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오페라하우스를 만나다
날씨가 반짝반짝 빛나는 주말.
오페라하우스를 보러 출동해 볼까. 지난번 같은 불상사를 대비해 멀미약을 먹이고 비닐봉지와 알러지약, 백초 등을 챙기며 만반의 준비를 한다. 여기서 시내까지 가는 방법은 기차, 버스, 페리 이렇게 세 가지가 있다. 우리는 가장 호주스러운 방법, 페리를 타고 가기로. 여기선 페리로 출퇴근하는 사람들도 있으니 정말 호주답지 않은가. 하지만 주말이고 날씨가 이렇게나 좋으니 우리 같은 선택을 한 사람들이 많을 거라곤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나의 불찰이었다.
이름도 예쁜 동네 메도우뱅크(Meadowbank)에 있는 선착장. 시내로 향하는 페리가 도착했다. 잔뜩 기대에 부풀어 오른 지호는 얼른 배에 오르고 싶어 했으나 배가 이미 꽉 찬 상태라 더 이상 사람들을 태우지 못하고 떠난다. 하는 수 없이 다음 페리를 기다린다. 다음 건 가능할까 걱정하는 찰나, 시내에서 오는 페리가 도착한다. 페리 아저씨가 여기서 기다리는 거랑 같이 올라갔다가 오는 거랑 같은 시간 아니냐며 당장 타라 하신다. 날씨도 덥고 밖에서 기다리느니 일단 올림픽파크로 가는 배에 올랐다. 시티와 반대로 거슬러 올라가 다시 시내로 출발하면 예상 시간보다 훨씬 더 걸리겠지만 지호는 마냥 신이 났다. 그래 행복하지 암. 근데 제발 입 좀 다물고 조용히 가면 안 되겠니. 하. 나의 인내의 시간도 연장이구나.
여유로워 보이는 요트와 그림 같은 집들을 지나고 점점 시내에 가까워져 간다. 달링하버에서 사람들이 우르르내리더니 또 타고, 드디어 써큘러키에 도착한다. 시드니 랜드마크인 오페라하우스를 배경으로 화창한 날씨를 즐기는 호주 사람들과 관광객들. 전통 악기소리, 페리 경적소리, 북적북적하는 써큘러키의 그 익숙한 바이브가 너무나 좋다. 이거지. 이게 호주지. 하지만 그것도 잠깐. 반짝이다 못해 타는 듯한 태양과 무더운 공기에 애들은 벌써 지친 눈치다. 일단 점심부터 먹이기로 하고 더 락스(The Rocks)로 이동해 본다.
써큘러키에서 오페라하우스 반대쪽으로 걸으면 나오는 더 락스는 옛날 모습이 잘 보존되어 있는 거리다. 카페와 음식점이 특히나 모여 있는데, 유명한 스콘집 'Tea Cozy'와 팬케이크 맛집 'Pancake on the Rocks', 독일 맥줏집 Munich(뮌헨-구 뢰벤브로이) 등 오래된 맛집이 많다. 토요일이라 락스마켓도 열렸겠군. 큰일이다. 우리 아들 병이 도지겠는 걸. 생전 처음 해외여행을 나온 아들이 심각한 병에 걸렸는데, 바로 기념품병이다. 어딜 가든 뭔가 남기고 싶은지 자꾸 기념품 타령. 오늘도 물 만난 물고기가 될 거 같은 느낌이 슬프게도 확실하다.
더 락스에 야외 푸드코트가 있길래 자리를 잡고 태국음식으로 간단히 요기했다. 에너지가 충전된 우리는 본격적으로 락스 구경에 나섰다. 역시 지호는 기념품에 눈이 돌아가고, 딱 하나만 사기로 원만한 합의가 이루어졌다. 호주에 왔으니 나무로 만든 캥거루를 사겠단다. 경사 있는 곳에 올려놓으면 목각 캥거루가 콩콩 뛰며 내려간다. 이든이랑 지호에게 하나씩 안겨주고 겨우 마켓을 벗어나는데 성공이다.
하버브리지 아래에 도착하니 대왕 체스판이 벌어졌다. 커다란 체스를 번쩍 들어 몇 걸음 걸어가서 말을 다시 놓는 아저씨들. 지호와 이든이가 한참을 보고 서있다. 지호는 학교에서 친구들에게 체스를 배워왔는데 체스 구경도 재미있나 보다. 땡볕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걸 보면. 천천히 더 락스 쪽에서 돌아 나와 다시 써큘러키로. 이번엔 반대쪽인 왕립 식물원인 로열 보타닉 가든으로 향한다. 무더운 날씨에 떨어지려는 당도 충전할 겸 아이스크림도 하나씩 사서.
그늘에 앉아서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잠시 갖는 휴식 시간. 애들은 신기하게 충전도 참 빠르다. 먹자마자 거대한 나무 아래로 뛰어가서 어디엔가 있을 생명체를 탐색하고 정민언니와 나는 그런 아이들을 탐색한다. 로열 보타닉 가든은 규모가 상당히 크다. 이 날씨에 애들까지 딸렸으니 구석까지 다 둘러볼 욕심은 버리고 피크닉도 패스. 아이스크림을 먹었으니 그거면 된 거다. 우린 짧은 코스로 돌며 오페라하우스 쪽으로 어슬렁어슬렁 걸어가 보기로.
우리나라와는 스케일이 다른 나무 크기에 먼저 놀라고 독특한 나무 모양도 참 새롭다. 넓게 펼쳐진 잔디밭이 시야에 들어오니 온 마음이 탁 트이는 거 같기도. 애들은 차고 넘치는 에너지로 초록초록한 잔디 위를 힘껏 달린다. 아주 본능적인 모습. 아 이런 곳에서 아들 키우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든다. 멀리 하버브리지와 오페라하우스가 보이기 시작하자 여기저기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여기가 그 유명한 '미시즈 맥쿼리 포인트' 포토스팟인가. 그렇담 우리도 빠질 수는 없지. 사실 맞는지 안 맞는지도 모르고 일단 사진부터 찍고 본다. 점점 다가가고 있다. 우리 아들이 그렇게 가고 싶어 했던 오페라하우스로.
걷다 쉬다 반복하며 오페라하우스에 도착했다. 역시 사람들이 많다. 피로가 몰려와 이제 좀 쉬어볼까 계단에 퍼질러 앉았는데 애들은 아직 에너지가 남아있나 보다. 긴 계단을 오르락내리락 끝이 없다. 저러다가 갑자기 방전되면 낭패인데. 걱정스러운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흥분된 그들은 내 말을 들을 것도 아니니. 어쩔 수 없다. 한순간에 지쳐 징징거리는 시나리오를 한번 그려보며 마음의 준비만 하기로.
오페라하우스 바깥쪽을 한 바퀴 둘러보고 그 아래에 있는 오페라바에서 하는 공연도 구경하고 다시 페리를 타기 위해 이동한다. 늦어지면 올 때처럼 돌아가는 사람들로 붐빌 터. 오늘은 일찍 돌아가기로. 한 달 살기가 이래서 좋은 거 같다. 또다시 보러 오면 된다는 생각에 아쉬움이 그리 크지 않으니. 그리고 일정을 앞두고도 가벼운 마음으로 움직일 수 있으니까.
이번 시티투어는 아주 성공적이다. 돌아오는 배에서는 피곤했는지 수다쟁이의 말수가 줄어서 나도 마음 편하게 올 수 있었다. 저녁에 영상통화를 하며 지호가 아빠에게 아주 자랑스럽게 얘기한다. 페리도 타고 오페라하우스에 다녀왔다고. 내부 투어를 한 것도 아니지만 아주 가까이 간 거니 다녀온 건가 보다. 편하게 기차로도 갈 수 있었고 배를 하나 놓치는 바람에 시간이 오래 걸리긴 헸지만 페리를 타 본 것이 지호에게 정말 좋은 경험이 된 거 같다.
잠든 아들을 한번 쓰다듬어주고 남편에게 사진을 보내주려고 보니 죄다 애들 사진뿐이다. 일행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지호랑 나랑 찍은 사진도 많지 않구나. 그게 좀 아쉬워서 그랬는지 문득 아들이랑 스냅사진이나 남겨볼까 하는 생각이 든다. 10년 전 우리 웨딩 사진도 오페라하우스를 배경으로 찍었으니 지금 여기서 아들과 사진을 남겨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잠을 미루고 나는 또 검색에 들어간다. 이 날의 검색이 그 고생으로 이어질 줄도 모르고 마냥 뿌듯하고 설레기만 한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