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글에 한여름이 오히려 영화 보기 좋다고 썼던 것 같은데, 현재의 고통을 과대평가하고, 다가올 고통은 과소평가하는 흔한 인지 오류였다. 7, 8월엔 영화를 거의 보지 못했다. 밖에도 못 나가고 실내에서 에어컨 바람을 산소호흡기처럼 매달고 겨우 일했을 뿐이다. 여름엔 시원한 나라로, 겨울엔 따뜻한 나라로 여행하며 사는 사람들이 있는데, 나는 될 수 있으면 겨울만 따라다니고 싶다. 하지만 평생 날씨를 빚지며 살 순 없는 노릇이니, 지금은 그저 평범한 날씨 중산층으로서 가진 것만으로 견디며 산다.
1. 마리 크로이처, <코르사주>
크리스틴 스튜어트의 <스펜서>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는 영화다. 왕실을 대표하는 여성이라는 신화를 견디기엔 너무도 인간적이었던 이들은 결국 각자의 방식으로 족쇄를 끊어낸다. 비키 크립스의 얼굴은 확실히 스튜어트의 얼굴보다 강인하다. 포스터에서도 생각에 잠기거나 쓰러져있는 다이애나 비와 달리 엘리자베트 황후는 고개를 꼿꼿이 들고 왕관의 무게를 버틴다. 두 영화 모두 정적이고 의뭉스러운 묘사로 또 다른 신화를 생산하지만, 두 주인공의 시선은 오로지 하나, 현실의 자유를 향하고 있다.
비키 크립스를 처음 본 것은 역시 <팬텀 스레드>인데, 주인공들의 관계가 징그럽다고 생각하는 것과 별개로 아름다운 영화다. (조니 그린우드의 스코어만큼은 완벽하다!) 빈틈없는 원칙주의자 우드콕이, 몸져누운 자신을 간호하며독점의 만족감을 느끼는 알마의 눈빛에 어린아이처럼 녹아내린다는 다소 무리한(?) 로맨스도 납득되는 건 역시 크립스의 얼굴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 덕분이다. PTA, 과연 마야 루돌프와 결혼한 남자답다...
2. 존 멀레이니, <존 멀레이니: 베이비 J>
코미디언 존 멀레이니의 넷플릭스 스페셜이다. 아무 생각 없이 웃고 싶은 울적한 날이면 스탠드업 코미디를 보곤 하는데, 파업으로 SNL 방영이 중단된 요즘, 난 전에 없이 웃음기 없는 주말을 보내고 있다.
멀레이니는 유명한 마약 중독자다. 이번 스페셜은 그가 중독 치료원에 들어가기 직전, GQ와 진행했던 '전설적인 인터뷰'를 시작으로 친절한 마약상과의 결별, 완치 후 재기에 이르기까지의 여정을 다룬다. 사실 농담 몇 개는 SNL 모놀로그에서 이미 들은 거라 처음 들었을 때만큼 웃기진 않았지만, 멀레이니 특유의 시니컬한 블랙 코미디에 세 번 정도 웃을 수 있었다. 하나 걸리는 점은 무서울 것 없이 쉽게 망가지고, 또 쉽게 회복하는 그의 사회적 권력이 조금 꼽다는 것 정도.
개인적으로 인상 깊었던 멀레이니의 모습은 매운 핫소스를 뿌린 닭날개를 먹으며 인터뷰하는 토크쇼 Hot Ones에 나와 시종일관 덤덤한 표정으로 용암덩어리 같은 음식을 삼켜내는 모습이다. 영상에는 '소금 크래커만 먹을 것 같이 생겼는데 매운 거 잘 먹네'라는 댓글이 달렸고, 그 밑에는 '아무래도 마약의 자극에 익숙하기 때문일 것'이라는 합리적인 분석이 달렸다.
3. 아리 애스터, <보 이즈 어프레이드>
세상에는 두 종류의 효자가 있다. 엄마 전화를 받는 효자와, 엄마 전화를 거절하는 효자. 주인공 '보'는 후자의 아들이다. 태어날 때 약간의 사고로(혹은 선천적으로) 예민하고 소심한 성격을 가지게 된 보는 작은 자극에도 과민반응하며 파국화된 결말을 상상하는 습관이 있다. 보가 집을 떠나 목적지에 도달하기까지 있었던 모든 일들은 완전한 거짓은 아니나 심히 과장된 환상과 뒤섞여있다.
엄마의 집으로 향하는 그의 불안한 시선을 따라가면서, 관객은 자신과 엄마의 관계를 돌아보게 된다.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전화하는 건 미치도록 무섭고, 천재지변이 일어나서라도 만남을 유예하고 싶은 관계. 이 관계에 깊은 사랑이 포함되어 있다는 게 믿어지는가?
어릴 적 나의 최대의 공포는 엄마와 나의 기억이 불일치하는 것이었다. 난 분명 이렇게 말했는데, 엄마가 분명 이렇게 말했는데, 엄마는 아니라고 한다. 영화는 자신의 미숙한 뇌를 믿을 수 없는 상황에서 나를 만든 이의 말 한마디로 세상이 송두리째 바뀌는 트라우마를 봉제선 없이 늘어놓는다. 이런 면에서 어쩌면 나는 보를 이해한다.
여담이지만 초반에 <마더!>처럼 사람들이 바퀴벌레처럼 몰려드는 장면이 있었는데, 난 엄청나게 괴롭게 보고 있는데 웃음을 터뜨리는 관객이 많아서 부국제에 온 타란티노 목격담이 떠올랐다. 아리 애스터 영화에 코미디 요소가 들어있는 건 맞다. 나도 <유전>을 보며 웃음을 터뜨리기는 했지만 이건... 난 좀 무서웠어...
은지야 너 Tㅏ란티노야?
솔직히 영화관에서 볼 때는 괴롭고 빨리 끝났으면 했는데, 본 지 두 달 정도 지나니 좀 낭만적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무엇보다 엄마 집 분위기가 너무 좋았다. 생각해 보면 내가 사는 집은 늘 더럽고 어수선한데, 엄마가 사는 집은 항상 깨끗하고 여유롭다. 같은 집에 살 때도 나의 구역과 엄마의 구역은 공기부터 달랐다.
우리는 설화수 냄새를 극복할 때, 비로소 독립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어쨌든 아리 애스터가 엄마를 진짜 사랑한다는 건 알겠다... 근데 그 사랑... 다신 꺼내지 마요...
4. 공포를 모르는 상영회: <주온 - 극장판>, <화차>, <비밀은 없다>, <파라노말 액티비티: 더 고스트 디멘션>
토시오는 징그러우니까 패스...
진짜 무서운 공포영화가 보고 싶었다. 뒷목이 쭈뼛 서늘해지고, 괜히 벌레라도 붙은 듯 다리를 떨어대고, 나도 모르게 두 손이 얼굴로 올라가는 그런 공포영화. 안타깝게도 목적을 달성하지는 못했다. 최근에 좀 소름 돋았던 영화는 <플라이> 정도...
오로지 무서운 장면만 기대하고 <주온 - 극장판>을 틀었다. 근데 생각보다 무서운 장면은 없고 세계관이 복잡해 머리가 아팠다. 게다가 극장판을 보기 전에 비디오판부터 봐야 하는 걸 몰랐다니! 이건 안 본 걸로 치고, 도장깨기할 시리즈에 '주온'을 추가한다.
<파라노말 액티비티: 더 고스트 디멘션>도 무작정 '무서운 장면 보여줘!' 하는 마음으로 틀었다가 실망했다. 카메라 화면에만 보이는 기이한 형체의 존재는 흥미로웠지만, 나머지는 뻔한 서양권 괴담이라 몰입되지 않았다. 근데 난... 오리지널 <파라노말 액티비티>도 그냥 그랬으니까...
현실 공포라도 느껴보자 싶어서 오랫동안 미뤄뒀던 스릴러 두 편도 꺼냈다. 난 한국영화 소양이 매우 부족한데, 세상엔 한국영화보다 외국영화가 훨씬 많으니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국산영화 스크린쿼터제를 시행하고 있다. 적어도 3편 중 한 편은 한국영화를 보고 있는데, 의무적으로 본 것 치고는 앞선 두 작품보다 훨씬 재미있었다.
마지막으로 본 이선균 작품이 <킬링 로맨스>라 좀 걱정했는데, 별로 웃기진 않았다. 오히려 그의 필모그라피 전반에 깔려있는 '미치겠다, 정말'의 얼굴도 극의 성격에 따라 무한히 바뀔 수 있다는 게 놀라웠다. 더욱 놀라운 건 김민희의 연기였다. 김민희는 분위기 자체가 내 옆에 있을 법한 사람이라곤 상상하기 힘든지라, 현실에서 붕 뜬 캐릭터를 주로 맡는다고 생각해 왔는데, <화차>의 김민희는 뭔가 다르다. 옆을 파고들었다가 순식간에 사라진다. 비밀로 꽁꽁 싸여있다가 금방이라도 깨질 듯 투명해진다. 그러다가 절정에 다다르면 지금까지 본 건 전부 꿈이었나 싶을 정도로 낯선 얼굴을 한다. 결말에 호불호가 갈리던데, 난 그 모든 미스테리 끝에 결국 로맨스라는 본질을 드러냈다는 점이 좋았다.
이경미 감독은 필모가 너무 적다! 입체적인 여성 캐릭터를 쓰는 걸로는 손에 꼽는 감독인데... <미쓰 홍당무> 같은 거 또 없나? 여기저기서 비슷한 향만 살짝 맡아봤을 뿐이다.
<비밀은 없다>는 개봉 당시 손익분기점의 20%도 채우지 못할 만큼 성적이 매우 저조했다고 한다. 이경미 감독 영화가 워낙 컬트적이고 유머 감각이 독특해 호불호가 갈리는 것도 있지만, 유독 어두운 분위기와 퀴어 요소 또한 이유 중 하나 아닌가 싶다. 영화 전체가 신경질적이라 관람하기 힘들었지만, 손예진의 곧 쓰러져도 너는 죽이고 갈 거라는 듯한 얼굴과 결말이 취향에 맞았다. 다음 영화... 어떻게 안 될까요?
나: 다들 <보건교사 안은영> 좋아하지 않으세요?
??: 보건교사 안은영이 나랑 무슨 상관...
5. 공룡은... 좋아하시죠?
아이코닉한 로고 (내 카드에도 그려져 있다!)
이번 도장깨기는 '쥬라기 공원' 시리즈다. 자체휴가를 내고 '쥬라기 공원'(1993~2001) 세 편에, '쥬라기 월드'(2015~2022) 세 편(+ 단편 <배틀 앳 빅 록>)을 봤는데, 뭐든 2편이 문제다. <쥬라기 공원> 1편은 분위기를 제대로 살리는 공룡 특수효과와 거슬릴 것 없는 정석적인 플롯이 시리즈를 대표하는 웅장한 스코어와 어우러져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스필버그 영화다.
근데 2편부터는 갈등과 해결과정이 너무 억지스러워 순식간에 흥미가 떨어졌다... 인간의 욕심으로 생명을 창조하는 오만함에 대한 비판과 그럼에도 적응해 나가는 자연에 대한 경이라는 메시지는 사라지고, 공룡을 죄 없는 인간에게 닥친 자연재해 정도로 취급한다는 점이 최악이었다. 이러니14년 동안 속편이 안 나왔지... (이쯤 되면 스필버그가 의심스럽다.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도 <레이더스>는 완벽했는데, 2편은...)
'쥬라기 월드'를 보기 시작할 땐, 그 온갖 인명사고를 겪고도 기어이공룡 놀이공원을 열었다는 것에 이미 화가 난 상태였다. 근데 생각보다 브라이스 댈러스 하워드와 크리스 프랫의 케미가 좋더라. 굉장히 닮은 것 같기도... 문제는 넷플릭스에 나머지 시리즈는 전부 있으면서 쥬라기 월드 2편 <폴른 킹덤>만 없었다는 것이다. 다행히 웨이브로 볼 수 있었지만 왜 이 편만 빼놓은 건지... 그리고 내가 시리즈를 완주하고 일주일 후, 넷플릭스에 <폴른 킹덤>이 들어왔다. (??)
쥬라기 월드 3부작의 궁극적인 목표는 쥬라기 공원의 (영화 안팎의) 실패를 만회하는 것이었다. 1편의 생명 윤리적 고찰로 돌아가려는 부단한 노력에 나도 마음이 조금 풀렸다. 중간중간 논란이 될 만한 전투씬과(아니 티라노가 어떻게...), 지금도 심해에서 먹이를 기다리고 있을 무시무시한 돌연변이 공룡의 존재가 날 불편하게 한다는 것만 빼면 나름대로 깔끔한 마무리. 근데 난 사실 공룡에 큰 관심 없다.
6. 엄태화, <콘크리트 유토피아>
원작이 웹툰이니 당연한가 싶지만, 웹툰 문법을 충실하게 따르는 영화다. 말도 안 되게 비현실적인 상황과 놀랍도록 빠르게 적응하는 등장인물들. 다들 익숙하고 전형적인 인물들이라, 관객이 마음을 읽기 쉽다는 점까지. 빠른 전개와 간결한 메시지는 좋지만, 냅다 설정을 던져주는 웹툰식 전개에 익숙하지 않다면 불친절하다고 느낄 수도 있겠다 싶었다. 실제로 같은 상영관에 있던 중년 관객으로부터 설정을 완벽히 이해하지 못했다는 말을 듣기도...
아무튼 영화는 황도 통조림, 아파트 층수, 붉은 표식, 바둑돌 등 단순하고 대비가 명확한 이미지로 권력관계와 심리 변화를 묘사한다. 대사와 조명이 좋았고, 주조연의 연기가 자연스러웠다. 특히 부녀회장 역의 김선영 배우 연기가 현실감을 톡톡히 더해주어 좋았다. 앞에서 긴장을 풀어놓아서, 후에 거의 포화 상태에 이르렀는데도 지친다는 느낌은 없었지만, 초반이 더 마음에 듦.
명화(박보영)를 욕하는 평이 많다는 점 역시 흔한 웹툰 댓글창 같았는데, 다른 인물들이 너무 평면적이라 더 두드러지지 않았나 싶다. 별다른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는 약한 결말에, 악의 평범성 담론까지. 그리 독창적인 시나리오는 아니지만, 보고 나와서 이런저런 이야기할 거리가 많다는 점은 좋았던 한국영화. 다음 한국영화는 <가려진 시간>이다.
여담 1: 엄태구 배우 얼굴은 진짜 강렬하다.
여담 2: 기생충도 그렇고, 영화 내용상 소개란에 얼굴을 올리지 못하는 배우가 있다는 게 재미있다.
올해 영화 관람 목표치가 있었는데, 오늘부터 1일 1 영화를 해도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시점에 도달했다... (물론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그렇게 따지면 무엇도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다.) 심란한 아침, 습관처럼 창문을 열었다가 차가운 가을바람을 만났다. 그 바람 한 자락에 지옥 같던 새벽은 잊고 나는 또 바보 같은 희망에 부풀어 오른다. 이번 계절엔 정말 끝내주는 낮잠을 잘 수 있을 거라는 희망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