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민송 Dec 23. 2024

지금 만나러 갑니다

타임머신을 타고 20살의 나와 85세의 나를 만나다

타임머신을 타고 20살의 나,
85세의 나를 만난다면
무슨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요?


어젯밤, 새해설계를 이끌어주시는 선생님의 예쁜 목소리와 함께 열세 번째 질문이 도착했다. 20살의 나와 85살의 나를 만나라니. 어떻게 만나지? 20살의 나는 아직 내 기억 속에 남아있다. 그때의 외모와 그때의 생각들. 다는 아니지만 아직도 기억이 난다. 하지만 85살의 나는 어떤 모습이지? 막막하면서도 뭔가 가슴 한편에서 살랑살랑 바람이 분다. 일단 바람을 잠재우고 아이를 재우며 나도 잠에 빠져들었다. 내일 아침이면 내 무의식이 어떠한 답을 주리라 기대를 하면서.


지금 나에게 타임머신이 있단다. 과거로도 갈 수 있고 미래로도 갈 수 있는 타임머신. 고요한 새벽, 혼자 깨어있는 이 시간에 슬며시 눈을 감고 빨간색 작동 버튼을 눌러본다.




20살의 나를 만나러 간다. 2000년 12월 대학 캠퍼스. 기말고사 기간이라 도서관에 있는 나를 찾았다. 수수한 옷차림에 긴 생머리. 조금 피곤해 보이긴 하지만 얼굴엔 생기가 넘친다. 자신을 닮은 나를 보고 살짝 놀라는 듯 하지만 이내 웃어준다. 마치 내가 20년 후의 자신이라는 걸 아는 것처럼. 그래. 나 참 잘 웃었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가면서부터 더 많이 웃게 되었던 거 같다. 올 한 해 어땠냐는 나의 질문에 머릿속에서 기억을 하나씩 꺼내는지 천천히 입을 연다.





"음, 제가 목표하던 대학이 아니라 입학을 결정하기까지 힘들었어요. 너무 아팠어요. 그래도 와 보니 생각보다 재미있고 공부도 할 만하고. 무엇보다 좋은 사람들을 만난 거 같아요. 하지만, 이게 맞나 이 길이 맞나 싶을 때가 종종 있긴 해요. 아직은 뭘 해야 할지 모르겠거든요. 뭘 해야 내 가슴이 뛸지 뭘 해야 잘할 수 있을지 아직 정말 모르겠어요."

 

내가 42살의 본인이라는 걸 밝히자마자 안경너머 두 눈이 반짝 빛난다. 작은 입에선 질문들이 우르르 쏟아지기 시작한다. "세상에 42살의 나라고요? 정말요? 일단 예쁘니까 너무 다행이고. 호호. 혼자 살아요? 결혼했어요? 남편은 누구예요? 아이는 있어요? 일은 해요? 저는 어떤 직업은 갖게 되나요" 워워. 숨은 좀 쉬어야지. 그래 궁금한 게 참 많을 때야. 수많은 기회들이 눈앞에 펼쳐져 있으니 어디로 가야 할지 불안하기도 하겠지. 그 심정을 누구보다 잘 아는 나는 빙긋이 웃으며 얘기한다.  


"아까 가슴 뛰는 일을 찾고 싶다 했었나? 곧 찾게 돼요. 그 가슴 뛰는 일을. 그리고 그걸 이루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하고 결국 이루게도 될 거예요. 이렇게 적극적으로 고민하면 결국 내가 원하는 삶을 살게 될 거란 얘기인 거죠. 본인답게. 나답게. 하지만 생각에 너무 깊이 빠져있진 말아요. 어떤 상황에서든 내가 나를 잘 돌봐주어야 해요. 너무 외롭지 않게." 좀 더 듣고 싶은 말이 있다는 표정이었지만 제대로 인사를 할 겨를도 없이 나는 또 어디론가 이동한다.




85세의 나를 만나러 간다. 도착한 곳은 조용하고 평화로워 보이는 동네. 작은 카페 앞이다. 저기서 운동복 차람의 할머니가 다가온다. 나다. 85살 먹은 나인가 보다. 하얀 백발의 머리카락이 무색하게 꼿꼿한 허리와 바른 자세. 정정하신 할머니. 운동을 막 끝내고 나오셨는지 송골송골 이마의 땀을 닦으신다. 얼굴에 생긴 주름은 숨길 수 없지만 표정은 밝고 에너지가 넘친다. 나를 보시더니 이제 왔냐는 듯 환하게 웃어주신다. 참 익숙하다 그 미소. 내 두 손을 꼭 잡더니 카페 안으로 데려가신다. 거칠지만 따뜻한 할머니의 손. 벌써부터 코끝이 찡 해진다. 큰일이다.  



"괜찮아. 괜찮아. 너무 애쓰지 않아도 돼요. 충분히 잘하고 있는 걸. 여기서부턴 더 잘할 게 없어. 그래도 많이 불안하지? 다 내 탓 같고? 근데 아니야. 그럴 필요가 없어요. 너무 잘하려고 하지 말고 그냥 즐겁게 살아요. 하고 싶은 거 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내봐요. 아직 너무 젊고 시간도 많은 걸. 다른 사람 눈치 같은 거 보지 말고 당당하게. 그래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니까. 그리고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지호는 정말 멋진 어른으로 자라요. 나중에 깜짝 놀랄걸. 그런데, 포기하지 않고 그렇게 열심히 버티고 살아준 덕에 내가 지금 이렇게 여유롭고 행복하지. 늘 얼마나 고마웠는데. 다행이야. 죽기 전에 이렇게 고맙다고 전할 수 있어서."


나는 할 말을 잃었다. 할머니의 손을 꼭 붙잡고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어디 아픈 데는 없으신지, 할아버지가 된 내 남편은 잘 살아있는지, 지호가 크면 뭘 하고 살게 되는지. 내가 물어보고 싶었던 말, 내가 궁금했던 그 질문들이 순간 아무런 의미가 없어졌다. 호호 할머니가 된 나의 평안하고 온화한 시선에서 그리고 나를 꼭 안아주듯 잡아주신 두 손에서 나는 이미 답을 다 들었나 보다. '괜찮다' 그 한마디가 나에게는 큰 울림이 되어서 내 몸 구석구석에서 오래도록 느껴졌다.                   




2024년을 돌아보고 새해를 준비하면서 왜 과거의 나와 먼 미래의 나를 만나보라고 하셨을까. 그게 현재와 어떤 연관이 있을까. 우리가 어떤 문제에 직면해 있을 때는 그 문제와 엉켜 붙어있느라 그때의 상황을 바르게 바라보기가 힘들어진다. 그러면 문제 해결도 저절로 어려워지기 마련이다. 선생님은 이번 질문으로 우리가 우리를 그리고 우리의 인생을 좀 더 크게 바라보면 좋겠다고 하셨다. "문제에서 조금만 벗어나 보면 의외로 뜻밖의 창의적이고 명확한 솔루션이 떠오를 수 있다"라고.


한 달 가까이 나를 괴롭히던 불안과 걱정이 있었다. 꼬리에 꼬리를 문 생각들. 자책을 하다가 결국 한숨으로 마무리 짓던 그 늪에서 이제 벗어날 수 있을 거 같다. 순수하고 풋풋했던 나의  20대. 설렘과 기대로 가득했던 두 눈. 따뜻하고 편안했던 나의 80대. 사랑과 믿음이 가득한 눈. 이제 지금의 내가 나를 그렇게 바라봐 줄 차례다. 내가 묻고 싶었고 찾고 싶었던 것들은 이렇게 살다 보면 일상이 하나씩 툭 툭 그 답을 던져 줄 것이다. 살자. 생각에 깊게 빠지지 말고 나를 돌보며 살자. 괜찮다 괜찮다. 내가 나에게 말해주며 그냥 즐겁게 살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