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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홀 Aug 19. 2020

감각의 책장:오야꼬동과 닭고기계란 덮밥의 미묘한 맛

무의식에 마련된 책장에서 감각의 기록물을 꺼내 읽다.

수천년 이상을 거쳐 사람들이 일궈낸 인문 환경에서 그들의 초미의 관심사 중 하나는 단연 '음식'이다. 지금도 탄내나는 진한 갈색의 커피와 북신한 식감의 인스턴트 호떡이 타자기 옆에 자리하고 있으니. 아무래도 감각기록물로 빈도 높게 쓰일 만한 대상일 수 밖에 없다. 이번에 감각, 고찰, 그리고 음식의 만남은 다소 엉뚱하고도 허술하다.


일본 가정식의 온기

불필요하게도 개인적인 서술이지만 일본 가정식, 일본 라멘이 풍기는 다정다감한 정서를 좋아한다(-당연하게도 겨울마다 담궈낸 새콤한 김치를 이용한 요리도, 오랜 전통을 담아내는 장이 맛을 낸 음식도 주식이다). 아마도 그 곳, 그 음식에서 느껴지는 온기가 오랜 타지 생활의 불안정한 감정이 겪은 추위를 잠시나마 녹여줬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분명히 외면으로는 감춘다고 감췄지만 내면은 그 덕에 눈에 쌓여 고독한 세월을 보냈을 게 뻔하니까. 


그래서인지 식당을 찾으면 일본 음식점을 자주 가고 싶어했고, 단골로 삼아 지내던 가게도 있었다. 그 중에 자주가던 돈부리 집이 있었는데, 번잡한 광주 시내에서도 제일 문전성시를 이루는 영화관 옆 골목에 자리했다. 이미지를 떠올려보면 해리포터의 9와 4분의 3 승강장 혹은 잠들어 있는 토토로에게로 가는 덤불이 연상되곤 한다. 시간을 먹어 변형된 나무가 맞이하는 문이 보이면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는 듯한 느낌이 들곤 했다. 


보통은 돼지고기나 소고기가 주 재료인 덮밥이 최종 선택지이며 거기에 라멘을 곁들였다. 그러나 지금 추억을 넘어 전해지는 그 날은 새로운 메뉴에 눈길이 갔었다. 그것이 바로 '오야꼬동'이라고 하는 닭고기와 계란을 이용한 일본식 덮밥이었다. 참 단순한 만남이었는데, 그 뒤로는 오야꼬동을 시키지 않았다는 게 결과론적인 핵심이다.


오야꼬동이 뭐지?

누구나 새로운 시도를 바랄 때가 있는데, 그 날이 바로 그 때였다. 그렇게 선택된 오야꼬동을 그저 오야꼬동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 유래를 알아보는 신성한 제사 엇비슷한 것을 지냈다. 우선 검색해보기 전에 뇌에 잔존해있는 기록들에 의존해 보았다. '동'은 덮밥을 의미하는 것으로 지레짐작하고 있었기에 4분의 3은 해결된 상태였다. 남은 것은 단 세 단어에 불과했다. 그 중에 '오야'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왔다. 보통 영화를 보면 '오야붕'이라는 단어를 큰 형님이나 두목을 부를 때 썼던 것 같았다. '응? 형님?'이라는 생각과 함께 전혀 예측되지 않았다. '꼬'가 해결이 전혀 되지 않아서 더이상 무력한 기억의 파도타기는 그만뒀다.


뇌세포를 자극했다는 유의미하면서 무의미한 결말을 뒤로 하고 초록색 창에 '오야꼬동'의 4글자를 적고 새로운 파도타기를 시작했다. 그 뜻을 찾아내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첫째로 눈에 띈 것은 '국물에 조린 닭고기와 계란을 풀어 익힌 것을 넣은 덮밥'이라는 식의 풀이였다. 그리고 그 다음에 본 내용이 아직도 잊히지가 않는다. 


'부모'라는 뜻의 '오야'와 '자녀'라는 뜻의 '꼬'를 의미하는 '오야꼬동'은 부모 격인 '닭고기'와 자녀 격인 '계란'을 넣은 덮밥을 의미하다 라는 것. 


이는 신선하고도 잔혹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저 불고기 덮밥 마냥 닭고기계란 덮밥이라 칭했다면 별탈없이 식(食)의 행위를 인간의 권리로 여기며 누렸을테지만 이번에는 사뭇 엄숙해졌다. 


'그럼 지금 파란 줄무늬가 눈에 띄는 이 그릇 속에 부모와 자식을 함께 담아 요리조리 비벼 탐욕스럽게 먹고 있는 건가.' 


그간 생명에 대해 아무런 감정없이 간접적 살생을 이어가고 있었던 자신이 눈에 띄었다. 먹을지언정 적어도 감사의 예를 차리지 않았던 것이 어쩔 수 없게 미안했다. 가식적이라는 것에 딱히 반박할 수 없으나 그와는 무관하게 동일한 생명체로서 사과의 마음이 들었다. 


오야꼬동과 닭고기계란 덮밥의 미묘한 차이

인간의 섭취 행위에 대해 존중하고 필수불가결함을 인정한다. 채식주의자의 가치와 연관하여 어떠한 시비를 가리고자 하지도 않는다. 더불어 진화론은 생존에 관점에서 이를 무덤덤하게 받아들이겠지만 그럼에도 나의 위축된 영혼은 달리 설명할 길이 없어 보인다. 맹자의 측은지심과 같은 것이련지.


그 뒤로 밑거름이 되어주는 생명들에게 감사와 사과를 때때로 해왔다. 그러나 그렇다고 몸 안에 그들을 수용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이에 대한 의견을 제시하고 싶지도 않다. 연역적 논리로 채울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니까. 그렇지만 적어도 앞으로도 그들에게 감사와 사과를 혼자서나마 전해가고자 한다. 오야꼬동은 먹기 어렵겠지만 닭고기계란 덮밥은 감사와 사과로 먹을 수 있을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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