹다 남은 김치를 몽땅 넣고, 물놀이하다 건져 올린 게나 작은 생선 따위를 넣은 잡탕 김치찌개 냄새가 피어 오른다. 그럼 그때는 기상 시간인 것이다. 아빠들은 언제 일어났는지 밤새 텐트에 문제는 없었는지를 확인하고, 그사이 텐트에 송글송글 맺혀있는 아침 이슬을 털어 낸다. 그 일을 마칠 때쯤 해는 더 높이 솟아 올라 있고, 산에는 온기가 돈다. 그제야 아이들이 덥다며 일어나서는 밤새 참은 오줌을 싸러 나서는데. 그럼 이제 아침식사 시간인 것이다. 


그땐 산에서 휴대폰으로 할 수 있는 건 고작해야 전화와 알림 정도였다. 왁자지껄한 소리들은 전부 사람이 내는 음성이었고, 주로 아이들이 뛰어 놀거나 쌈박질하는 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철없는 자식들이 아직 잠온다, 배가 안 고프다 하며 기껏 차려 놓은 쌀밥을 안 먹겠다, 선언하기도 했는데 그걸 볼 때는 나도 같은 아이었지만서도 한 대 콩 때려주고 싶었다. 




캠핑족 아빠를 둔 딸은 이렇게 자란다. 하는 책들은 아직 없는 것 같아서 내가 한 번 기록해 본다. 훗날 다 완성이 되면 아빠에게 보여주는 날도 오겠지. 아마 나의 기억과, 아빠의 기억에는 많은 차이가 있을 것이다. 단언컨대, 1인칭으로 기억하는 그 시절 캠핑의 추억은 앞으로 이 세상에 완벽한 메타버스가 도래해도 바꿀 수 없을 만큼 경이로웠다. 투박하고, 우습고, 귀찮지만 돌아보니 그만큼 따뜻한 기억이 또 없다.


대한민국에 캠핑족 아빠들 참 많은데, 당신들이 투자한 돈과 시간과 노력이 이렇게 사라지지 않고 고스란히 남아있다는 걸 들려주고 싶다. 당신들이 준 기억들이 얼마나 소중하고 값졌는지 이제는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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