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봄은 너무 늦게 왔다.

소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_프랑수와즈 사강‘

by Rebecca B

사랑에 대해 말하지 않는 사랑 이야기다.

말없이 시작되고, 조용히 스쳐가며, 끝내 이름 붙지 못한 감정의 잔상이 한 사람의 삶을 흔든다.

프랑수아즈 사강의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는 격정도, 확신도 없는 사랑에 대해 말한다.

그렇기에 더 현실적이고, 더 잔인하며, 더 아름답다.


나는 사랑 앞에서 한 발 물러선 적이 있다.

나이 때문도 아니었고, 용기가 없어서도 아니었다.

다만, 그 감정이 오래가지 않을 것 같다는 예감 때문이었다. 그 사람은 시몽처럼 뜨겁고 맑았고, 나는 폴처럼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결국, 말하지 않는 쪽을 선택했다.

사강의 소설은 그때의 나를 오래 바라보게 만든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때때로, ‘하지 않음’으로 더 오래 남는다. 이 소설은 그 침묵과 멈춤의 서사다.

아주 조용히 마음이 기우는 장면들과, 아무도 탓하지 못한 선택들, 그리고 결국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흘러가는 어느 사랑의 잔해들. 그 안에서 독자는, 잊고 있었던 자신의 감정 하나쯤을 떠올리게 된다.


사랑은 대개 시작보다 끝이 더 뚜렷하다.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는 순간보다, 더 이상 사랑하지 않게 되는 순간이 더 선명하게 기억된다.

그래서 사랑을 다룬 작품 가운데, 시작보다 끝을 오래 응시하는 이야기들은 늘 묘하게 가슴 한쪽을 건드린다.


마흔을 앞둔 여자는 오랜 연인과의 권태 속에 살아간다. 사랑이라 부르기엔 지치고, 익숙하다고 하기엔 외로운 관계다. 그녀는 그 관계 안에서 기대하지도, 설레지도 않으면서도 쉽게 벗어나지 못한다.


사랑이 남아서가 아니라, 이미 많은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이 한때는 있었지만, 이제는 사랑을 흉내 내는 습관으로만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런 그녀 앞에 젊고 순수한 청년이 나타난다.

계절로 치면 겨울의 끝자락에 찾아온 짧은 봄 같은 존재다. 그와의 시간은 화사하고 낯설고, 무엇보다 자신이 아직 살아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 준다.


감정은 피어나고, 마음은 어쩔 수 없이 기운다.

하지만 동시에 깨닫는다.

이 젊은 사랑은 언젠가 닿을 수 없는 지점까지 가버릴 거라는 걸. 그리고 자신은, 그 결말을 이미 예감해 버린 사람이라는 걸.


그래서 그녀는 물러선다.

기쁨 앞에서도 끝을 상상하고, 다가오는 사랑 앞에서 멈춰 선다. 청년의 직진하는 사랑은 찬란하지만, 그녀는 끝내 그 안에 들어가지 못한다.

들어가는 순간, 다시는 되돌아올 수 없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어느 하나 격렬한 장면 없이 흘러간다.

사랑을 놓고 다투지도 않고, 질투하거나 분노하지도 않는다. 대신 침묵과 머뭇거림이 전부다.

그리고 바로 그 여백에서, 사강은 말한다.

사랑은 뜨거움보다 차가움으로 오래 남는 감정이라고.

사랑은 때로 말보다 침묵으로 더 많이 전달된다고.


그래서 이 이야기는 누군가를 떠나보낸 사람에게, 혹은 누군가를 끝내 품지 못한 사람에게 더 깊이 다가간다.

결국 그녀가 택한 것은 새로운 사랑도, 오래된 사랑도 아니다. 그녀는 사랑의 한가운데 서서도 끝을 선택하고, 행복의 입구에서 문을 닫는다.


그 선택은 이기적이지도, 위선적이지도 않다.

그건 그저, 살아온 시간과 사랑을 견디는 방식이다.


브람스의 음악처럼 이 이야기는 격정 없이 흐르지만 결코 단조롭지 않다. 모든 멜로디는 사라지기 위해 울리고, 모든 감정은 슬프게도 떠나기 위해 머문다.


사강은 그 감정을 조용히, 아주 천천히, 그러나 누구보다 명확하게 써 내려간다.


사랑은 꼭 붙잡아야 할 감정이 아니라,

때로는 조용히 흘려보낼 줄도 알아야 하는 감정이다.

그걸 아는 사람은, 사랑의 끝에서도 사랑을 탓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 사랑은 결국 오지 않은 채로 기억된다.

하지만 봄이라는 계절이 늘 그렇듯,

지나간 줄 알았던 마음이 언젠가 다시 피어나기도 한다.

그 봄은 너무 늦게 왔고, 그래서 더 오래 머물렀다.


지금 당신의 마음 어딘가에도

늦게 오는 봄 하나쯤은 준비되고 있을지 모른다.

느리게 피는 감정일수록, 더 깊게 머무는 법이다.


그 봄은 너무 늦게 왔다

그리고 이제, 다시 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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