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주년을 시드니 타워에서
2024년 1월 10일. 결혼한 지 벌써 10년. 나는 지금 우리가 처음 만났던 시드니에 와있다. 남편은 없지만 남편을 똑 닮은 미니미와 함께. 결혼기념일이니 기념을 해야지. 지호와 시드니타워아이에 가볼까. 우리가 처음 만났던 곳도 시드니타워아이 아래에 있는 쇼핑몰이니 겸사겸사 가보면 좋을 듯하다. 12년 전 남편과 처음 밥을 먹은 태국 식당도 예약을 했다. 파닉스 수업 끝나고 바로 시내로 나가려다가 집에 있는 이든이도 데려가기로. 마침 이든이 엄마도 일을 빨리 끝낼 수 있다 해서 일행이 넷이 되었다. 북적북적 트레인을 타고 시내로 향한다.
시드니타워아이는 시드니 도시 전경을 볼 수 있는 전망대다. 시드니 랜드마크인 오페라하우스와 하버브리지, 달링하버, 하이드파크 등 도시 전체를 360도로 내려다볼 수 있다. 시내 한가운데 웨스트필드 쇼핑몰 위에 있어서 쇼핑몰 5층으로 가면 연결통로가 있다. 접근성도 무척 좋은 편. 해가 질 무렵에 가면 노을과 야경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을 수 있어서 저녁 시간이 가장 인기가 많단다. 전망대 바로 밑에는 Skyfeast at Sydney Tower라고 하는 레스토랑도 있다. 음식은 뷔페로 제공되며 창가 자리가 아주 천천히 움직여서 360도 시드니 전경을 바라보며 식사를 할 수 있다. 레스토랑은 전망대와는 별로도 따로 예약을 해야 하는데 시드니에서 특별한 순간이 필요하다면 한 번쯤 가볼 만하다. 나도 남편과 두 번째 인지 세 번째 데이트 때 간 적이 있는데 음식에 대한 기억보다 야경이 멋있었던 느낌이 남아있다. 오늘은 아들과 함께이니 여유로운 식사는 포기하련다.
호주는 다민족 국가라 전통음식은 딱히 없지만 다양한 나라의 음식들이 있고 맛집도 많다. 이탈리아, 태국, 말레이시아, 터키 음식을 비롯해 중국의 딤섬, 일본의 초밥 맛집도 아주 많다. 내가 남편을 처음 만났던 곳도 웨스트필드에 있는 태국 식당이다. 여전히 인기가 많아서 점심시간이나 저녁 시간에는 예약이 필수. 태국스러운 식기와 은으로 된 물컵도 여전하다. 남편은 이렇게 세세한 기억은 못하겠지만 나름 기념일이니 보내주려고 사진도 몇 장 찍어본다. 아들과 둘만 왔으면 메뉴도 두 개 밖에 주문하지 못했을 텐데 오늘은 넷이라 이것저것 푸짐하게 시킬 수 있어 좋다. 지호는 원래 내가 좋아하는 '팟씨유'라고 하는 태국 볶음면을 좋아하는데 오늘은 소프트쉘크랩에 눈을 떴다. 조잘조잘 떠드느라 쉴 틈이 없었던 그 입은 이제 부드러운 게 껍질을 꼭꼭 씹느라 무척 바쁘게 움직인다.
12년 전, 나는 두바이에 있었고 남편은 시드니에서 석사를 하고 있었다. 시드니에 있던 친구가 나랑 어울리는 사람을 찾았다 했다. 하지만 두바이에서 시드니까지는 비행기로 꼬박 14시간. 아무리 장거리라도 이건 말도 안 되는 거리가 아닐까. 그런데 신기하게도 다음 달 스케줄에 시드니 비행이 나왔고 나랑 어울릴 것 같다던 그 사람을 만났다. 말도 안 되는 우리의 장거리 연애가 그렇게 시작되었다. 다들 힘들어서 기피하는 14시간 호주 비행을 난 마다하지 않았고 시드니가 아닌 다른 도시로 비행이 나오면 남편은 멜버른, 브리즈번, 퍼스 등 가리지 않고 나를 보러 날아와주었다. 그렇게 한 달에 1-2번 만나고 스카이프로 영상통화를 하며 2년이 되었고, 2014년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식만 하고 다시 장거리 부부가 되었다가 6개월 후 결국 내가 퇴사를 하고 호주로 갔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을 하고 임신을 하고 아들이 태어나고 모든 게 빠르게 흘러갔다. 모든 게 자연스럽게 진행될 줄 알았는데 이민은 아니었다. 상황이 좋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남편에게 너무 큰 짐을 준거 같아서 고민 끝에 우리는 한국으로 돌아왔다. 2018년 여름이었다.
수많은 고민과 각오 끝에 결정한 한국살이는 참으로 녹록지 않았다. 나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과 가족 관계를 유지한다는 것이 가장 힘이 들었다. 나만 힘들었던 건 아니었을 거다. 남편 역시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각자의 짐이 너무 무거웠던 걸까 우리는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위기였다. 회피하는 남편과 억울했던 나. 처음엔 내 삶을 포기한 듯 하루하루를 무기력하게 보냈다. 코로나가 오고 바닥을 찍어서야 내가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이건 아니지. 이렇게는 살 수 없지. 나에게 주어진 것들 중 내가 바꿀 수 있는 거부터 해보자. 주어진 짧은 시간, 처음엔 한밤중으로 시작해서 나중엔 새벽시간을 이용해 오롯이 나의 삶을 살기 시작했다. 고요하고 치열하게. 그렇게 몇 해가 지나니 덜 흔들리고 더 단단해진 내가 있었다. 성장은 했지만 많이 소진된 몸과 마음도 느껴졌다. 휴식이 절실했던 어느 날, 호주에서 나를 불렀다. 좀 쉬었다 가라 했다.
호주 한 달 살기의 공식적인 이유는 아들의 교육이었지만 정말 쉬고 싶었다. 잠시 벗어나고 싶었다. 10년 동안 모든 걸 맞춰가려 노력했으니 나 한 달만 쉬자. 딱 한 달만. 물론 이 말은 남편에게 하진 못 했다. 내 마음속 절규였다. 그렇게 한 달 살이를 반대하는 남편과 맞서기 시작했다. 보통의 나였음 마음이 약해져 안 되는 상황을 받아들였을 텐데 이상하게 이번의 나는 달랐다. 결혼 전 모아놨던 비상금을 끌어모아 여행 경비를 마련하고 꼭 가야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남편의 마음을 가장 무겁게 했던 시부모님도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 반대해도 간다 마음먹었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여기까지 오게 된 나. 밥을 먹으면서 이런저런 생각에 취했다가 시끄러운 아들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다. 밥 다 먹은 거 같으니 이제 올라가 보자.
5층을 통해 전망대로 올라가니 역시 가슴이 탁 트인다. 시드니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고 날씨가 좋으니 멀리 하버까지 보인다. 가까이로는 바로 아래 하이드파크와 세인트 메리 대성당, 멀리는 오페라하우스와 하버브리지, 달링하버까지. 지금 눈앞에 보이는 시드니 랜드마크에 대한 설명도 터치 스크린에서 친절하게 설명해 준다. 더 멀리 그리고 더 자세히 보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 망원경도 곳곳에 설치되어 있다. 해질 무렵이 왜 인기가 많은지 충분히 알겠다. 노을과 야경이 함께라면 또 다른 모습의 시드니를 만날 수 있을 거 같다. 인생 네 컷 같은 사진 부스도 있어서 애들 둘이 찍으라고 들여보냈더니 정말 표정들이 가관이다. 아들들이란.
오늘도 기념품 샵에 잠깐 들렀다가 위에서 내려다보았던 하이드파크로 이동한다. 아이들이 파크를 원한다. 도심 속 엄청난 규모의 공원. 나무들이 우거져 한여름에도 시원한 그늘과 휴식을 준다. 세인트 메리 대성당도 공원 한가운데 있다. 여기도 그늘에 커다란 체스 판이 있어서 시민들이 체스 게임을 즐기고 있다. 지호와 이든이도 구경하는 사람들 틈에 끼어본다. 사실 언니와 나는 관광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다. 벤치에 앉아서 두 녀석들이 체스 구경이 끝나기를 기다린다. 날씨가 너무 더워서 꼼짝하기 싫은데 아이들은 멀리 보이는 세인트 메리 대성당 앞의 분수에 가고 싶단다. 둘만 다녀오라 보내고 우린 눈으로만 따라간다. 녀석들 올 땐 그냥 오지 않는다. 이 날씨에 또 뜀박질. 잔디밭에서도 달리는 아이들. 아들들은 더위를 못 느끼는 게 확실하다.
체력을 아껴서 달링하버까지 둘러보는 게 원래의 계획이었지만 오늘도 여기서 마무리를 할까 한다. 공원에서 너무 뛰더니만 아들들의 에너지 레벨에 적신호가 보이고 우리도 얘들과 있으면 아무것도 안 해도 그냥 기가 빨린다. 다음에는 형부에게 맡겨두고 둘만 나오자는 작전을 들릴세라 소곤소곤. 집에 가는 길에 유명한 일본 치즈 케이크(Uncle Tetsu’s)를 사러 타운홀로 이동하다가 시드니에도 생겼다는 트램(전차)을 처음 봤다. 원래 트램의 도시는 멜버른인데, 빨간색 트램이 다니는 시드니 시내는 좀 낯설지만 멋져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