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 한 조각으로 남게 된 하루의 인연
교토에서 잠깐 만났던 남자를 만나기 전날, 그에게 카톡이 왔다.
"우리 내일 보는 거 맞죠? 어디서 뵙는 게 편하시죠?"
오사카에서 가장 익숙한 역 이름인 '난바역'이 머리에 떠올랐다. 난바역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스타벅스에서 만나기로 했다.
다음날, 왠지 많이 걸을 것 같은 느낌이 들어 편한 복장을 하고 스타벅스에 음료를 시키고 기다렸다.
스타벅스 2층에 앉아 기다렸는데 계단에서 편한 운동복 차림의 그가 올라왔다.
"드디어 만났네요! 다시 뵙게 되어 기뻐요!"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건네는 그였다.
자전거, 러닝 등 외부에서 운동하는 걸 좋아한다는 그는 까만 피부가 특징적이었다. 정말 멋이 없는 사람이었다. 불편해서 선크림도 안 바른다는 그는 환한 웃음 사이로 드러나는 하얀 이가 유난히 돋보였다.
왠지 환하게 웃는 그를 보며 나도 덩달아 긴장이 풀렸다.
나는 오사카를 몇 번 와봐서 그에게 가고 싶었던 곳을 가라고 말했다.
말을 하지 않아도 이미 머릿속에 정한 코스가 있는 것 같았다. 처음 간 곳은 오사카항이었다. 날씨도 유난히 맑은 날이었다.
바다 주변 길을 따라 걸으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직장, 취미, 최근에 다녀온 여행지 등.
신기했던 점은 나이도 물어보지 않고 집안 환경과 같이 별 다른 정보를 말하지 않았는데 대화가 술술 풀렸다.
그래서 그런지 여행지에 대한 기억보다 그와 대화했던 기억이 더 생생하다.
사실 이날 오사카 시내를 따라 천천히 다녔기 때문에 어디에 갔는지 장소에 대한 기억은 뚜렷하지 않다.
그냥 그와 걸으며 대화하고 밥 먹었던 기억만 남아있다.
대화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그의 말이 몇 가지 있는데 다음과 같다.
"그냥 앞으로도 나랑 이렇게 같이 여행이나 다닐래요?", "많이 말랐는데 밥 좀 더 먹어요."
"한국 가면 또 만나요! 서울에서 내가 밥 사줄게요^^"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그냥 배시시 웃고 넘겼었다.
저녁이 되고, 여행이 거의 끝날 무렵이었기 때문에 나는 가족과 직장 동료의 선물을 사러 가야 한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그가 쇼핑몰까지 같이 간다고 나섰다.
낮에 이야기하던 중, 백화점이나 쇼핑몰을 안 좋아한다고 했던 것 같아 사양했다.
하지만 결국 따라오고 그는 가게 밖에서 계속 나를 기다렸다.
그는 많이 지쳐 보였고 계속 신경이 쓰여서 이만 헤어지자고 말했다.
사실 나는 이때 조금 불편한 감정이 들었다. 아직 깊은 관계도 아니고 하루 같이 여행 다녔는데 내가 왜 이 사람 눈치를 보며 여행을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쇼핑몰에 지하철역이 연결되어 있어서 바로 헤어져도 좋을 것 같았다.
그도 피곤했는지 서울에서 만나기로 하고 우리는 그렇게 헤어졌다. 그렇게 나는 선물을 사고 숙소로 돌아왔다.
사실 이날이 그와 처음으로 대화하고 마지막으로 만난 하루였다.
나는 서울에 돌아와서 그의 연락에 답을 하지 않았다. 지금 같으면 편하게 연락을 주고받았을 텐데 어려서 그랬던 건지 그냥 뭔가 불편했던 건지 답을 하고자 하는 의지가 없었다.
(마지막에 불편했던 감정 때문이었을까?)
일본 여행 중 나의 모습 그대로 그의 기억에 남아있고 싶었던 건지, 아니면 그냥 여행의 좋은 기억 일부로 남기고 싶었던 건지 나도 잘 모르겠다.
그는 그 뒤로 일본 여행을 갈 때마다 연락을 했왔다.
"저는 지금 도쿄에 있어요~ oo 씨는 잘 있나요?" "교토에 다시 오게 되었습니다. 제가 기억 나시는지요?"
지금 생각하면 정말 미안하지만 매번 답을 하지 않았다. 역지사지로 생각하면 정말 화날 일이다.
아무 이유 없이 답을 하지 않았으니까.
그 뒤로 가끔 일본에 가면 그가 생각날 때가 있다. 혹시 또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 있지는 않을까.
살다 보니 그가 '시절 인연'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사람 관계만큼 내 의지대로 이루기 어려운 것도 없다. 정말 친해지고 싶고 가까이하고 싶은 사람과 관계를 맺기 어려울 때도 있고 생각지도 않았는데 나에게 자석처럼 붙는 인연이 있다.
지금까지 살면서 스치는 사람들을 겪을 때 교토에서 만났던 그 남자가 생각이 난다.
나는 '시절 인연'이 있다고 믿는다.
몇 해의 가을을 보낼 때마다 나는 2017년 가을, 일본에서 만났던 그 남자를 떠올리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