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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홀 Aug 07. 2021

우리의 우리

나에겐 빡빡하게, 너에겐 넉넉하게

드라마 미생에서 낙하산이라는 악의적 별칭 아래 장그래가 고단한 회사 생활을 이겨내는 동력 중 하나는 오과장의 취중진담이었던 '우리'의 가치였다. 그만큼 우리라는 낱말이 내포하고 있는 역량과 의미는 꽤나 강력하다. 단순한 사회적 울타리의 개념보다 더 끈끈하고 애정도가 깊으면서도 부드럽기 때문에 때때로 결속력을 다지는데 유용한 역할을 한다. 공동체, 사회, 단체, 집단 등등이 동일어라기보다 유사적인 성격을 갖고있다는 것을 돌려보면 각각의 이질적인 차이가 쓰이는 상황과 분위기 등에서 충분히 나타나기도 함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가끔 하나의 단어에 꽂히면 극적으로 감화되기도 하는 우리 인간들의 양상이 설명되기도 하는 듯하다.


정치철학에서 등장하는 공동체주의나 공화주의의 공공선이라는 이름 아래 모인 결연체도 있겠으나, 작은 관계들의 소중함을 지어가는 실행적이고 현상적인 모임이 곧 우리의 정신을 잘 대변하는 것 같다. 한 때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이라는 유행어가 여기저기 흩뿌려지기도 했는데 인류는 자칫하면 소소함을 잃어 방황하기도 한다. 관계성에서의 소소함이란 거대한 공동체 구조를 정립하기 이전에 당장의 주변인들에 대한 집중과 관심에서 시작하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고 이러한 소집단으로의 가치 집중이 확장적 개념에 반하기 위함은 절대 아니며 잃어버린 정서적이고 혼이 담긴 개념을 부단히 되찾고자 함이다.


인류 중에서 특히 한국 사회는 현대의 관계 특성을 의미하는 단어로 '삭막하다'를 다용하게 되었을까. 아마도 한국의 역사 속에서 촌(村)의 정서가 뿌리깊게 박혀있었던 것과 관련이 깊을 것 같다. 그렇다면 어떠한 차이가 있길래 삭막한 세상이라 회자되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언젠가 옆집의 행복이 나의 행복처럼 여겨지던 시절이 있었다. 내 마을의 경사는 현수막으로 내걸 만큼이나 소중하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도 남아있는 문화가 말해주듯 반찬과 선물을 주변인과 나누기도 했다. 마을의 아이들을 대할 때 공동육아의 원리로 돌봄공동체를 자연스레 형성하기도 했으며, 급격한 산업화 이전에 농경사회 속에서 이루어진 품앗이와 두레는 또 어떠한가.


그렇다고 과거가 전부 온전하고 완전하다는 일반화는 아니며 현재가 과거에 비해 불완전함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자유주의가 보편화된 세상에서 온고지신의 사고를 차용하여 과거가 지닌 긍정적인 얼 또한 되살리고 싶은 것이다. 편리함을 누리고 있는 지금, 이런 견해들을 펼치는 것이 한편으론 분에 넘치는 것이려나.


소소한 관계의 종류도 다양하다.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가족과 사소한 담소를 가벼이 공유하는 것, 몸의 분리로 멀어지고 소원해졌던 가족들이나 친구들에게 안부 연락 한번 연결하는 것 과 같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고 부담되지는 않지만 잊기 쉬운 일들. 더러는 딱딱한 업무 환경 속에서 만나는 직장동료들에게 유연한 사고로 마주하는 것도 하나의 소소한 관계이기도 하다.


최근 들어서는 이곳저곳 만나뵙는 경비원 분들이나 환경미화원 분들에게 단조롭고 일정하지만 교감을 나누는 간단한 인사 한 마디 건네는 것에 신경써서 노력하고 있다. 그럴 때마다 대부분의 분들은 환한 미소로 마음의 문을 열고 맞아주시는데 그것이 참 감사하다. 이렇게 관계의 소중함을 회복하는 날에는 괜히 하늘이 맑아보여 나도 기분이 맑아진다. 그래서 주변인들 모두의 하늘이 맑아졌으면 좋겠다. 그런 우리 우리들이 되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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