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스민의 중고영화 | 윤희에게
고즈넉한 한옥의 방바닥에 친구들과 둘러앉아 낯선 곳에 머무는 여행자의 기분으로 술잔을 기울이던 밤에 한 친구가 물었다. “사랑이 하고 싶어?”. ‘사랑’이라는 단어를 힘주어 말하는 울림이 귓가에 걸렸다.
밤새도록 오간 수많은 문장들 속에서 금세 휘발되지 않고 남아 귓불을 동동 울리는 낱말들이 있다. 왠지 이대로 놓아주기에는 아쉬워서 만년필을 집어 들고 일기장을 펼친다. 그리고 우리가 함께 나눈 대화, 나를 향한 눈빛과 말투, 허공에 맴돌던 언어의 온도 따위를 펜촉 끝으로 재어본다. 의식의 흐름을 따라 빼곡하게 들어찬 글자들을 찬찬히 곱씹다 보면 그 속에 담긴 어떤 마음들이 종이 위로 둥둥 떠오른다.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을 내 일기장에는 휘갈겨 쓴 마음들이 그득하다. 흘러가는 시간에 묻어 흘려보낼 뻔한 작고 소중한 마음들. 거기에는 누군가를 향한 것이지만 쉬이 전할 수 없는 마음도 포함되어 있다. 그러다가도 어느 순간에는 가슴속에만 묻어 둔 채 내뱉지 않고서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지는’ 마음. 영화 <윤희에게>는 그런 마음을 담고 있어 더욱 애착이 가는 작품이다.
“윤희에게”로 운을 떼는 이 영화의 시작은 부치지 못한 편지로부터 비롯된다. 일본어로 ‘月(つき)’이라 쓰고 “달”이라고 소리 내어 부르는 마음으로부터.
<윤희에게> 보도스틸 | 제공: 리틀빅픽처스
덜커덩 거리는 기차소리와 차창 밖으로 겨울 바다가 펼쳐지는 풍경을 지나쳐 본격적인 이야기가 펼쳐지는 곳은 일본 홋카이도의 작은 지역, 오타루다. 사람 키만치 길가에 쌓아놓은 눈더미 사이로 무채색 옷을 입은 사람들이 뽀득뽀득 발소리를 내며 걸어 다니는 장면들은 동화 속 삽화 같기도 하다. 사시사철 눈이 내릴 것 같은 오타루에 사는 한 여인은 눈더미를 치우느라 구부정하게 굽은 허리를 펴면서 ‘언제쯤 눈이 그치려나…’ 혼잣말을 주문처럼 왼다. 기약 없는 혼잣말이 짙은 겨울 내음 사이로 흩어진다.
‘윤희에게’로 시작하는 편지에 적혀있듯이 ‘겨울의 오타루엔 눈과 달, 밤과 고요뿐’일 것만 같다. 그럼에도 차디찬 공기를 뚫고 나폴거리며 내리던 눈송이가 손바닥 위에서 소리 없이 녹아들 때나 깜깜한 겨울밤을 수놓는 크리스마스 전구의 반짝임이 눈에 들어올 때 그러하듯이 <윤희에게>에는 얼어붙은 마음을 사르르 녹이는 온기가 서려있다. 참을 수 없어지는 마음으로 휘적인 펜촉에서 종이 위로 번져 나갔을 온기가.
<윤희에게> 보도스틸 | 제공: 리틀빅픽처스
이 영화에서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다양한 인간관계가 그려진다. 먼저 혈연을 중심으로 보자면 엄마와 딸, 조카와 고모, 남매, 이제는 남이 되어버린 이혼한 부부까지. 이들은 함께한 세월만큼이나 케케묵은 감정들이 얽혀있는 채로 애써 감춰온 생채기를 긁어내거나 뜻하지 않은 위안을 건네주기도 하면서 ‘가족’이라는 이름의 울타리를 넘나든다. 그로 인해 인물들 간의 거리감은 1미터쯤 가까워졌다가 100미터쯤 멀어졌다가 지척으로 가까워지기도 한다.
혈연을 넘어서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건 뭉근한 사랑의 감정이다. 지난 인연이지만 채 아물지 않은 사랑. 일방향이어서 점점 외로워지는 사랑. 현실을 맞닥뜨려 불안감이 싹트는 풋풋한 사랑. 스쳐간 인연일지라도 평생을 잊지 못하는 사랑. 구태여 영화 속 대사를 빌어오자면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게’ 해주는 이에게 각별한 애정이 솟는 법이겠지.
가끔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애틋한 감정이 들게 하는 상대가 적확한 언어로써 나를 정의해 주는 경험이 얼마나 소중한지. 흔치 않게 찾아오는 그런 날에는 일기장 한 귀퉁이에다가 부치지 못할 편지를 끄적이고 마는 것이다.
언젠가 나에게 이 편지를 부칠 용기가 있을까?
-용기를 내고 싶다.
<윤희에게> 보도스틸 | 제공: 리틀빅픽처스
해당 글은 뉴스레터 [디스턴스]에서 발행한 "자스민의 중고영화" 6번째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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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복을 입고서 비디오 가게를 뻔질나게 드나들던 시절에 영화감독의 꿈을 품고 대학에서 영화 연출을 전공했다. 졸업영화를 찍고 방황의 시기를 보내다가 영화 홍보마케터로 수년간 일하며 영화계의 쓴맛 단맛을 고루 섭취하고, 무럭무럭 자라 글 쓰는 마케터가 되었다. <자스민의 중고영화>에서는 스크린에 비친 장면들을 일상의 프레임으로 옮겨 그 간극(distance)을 헤아려볼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