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2월 3일 비상계엄
2024년 12월 3일은 여느 때와 다름없는 평범한 하루였다. 퇴근 후 헬스장에서 러닝을 하던 중, 동료 기자의 문자에 잠시 운동을 멈췄다.
“이 시간에 대통령이 긴급 기자회견을 한대.”
급히 라이브 방송을 켜니, 윤석열 대통령이 정장 차림으로 용산 청사 기자실에 앉아있었다. 그리고 그는 "반국가 세력"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렸다.
“... 북한 공산 세력의 위협으로부터 자유 대한민국을 수호하고, 우리 국민의 자유와 행복을 약탈하는 파렴치한 종북 반국가 세력을 일거에 척결하기 위해 비상계엄을 선포합니다.”
너무 놀란 나머지 가장 먼저 가족과 친한 친구들에게 연락해 안심시키려 했다. 계엄령이 정치적 도구로 사용될 때의 위험성을 잘 알고 있는 부모님은 의외로 침착했다. 기자 단체 채팅방에 메시지를 남긴 후, 급히 짐을 챙겨 불과 5분 거리의 집으로 달려갔다.
허겁지겁 집에 도착하자마자, 무의식적으로 쌍욕이 튀어나왔다. 순간적으로 이성을 잃었지만,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휴대폰을 확인하며 정신을 가다듬었다. 언론인으로서 해야 할 일을 고민하며 기자들과 편집국장과 논의를 시작했다. 선배 기자가 국회로 가겠다고 한 순간, 여의도 상공을 가르는 군 헬기의 굉음이 집에서도 희미하게 들려왔다.
그때 나는 마음을 다잡았다. “그래, 기록하는 것에 최선을 다하자.” 속보를 모니터링하며 긴 밤을 준비했다. 길고도 추운 새벽이었다.
대한민국 헌법 제77조는 대통령이 전시, 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국가 비상사태에서 병력 동원이 필요할 경우 계엄을 선포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계엄이 선포되면 대통령은 즉시 국회에 이를 통보해야 한다.
그러나 12월 3일, 군사분계선 인근에서는 북한군의 특이 동향이 전혀 포착되지 않았다. 대통령은 계엄군 지휘관에게 국회 재적 의원 과반수가 아직 채워지지 않았다며 의원들을 강제로 끌어낼 것을 지시한 정황이 드러났다.
‘계엄’이라는 단어는 한국 현대사에 깊은 상흔을 남겼다. 역사는 증명한다. 계엄령은 전쟁보다도 권력자의 손에서 더욱 자주 악용되어 왔다. 독재의 도구가 된 ‘계엄’은, 44년 만에 그토록 지켜온 민주주의를 다시금 위협했다.
선배 기자는 애써 침착하게 전화너머로 상황을 설명했다. 경찰이 국회 정문 출입을 통제하고 있었고, 시민들은 비상계엄 선포에 항의하기 위해 여의도로 모여들고 있었다.
제1야당인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는 SNS 라이브 방송을 통해 시민들에게 국회로 모여달라고 호소했다. 그는 직접 담장을 넘어 국회 본청에 진입했다. 67세의 우원식 국회의장 또한 출입이 막힌 의원들과 함께 담장을 넘어 계엄 해제를 위해 분투했다. 국민의힘 한동훈 대표 역시 일부 여당 의원들과 함께 국회에 도착해 본회의장으로 향했다. 여야를 막론하고, 벼랑 끝에 몰린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국회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밤 11시 26분, 박안수 계엄사령관 명의로 1호 포고령이 발표되었다.
“국회와 지방의회, 정당 활동 전면 금지.”
“모든 언론과 출판은 계엄사의 통제를 받는다.”
2024년의 계엄령 포고문은 44년 전과 놀랍도록 닮아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한 가지가 더 있었다.
“전공의를 비롯하여 파업 중이거나 의료 현장을 이탈한 모든 의료인은 48시간 내 본업에 복귀하여 충실히 근무하고 위반 시에는 계엄법에 의해 처단한다.”
또한 포고령 위반자는 계엄법 제9조에 따라 영장 없이 체포·구금·압수수색이 가능하며, 동일한 법 제14조에 따라 처단한다고 명시되었다.
나는 한참 계엄사 포고령을 보며 그 끔찍함에 등골이 오싹할 정도였다. 과거를 돌아봐도, 그토록 노골적이고 무자비한 포고령은 찾기 어려웠다.
결코 나도, 아니 평범한 선배, 동료 언론인들도 안전하지 못할 밤이었다. 그날 밤, 기자로서 처음으로 깨달았다. 이런 상황에서 언론인에게 ‘중립’을 요구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을.
국회 앞으로 나간 선배 기자와 계속 전화를 주고받으며 본청 상황을 실시간으로 전달했다. 나는 속보를 종합하며, 계엄 선포부터 벌어지는 일들을 타임라인 기사를 준비했다. 마치 ‘속도전’처럼 눈앞에서 펼쳐지는 기괴한 광경을 기록하며, “기사는 역사의 원고지”라는 말을 되새겼다.
선배기자들은 기사를 준비했고, 나 역시 맡은 역할에 집중했다. 새벽의 끔찍한 상황을 끝까지 상세히 기록하며, 설령 끌려가더라도 해야 할 일은 반드시 하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끊임없이 맴돌았다.
실시간 생중계로 지켜본 현장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국회 본청 앞에는 야간투시경을 쓴 계엄군이 총기와 방탄복으로 중무장한 채 나타났다. 국회 직원, 시민, 보좌관들이 그들의 진입을 온몸으로 막아섰다. 그러나 계엄군은 막힌 길을 뚫기 위해 본청 창문을 깨부수며 본회의장으로 서둘러 들어갔다. 보좌관들은 소화기까지 동원하며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본회의장 안에서는 190명의 의원들이 다급하게 계엄 해제 요구안을 만장일치로 처리했다.
이 모든 상황을 실시간으로 지켜보며, 언론인으로서 말로 다할 수 없는 참담함을 느꼈다.
비상계엄 당시 가장 화가 나고 허망했던 것은, 그날 밤 국회 앞에 모인 시민들이 너무나도 무기력해 보였다는 점이었다. 여의도로 향하는 군용 헬기, 군용차, 그리고 총기를 든 계엄군. 맨몸으로 거리로 나온 시민들이 감당하기엔 너무도 커다란 힘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두려운 내색을 보이지 않았다.
평범한 일상과 평온한 밤을 송두리째 빼앗기는 것을 가만히 지켜볼 수 없었던 시민들은 스스로 거리로 나왔다. 순식간에 국회 앞 거리는 “계엄 철폐”라는 구호가 울려 퍼졌고, 군중 사이 곳곳에서 민중가요가 불렸다.
군용차를 온몸으로 막아선 시민들. 진정하라는 경찰에게 제정신이냐며 되묻는 여성. “다 쏴 죽이려고 했냐”, “이건 좀 아니지 않냐”며 격앙된 목소리로 가슴팍에 태극기를 달고 나온 계엄군에게 분노를 표출하는 사람들.
저런 용기는 대체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어쩌면 그날 밤, 많지 않은 수의 시민들이 수천만을 구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위기가 닥쳤을 때, 자신보다 모두를 먼저 생각하며 두려움을 무릅쓰는 이들이 존재한다는 것. 혼란스러운 밤 속에서, 그것이 그나마 나에게 작은 위로가 되었다.
마침내, 윤석열 대통령은 사과 한마디 없이 새벽 4시 27분경 스스로 선포했던 계엄령을 해제했다. 분노로 차오른 채 차가운 손과 발을 이불속에 묻고 침대에 누웠다.
1시간 남짓 눈을 붙였지만, 몸에는 여전히 긴장과 두려움이 남아 있었다.
어떻게 지켜온 세상인데. 어떻게 지켜온 민주주의인데. 너무 많은 과거가 떠오른 새벽이었다.
12월 4일 아침, 서울의 출근길은 섬뜩한 정적에 휩싸였다. 지하철에 올라타니, 사람들은 무뚝뚝한 표정으로 서로를 스쳐 지나갔다. 광화문으로 향하는 5호선 열차는 유난히 조용했다. 마치 모두가 무언가를 곱씹고 있는 듯했다. 그 낯설고 묘한 공기가 폐 깊숙이 스며들었다.
오피스에 도착하자 동료 기자가 피곤한 얼굴로 내게 말을 걸었다.
“잠은 좀 잤어요?”
그리고 내게 서울신문 호외 한 장을 건넸다. 생애 첫 호외를 손에 쥔 순간, 다시금 섬뜩한 기운이 몰려왔다. 우린 진짜 미친 세상을 볼 뻔했구나. 정말로 내 가족, 친구, 동료들의 일상이 빼앗길 뻔했구나.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44년 전의 참혹함을 막아냈구나.
물리적 충돌은 있었지만, 1980년 광주처럼 대규모 인명 피해로 이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분명했다. 죽은 자는 결국 산 자를 구했다.
그날 저녁, 광화문 동화면세점 앞에서 윤석열 퇴진 촉구 집회가 열렸다. 윤석열-전두환 합성 포스터가 거리 곳곳에 붙어 있었고, 손수 제작한 피켓을 들고 나온 학생들, 자발적으로 광장에 모인 직장인들이 하나둘 촛불을 들었다.
그날 집회에서 조심스럽게 인터뷰에 응한 한 직장인은 나지막이 말했다.
“간밤의 충격을 뒤로하고 아침에 출근길에 나섰지만, 마음속에서는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밀었어요. 근데 사실–”
그녀는 잠시 울컥한 나머지 말을 멈추고 나에게 죄송하다고 했다.
“괜찮습니다. 천천히 말씀해 주세요.”
눈물을 참으며 깊은 한숨을 내쉰 뒤, 그녀는 결연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분명한 것은 우리는 일상을 이어가면서도 이 모든 것을 반드시 바로 잡겠다는 결심을 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은 결코 조용하지 않을 겁니다.”
쉽게 무너지지 않던 세상에 조용히 감사하며, 다가올 긴 겨울을 기록할 준비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