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내리는 7월의 어느 저녁. 진희는 짧은 처마 밑에 서서 조심스레 우산을 접는다. 귀가 따갑도록 쏟아지는 빗소리를 뒤로 한 채 입구부터 서늘함이 올라오는 계단을 따라 내려간다. 어두운 복도를 비추는 자줏빛 조명을 따라가자 벽에 걸린 네온사인이 보인다. 'Here's looking at you, kid' 이런 허세, 딱 질색이다. 불쾌한 첫인상 때문인지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에어컨 바람 때문인지 진희는 몸을 부르르 떨며 안으로 들어간다.
그래, 이럴 때마다 지독한 양가감정이 드는 것이다. 한껏 씹으며 들어갔는데 며칠 전까지 플레이리스트에 들어있던 음악이 흘러나올 때. 예수는 부정해도 취향은 부정할 수가 없다고, 마음속 별점이 띵동 띵동 하고 올라가는 소리가 들린다.
칭찬이 자자한 가게 주인 얼굴까지 봐버리면 정말로 이성적인 평가가 불가능해질 것 같아 ‘쳐다보지 말자’를 머릿속으로 되뇌며 테이블 자리에 앉으려는데 잠깐 방심한 순간, 눈이 딱 마주친다. 무심하지만 다 알고 있다는 듯한, 술집 사장들이 가지고 있는 특유의 그 눈빛이 길게 드리운 앞머리 사이로 방금 들어온 눅눅한 손님을 훑더니 코스터 하나를 꺼내 바 위에 툭 올려놓는다. 그는 노골적으로 자리를 유도하고 있다.
진희가 냉기 서린 의자 위에 앉자마자 올리브 두 개와 물수건이 올라온다. 일부러 가방은 내려놓지 않았다. 능숙하게 와인잔을 닦는 손길을 타고 올라가니 살짝 걷어올린 스웨터 아래로 검은 옷과 잘 어울리는 푸르스름한 자국이 보인다. 고양이인가?
1. <아이리시맨>, 2019 - 키안티 클라시코 와인과 깜빠뉴
<아이리시맨>(2019), 마틴 스콜세지 감독
“식사는 하고 오셨어요?”
대답을 들을 생각은 아니었던 듯 닦고 있던 잔을 내려놓고 와인 한 병을 꺼낸다. 말을 탄 기수가 그려진 키안티 클라시코. 베이스에 손가락을 올려놓고 슬슬 돌리자 달콤함이라곤 없는 스모키 향이 올라온다. 한 입 머금으면 톡 쏘는 과일향이 퍼진다.
뒤이어 투박하게 잘린 빵 반 덩어리가 진희 앞에 놓인다. 말린 과일과 견과류가 박혀있는 소위 시골빵이라 불리는 종류의 통밀빵이다. 작게 손으로 뜯어 와인에 살짝 담갔다가 부스러지기 전에 빼낸다. 찰기만 남은 빵은 그윽한 와인향과 함께 혀를 감싸다 선물 같은 달콤함과 고소함으로 마무리된다.
‘시골빵’이라는 말은 뭔가 이상하다. 그럴싸하게 ‘깜빠뉴’라고 불러봐도 마찬가지다. 도시의 번듯한 빵집에서 비싼 값에 이들을 팔고 있다는 점은 더욱 이상하다. 기술발전의 상징이었던 공장 출신의 흰 빵은 ‘몸에 안 좋은 빵’, ‘싼 빵’이 되어버렸고 도리어 정제되지 않을수록, 제조과정이 비효율적일수록 값이 올라가는 것이 자연스러워졌다. 시골에서는 더 이상 이와 같은 수고로움을 선택하는 제빵사들을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면 이제 이 빵은 ‘시골빵’인가, ‘도시빵’인가?
키안티 클라시코 Chianti Classico
이탈리아 토스카니 중앙의 한정된 산지에서 생산되는 와인으로, 14세기부터 만들어진 것으로 기록되며 15세기 이후 교황부터 예술가들까지 즐겨먹던 고품질의 와인이다. 잘 알려진 키안티 와인과는 생산지와 전통, 포도종까지 완전히 다른 종류이다. 영화에 나온 와인은 카스텔로 디 가비아노 키안티 클라시코Castello di Gabbiano Chianti Classico로 영화 속 시간이 흐름에 따라 각각 다른 생산연도의 라벨이 등장한다. 주인공들은 거친 빵을 덩어리째 놓고 손으로 뜯어 와인에 적셔 먹는다.
2. <카사블랑카>, 1942 - 프렌치 75
<카사블랑카>(1942), 마이클 커티즈 감독, 험프리 보가트, 잉그리드 버그만 등
거한 웰컴 드링크를 먹고 본격적으로 바의 시그니처 메뉴를 주문했다. 입구에서부터 알 수 있듯 <카사블랑카>를 사랑하는 주인은 멋들어진 레몬 장식을 얹은 프렌치 75를 내놓는다. 잔뜩 올라간 당도에 기분이 좋아진 진희는 어느새 가방을 벗어 내려놓는다.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가방끈을 고양이가 그려진 긴 팔이 말없이 정리한다.
진희가 오늘 겪을 긴 여정을 예상이라도 하듯, 알코올 향보다는 달달함을 증폭시킨 상큼함이 디저트처럼 혀 위에서 녹아내린다. 내심 음료에 맞춰 영화 사운드트랙인 ‘As time goes by’를 틀어주길 기대했지만 사실 진짜로 그런다면 그건 컨셉이 너무 과한 거지... 혼자 킥킥 웃으며 주변을 둘러보는데 문득 기묘한 느낌이 진희를 사로잡는다.
꽤 넓던 바에는 어느새 진희와 바 주인, 단 둘만이 남아있었다. 언제인지 모르게 반쯤 꺼진 조명이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어둠을 뿜어내고 있었다.
프렌치 75 French 75
이 칵테일은 1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에 주둔하던 영국군이 집에서 가져온 진과 그 지방의 샴페인을 섞어 만든 것이 시초로, 유명한 프랑스제 대포인 M1897 75mm에서 그 이름을 따왔다. 현대에는 얼음에 레몬즙과 설탕시럽을 섞어 달콤하게 먹는 것이 일반적이다. 주로 레몬 가니쉬가 올라가 있다.
3. <007> 시리즈 - 보드카 마티니
<007 포 유어 아이즈 온리>(1981), 로저 무어
고대부터 전해 내려온 인류의 위대한 유산인 불길함이 진희에게 경고한다. 그는 다음 잔을 마지막으로 이곳을 떠나겠다고 결심한다. 평가고 뭐고. 무얼 주문할까 하다가 단순한 연상 작용을 통해 영화에 등장하는 가장 유명한 음료 중 하나인 보드카 마티니를 주문했다. 그 사고 과정을 꿰뚫어 보기라도 한 듯 작게 웃은 목소리가 ‘젓지 말고 흔들어서?’하고 물어온다. 이 바텐더, 정말 짜증 난다. 고개를 끄덕이고 그가 재료를 꺼내러 간 사이 자연스럽게 가방을 메려는데 어딜 봐도 가방이 보이지 않는다. 눈동자가 마구 돌아가고 머리가 핑핑 돈다.
“이거 찾아요?”
물방울이 맺힌 쉐이커를 흔들던 손을 허벅지에 슥슥 닦더니 밑에서 진희의 가방을 꺼낸다. 식기 전에 오라는 말과 눈웃음에 얼떨결에 화장실에 들어온 진희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무심히 바라본다. 그의 눈동자가 낯선 이의 의중을 읽으려는 듯 거울 위를 유영한다. 뭐가 보이지? 저건 바로.. 프로페셔널한 나 자신이다. 다짐하듯 가방끈을 양손으로 붙잡은 진희가 다시 전장으로 돌아간다.
매끈하게 긴 다리에 넓은 부채꼴의 양팔을 뽐내는 칵테일 잔이 그 안에 빠진 올리브 빛깔을 사방으로 반사시킨다. 그 황홀경을 연구하던 진희는 부드러운 유리 굴곡 너머로 낯익으면서도 어딘가 어색한, 무엇보다도 훨씬 작아진 가게 주인의 모습을 발견한다. 뒤로 묶어 넘겼던 중단발의 머리는 어느새 어깨 위로 늘어져 있고 확연히 내려간 눈높이는 진희를 올려다보고 있다. 그럼에도 다른 사람이라고 확신할 수 없는 건 넉넉해진 스웨터 사이로 보이는 아까 그 고양이 타투 때문이다. 아니, 애초에 남자 아니었나?
생각에 잠긴 채 단숨에 잔을 비우자 아까처럼 장난스런 웃음소리가 들린다. 민망해진 진희는 덩그러니 남겨진 올리브를 한 입에 쏙 집어넣는다. 아담한 뒷모습이 그 소리들을 이끌고 바 뒤로 사라지는 모습을 보며 머리를 짚는다. 술을.. 너무 많이 마셨다.
보드카 마티니 Vodka Martini
007 시리즈에서 주인공 제임스 본드가 늘 주문하는 칵테일. 그는 항상 '젓지 말고 흔들어서'('Shaken, not stirred')라는 주문을 덧붙이는데 원작 소설에서부터 이어진 이 취향은 본드가 자신의 이름을 소개하는 대사('Bond, James Bond.')와 함께 그의 시그니처가 된다. <007 카지노 로얄>에서 다니엘 크레이그는 보드카 대신 진을 넣은 마티니를 주문하는데, 이 칵테일은 에바 그린이 연기한 '본드걸'의 이름을 따 베스퍼 마티니Vesper Martini라고 부른다.
4. <토탈 이클립스>, 1995 - 각설탕과 압생트
<토탈 이클립스>(1995), 아그네츠카 홀란드 감독,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데이빗 슐리스 등
해맑게 자리를 비웠다가 가지고 돌아온 것은 라벨도 붙어 있지 않은 초록색 유리병. 무엇이 쏟아져 나올까 했더니 역시나 초록색 음료다. 작은 잔 위에 나이프가 올라가고, 술이 몇 방울 더 떨어지고, 거기에 불이 붙고 나서야 진희는 그것이 압생트임을 알아챘다. 술 깨나 먹어봤다고 자부하는데도 처음 보는 광경인지라 금방이라도 머리카락에 불이 붙을 듯 가까이 다가간다.
서서히 작아지더니 금방 사라져 버린 설탕을 휘저어 섞으니 음료에 잠시 뿌옇게 구름이 낀다. 정말 이걸 먹으면 막 영감이 솟을까? 한 번에 털어 넣으니 강렬한 허브향이 입안은 물론 콧속까지 장악한다. 달콤 씁쓸하면서 뜨거운 알코올이 목을 타고 배까지 넘어가는 것이 그대로 느껴진다. 신음이 절로 나오는 이 술이 주는 느낌은 그리 유쾌하진 않다. ‘Je t'aime’이라고 말했는데 ‘Je t’adore’이라는 대답을 듣게 되는 기분이랄까.
압생트 Absinthe
압생트는 향쑥, 아니스 등 허브와 향신료를 이용해 만든 높은 도수의 증류주로, 19세기 유럽에서 크게 유행하였으며 값이 저렴해 여러 예술가들이 찾아 흔히 '예술가들의 술'로 불린다. 압생트용 나이프나 숟가락에 각설탕을 올려 그 위에 술을 붓거나 불을 붙여 녹여 마시는 것이 일반적이다. 참고로 프랑스어에서 Je t'aime은 성애적 의미에서 상대방을 사랑한다는 의미이고 Je t'adore는 똑같이 사랑한다로 번역되나 성애적 의미 없이 친구끼리도 쓸 수 있는 말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랭보의 대사, 'I'm very fond of you'의 적절한 번역을 찾고 싶었으나 안타깝게도 실력이 부족하다. '어긋난 사랑의 표현'이라는 점 외에는 별로 비슷하지 않다.
5. <아이리시맨> - 보드카 수박
<아이리시맨>(2019)
한참 얼굴에 열이 오르려는데 기가 막히게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수박 한쪽이 올라온다. 검은 고양이의 베이지 색 눈이 먹이를 노리는 맹수처럼 빛난다. 금방 냉장고에서 꺼냈는지 차가운 김이 올라오는 조각을 한입 덥썩 베어 물자 달콤하고 시원한 과즙이 파도치듯 밀려들어온다. 만족스러울 때까지 빨아들이니 진한 보드카 향이 가득 찬다.
어느새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아진 바텐더가 쿵 하고 수박 반쪽을 올려놓는다. 그리곤 아삭아삭 소리와 함께 다 먹은 수박 껍데기가 테이블 위로 빼꼼 올라온다. 어린아이처럼 작아진 손에는 날카로워 보이는 손톱이 달려있다. 진희는 조금 추워진다.
보드카 수박 Vodka Watermelon
역시 <아이리시맨>에 등장한 음료(?)다. 수박에 구멍을 뚫은 후 보드카를 꽂아 한나절에서 하루정도 놔두면 과육 사이사이로 술이 골고루 스며든다. 영화에서 쓰인 보드카가 무엇인지 알아내진 못했지만 놀랍게도 세계 곳곳에서 보드카뿐만 아니라 와인 등 다양한 술을 이용해 수박 칵테일을 만드는 모양이다. 과일향이 가향된 보드카도 잘 어울린다고 한다.
이해를 돕기 위한 사진
6. <매기스 플랜>, 2015 - 핫 위스키
<매기스 플랜>(2015), 레베카 밀러 감독, 그레타 거윅, 에단 호크 등
주인이 사라진 바에 혼자 남은 진희는 웅웅 울리는 게 자신의 머리인지 천장에 달린 시스템 에어컨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내뱉는 숨 하나하나에 달큰한 알코올 향과 하얀 입김이 서린다. 어느새 진희가 앉아 있는 의자 주변까지 어둠이 침범해있었다. 정적이다.
순간 삐- 삐- 삐- 하는 소리가 주방 뒤편에서 울린다. 낯선 복도 끝, 문이 열린 전자레인지에서 나오는 노란 불빛이 길을 비추고 있다. 그 안에 들어있는 건 레몬과 스타아니스가 띄워진 머그잔. 모락모락 김이 나는 손잡이가 뜨거워 한번 삐끗하자 놀란 고양이가 진희 뒤로 푸다닥 소리를 내며 도망친다. 따뜻한 위스키에 시나몬 스틱 하나를 꽂고 자리로 돌아와 두 손으로 감싸 쥐고 호 호 불어 들이키자 따끔한 열기가 온몸에 퍼진다.
뒤를 돌아보자 테이블들이 있던 자리에 푹신한 소파와 담요, 그리고 검은 고양이 한 마리가 진희를 기다리고 있다. 그는 둥그렇게 둘러싸여 눈을 감는다.
핫 위스키 Hot Whisky
매기는 자신의 집에 처음 방문한 존에게 추위를 달래기 위한 핫 위스키를 대접한다. 그가 사용한 정확한 레시피는 알지 못하지만 각종 향신료와 레몬이 첨가된 따뜻한 위스키라면 없던 감기도 떨어질 것 같다.
7. <카우보이 비밥> - 프레리 오이스터
<카우보이 비밥>(1998), TV 도쿄
가슴께의 묵직함이 진희의 아침잠을 깨운다. 당당히 지나가는 발자국을 느끼며 몸을 일으키니 어젯밤엔 있는지도 몰랐던 큰 창으로 햇빛이 들어온다. 여기 지하 아니었나?
“일어나셨어요?”
키가 훤칠하게 큰, 고양이 타투를 한 어제의 그 바텐더가 고양이를 안고 있다. 진희는 눈을 질끈 감곤 형장에 끌려가는 죄수처럼 비틀비틀 의자에 가 앉는다. 기다렸다는 듯 잔이 놓인다. 힘없는 손을 겨우 들어 저항하려는데 탱글탱글한 노른자가 그릇에 담겨 일출처럼 떠오른다. 살짝 찰랑이는 정도로 부어진 진 위에 노른자, 타바스코, 후추가 차례로 뿌려진다. 그 기묘한 비주얼을 망설이듯 보고 있으니 검은 고양이가 다가와 발로 잔을 툭 민다. 깜짝 놀라 얼른 집어 들자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린다.
“한 입에 마셔요. 노른자는 입 안에서 깨 먹고. 프레리 오이스터라고, 숙취에 좋대요.”
여전히 못 미더운 표정이지만 시키는 대로 입 안에 머금고 노른자를 터뜨려 함께 삼키자, 목의 간질거림 후 아침이라도 먹은 듯한 든든함이 위벽을 감싼다. 이거 효과가 있는 건가.. 고민하는 진희의 머리 위로 그림자가 드리운다.
“그래서, 평론가님. 우리 바는 몇 점이에요?”
잘생긴 입꼬리가 그리는 매력적인 웃음에 진희는 생각한다. 이번 리뷰는 정말 망했다고.
프레리 오이스터 Prairie Oyster
해장용 술이라고 알려진 독특한 음료(?). 술을 넣을 수도, 안 넣을 수도 있다. 주인공 스파이크 스피겔이 이것을 만들어 먹는 장면이 등장한다. 레시피는 진에 날계란 노른자, 핫소스(혹은 우스터 소스)와 후추다. 유일하게 먹어보고 싶지 않은 음료다.
이번엔 글에 새로운 시도를 해보았다. 혹시 몰라 덧붙이자면 실제로 저렇게 섞어마시면 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