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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 한 달 살기, 개고생 여행 스냅

내돈내산 시드니 스냅 촬영 후기

by 민송

날짜: 2024년 1월 12일

시간: 11:00 ~ 12:00

장소: 파크 하얏트 호텔 옆 잔디밭


며칠 전 예약한 스냅사진 촬영 날이다. 출근 시간대만 살짝 지나자마자 집을 나섰다. 아이와 움직일 때는 반드시 시간 적 여유를 두고 움직일 것. '이지호' 육아 8년 차에 생긴 나의 철칙이다. 일주일 치 날씨를 훑어보고 비 오는 날을 피해 어렵게 잡은 날인데, 하늘을 보니 화창하다 못해 뜨거울 것 같다. 리뷰를 보니 해지는 노을 배경이 예쁘긴 했지만, 여름이라 해가 지려면 밤 9시는 되어야 한다. 그 시간에는 이 집 예민한 아들의 컨디션이 좋을 리 없으니 최대한 오전 일찍으로 잡아야 했다. 아쉽게도 첫 타임은 이미 예약이 되어 있어서 우리의 촬영은 11시가 되었다.


12월과 1월의 시드니는 그야말로 불볕더위다. 비가 오면 기온이 훅 떨어져서 일교차가 크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태양이 워낙 강해서 40도를 육박하는 날도 많다. 예전엔 습하지 않아 그늘만 찾으면 된다고 했는데, 지구온난화와 이상기후를 시드니도 비켜가진 못했는지 요즘은 습하고 뜨거운 날씨가 계속된다. 오늘도 백 퍼센트 뜨거움. 촬영을 위해서라도 에너지를 최대한 아껴야 한다.


다음은 동선 체크. 혼자였다면 기차로 한 번에 윈야드까지 가서 걸으면 금방이지만, 나에겐 8살짜리 까칠한 아들이 있다. 최소한의 움직임을 위해 기차를 한 번 갈아타고 써큘러키역으로 가기로 한다. 파크 하얏트라면 써큘러키에서 하버브리지 쪽으로 쭉 걸어가면 되는데, 그 길에는 그늘이 없다. 일찍 도착하면 땀과 열을 식힐 카페가 필요하겠다 싶어 머리를 굴려보지만, 레스토랑은 줄지어 있어도 10시면 아직 오픈 전이고 근처엔 카페가 없다. 락스 쪽으로 갔다가 다시 이동하면 동선이 길어진다. 그러다 문득 떠올랐다. 만남의 장소가 파크 하얏트니까, 호텔 로비에 있으면 되지 않을까?




시내로 가는 기차 안에서 지호는 노선도를 익히느라 바쁘고, 나는 휴대폰으로 이런저런 검색을 하느라 정신이 없다. 그래도 정신줄은 놓지 않고 센트럴역에 내려 써큘러키로 가는 기차로 갈아탄다. 써큘러키 역에서 내리면 눈앞에 바로 오페라하우스가 보인다. 지호에게 선크림을 다시 발라주고 숨을 크게 들이킨 뒤, 뜨거운 햇볕 아래로 발을 내딛는다. 와, 진짜 뜨겁다. 빨리 걸어가자. 왼쪽으론 시드니 현대 미술관(Museum of Contemporary Art), 오른쪽으론 국제크루즈 터미널(Overseas Passenger Terminal)을 지나며 걷는데, 나는 태양을 피하고 싶은 마음에 발걸음이 급하고 아들은 아주 느긋하다. 입만 조잘조잘 바쁘고 걸음은 어찌나 느린지. 후. 숨을 한번 더 내쉬어야겠다. 오늘 촬영이 끝나기 전까지 절대 화내면 안 돼. 명심해.



많이 변한 센트럴역을 지나 써큘러키



파크 하얏트가 보인다. 11시까지 아직 한 시간 남았고, 우리는 호텔 로비로 들어간다. 자리를 잡으려다 깜짝 놀랐다. 여기가 뷰맛집이었네. 로비 라운지에 앉으니 바로 눈앞에 오페라하우스가 떠 있는 듯 보인다. 시원한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해맑게 베이비치노를 마시는 아들을 바라본다. 야, 너 진짜 부럽다. 엄마아빠 잘 만나서 이 나이에 이 뷰를 보고 있다니. 아들은 계속 조잘조잘, 나는 자체 스피커 오프. 귀를 닫고 눈은 멍하니 앞의 뷰만 본다. 맑은 하늘 덕인지 물 색도 반짝반짝. 어쩜 이리 예쁠까. 비현실적인 풍경이다. 자기 말 좀 들어보라며, 아들내미가 자꾸 끼어든다. 그렇게 씨름을 하다 보니 어느새 11시가 가까워진다. 화장실 한번 다녀오라고 등을 떠밀고, 나도 거울을 확인한다. 드디어 스냅촬영 임박.



파크 하얏트 호텔 로비 라운지



시드니 스냅으로 검색을 하니 꽤 많은 작가님들이 나온다. 선택지가 많으면 더 고르기 어려운 법. 그러다 '시드니에서 20년째 웨딩 스튜디오를 운영'이라는 문구가 눈에 띄었다. 혹시 우리의 웨딩 사진을 찍어준 분이 아닐까 하는 마음에, 그분으로 결정했다. 10년 전, 나는 두바이, 남편은 시드니, 결혼식은 서울. 웨딩사진을 찍을까 말까 고민하던 중, 시드니에도 한국 웨딩업체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비행 스케줄에 맞춰 웨딩촬영을 예약했다. 휴가도 아니고 비행 가서 웨딩촬영이라니. 스케줄이 바뀌면 어쩌나 싶은 불안도 있었지만 선택권이 없었다. 그래도 그 덕에 시드니 랜드마크 배경의 웨딩 사진을 얻었고, 10년이 지난 지금 다시 촬영을 하게 되었으니 좋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10년 전 찍은 웨딩사진



"안녕하세요. 지호야 인사드려. 오늘 우리 사진 찍어주실 작가님이셔."

커다란 카메라 덕분에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지호와 작가님의 어색한 첫 만남. 하지만 잠깐이었다, 우려했던 아들의 텐션이 올라가기 시작한다. 긴장을 한 건지 남자 어른 작가님이 마음에 든 건지. 호기심과 장난기가 가득한 표정으로 작가님 옆에 딱 붙는다. '호주에서 태어났다, 서울에 산다, 수학을 잘한다, 주산은 몇 급이다, 태권도를 한다' 자랑을 끝도 없이 늘어놓는다.


아니 너, 수다 떨려고 온 게 아니야. 사진 찍으러 왔다고. 눈치를 줘도 카메라만 들이대면 장난스러운 표정. 계속 뛰고, 또 뛰고. 아이고, 이를 어쩌나. 죄송해요 작가님. 괜히 8살이랑 촬영한다고 했나 봐요. 마음씨 좋은 작가님은 "이 나이 남자아이치고는 아주 잘하고 있다."며 나를 오히려 안심시켜 준다.



카메라에 잡힌 레이저와 복화술의 현장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하버브리지 아래에서 갑자기 태권도 품새를 하는 우리 아들. 정말 쥐구멍에 들어가고 싶다. 내 표정이나 포즈를 신경 쓸 여력이 전혀 없었다. 얼굴은 땀과 함께 점점 흐려지고, 마음속으론, '빨리 끝나라, 빨리 끝나라'만 외쳤던 것 같다. 돈 주고 사진 찍으러 와서는 빨리 끝나라를 바라는 내 모습이 참 아이러니했지만.


그런데 또 하나의 문제는, 예약할 때 천문대 촬영도 부탁드렸다는 것. 시드니 천문대는 그곳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이 멋있어서 꼭 넣고 싶었다. 게다가 우리 웨딩 촬영도 했던 곳이라 욕심을 냈는데, 뒤늦게 후회막심이다. 파크 하얏트에서 천문대까지는 차로 5분. 그런데 그 5분 동안 이지호는 멀미가 난다며 난리를 친다. 저 오버스러움을 어쩌면 좋을까. 천문대에서 내 멘탈은 거의 가루가 되었다. 결국, 눈으로 레이저를 쏘며 이를 꽉 깨물고 '이제 그만해.' 엄마의 복화술이 나와버렸다.



카메라로 만들어진 아름다운 장면



촬영이 끝나고, "다 끝났어? 잘 찍었어?"라는 정민언니의 문자에 난 이렇게 답했다. "내가 미쳤지. 왜 돈 주고 이 고생을. 건질 사진도 없을 거 같아." 기차에선 두통이 찾아와 지호에게 휴대폰을 쥐여주고 계속 눈을 감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와서는 수다쟁이 아들 대신 내 입이 터져버렸다. 언니를 끌고 방에 들어가 하나하나 이지호의 만행을 일러바쳤다. 언니는 웃으며 내 목과 등에 알로에 젤을 발라줬다. 아들에게만 집중하느라 뜨거운 태양 아래 내가 익어가는 줄은 몰랐다. 브이 라인으로 깊게 탄 자국은 한국에 돌아와서도 오래도록 남아 있었다. 반면 지호는 살짝 그을린 정도. 여전히 백옥 피부다.


작가님은 찍은 사진을 색감 보정만 해서 1-2달 내에 보내주신다고 했다. 사진이 밀려있어서 잊을만하면 도착할 거라고. 한국에서 명절을 치르며 억지로 일상에 나를 다시 끼워 넣고 있던 어느 날, 선물처럼 사진 파일이 도착했다. 기대를 전혀 안 하고 있었는데, 사진을 열어보니 입이 떡 벌어졌다.


괜한 고생이 아니었다. 그림 같은 배경, 시드니 자연광이 다 했다. 그리고 장난꾸러기 아들도 사진 속에서는 과하지 않다. 그저 천진난만한 아이일 뿐.


역시 프로는 다르다. 작가님의 인내심에 큰 절이라도 올리고 싶은 마음. 덕분에 '내돈내산 개고생'의 그날이 우리에게 평생의 추억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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