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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다 Feb 19. 2022

내가 복싱을 하는 이유

앎과 삶의 일치, 링에서 만나는 심리학 조각들


첫 시합은 30초 만에 끝났다.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는 나를 심판이 막아섰다. 두 번째 시합은 끝까지 갔으나 중간에 다운을 당하는 바람에 3:0 심판 전원일치 판정패. 세 번째 시합은 눈앞에 번쩍 전기가 들어오더니 내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심판이 경기 종료를 선언한 후였다. 네 번째 시합도 3:0 판정패. 그래서 4전 무승 4패. 이 정도면 운을 탓하기보다 소질이 없다고 해야 정확하다. 그래도 나는 복싱이 좋다.


복싱에서는 말과 행동이 정확하게 일치한다. 나는 어려서부터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것이 불편하고 싫었다. 태권도 품세를 아무리 연습해도 실전에선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아버렸을 때가 이 불편한 진실과의 첫 만남이었다.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 겉으로 하는 것과 실제 벌어지는 일이 이렇게 다를 수 있구나 하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아버렸다. 그 이후로도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것은 도처에 있었다. 정의사회를 구현한다는 대통령이 매일 TV에 나왔으나 그를 욕하는 대학생들과 최루탄 때문에 나는 울면서 초등학교를 하교했다. 나는 창의적인 글로벌 인재를 육성한다는 고등학교에서 교과서를 달달 외우며 입시 체제에 순응하는 그저 그런 인재로 컸다. 말과 행동이 따로 노는 세상에 가끔 잘난 척 반항도 했다가 결국엔 적당히 적응해 갈 즈음 내 나이 43살에 나는 복싱을 배우기로 한다. 복싱은 나에게 새로운 세상이다. 복싱에 관한 관장님의 말은 그대로 살아나서 현실이 된다. 이미 환갑이 다 되어가는 나이에 배도 적당히 나왔는데 그의 스트레이트와 훅 어퍼는 여전히 날이 서 있다. 말씀이 그대로 육신이 되는 현장이다. 그래서 관장님의 복싱에 관한 피드백에는 절대복종이다. 말이 그대로 몸이 되기까지 그는 얼마나 혹독하게 연습을 하고 또 했을까. 아니 그의 치열한 복서로서의 삶을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복싱은 나의 그림자를 만나게 해 준다. 심리학자 칼 융(C. G. Jung)은 사람이 마흔이 넘으면 그가 인생 전반부에서 억누르거나 무시해 왔던 자신의 성격의 절반을 만나기 시작한다고 했다. 나는 내 인생 40년 동안을 범생이로 자라 샌님이 되었고 꼰대가 되는 길목에 서 있다. 학폭이 자행되는 교실에서 나는 질끈 눈을 감고 문제집을 풀었다. 주먹 대신 성적으로 저들을 이길 것이라 생각하며 내 비겁함을 합리화했다. 앞을 막는 전경들의 무시무시한 방패가 연이어 이를 물고 있을 때도 쇠 파이프를 들거나 돌을 던지는 것은 애초에 나의 일이 아니었다. 나는 언제나 도망가기 가장 좋은 적당한 뒷줄에 섰다. 군대는 나에게 가장 안 어울리는 사회였다. 어떻게 내가 학군장교로 복무했는지 그 시절을 떠올리면 아직도 아찔하다. 그렇게 내 안의 공격성과 투지는 40년 동안 빛을 보지 못 한 채 나의 내면의 그림자로 남아있었다.

 사각의 링에 올라 나의 그림자를 만난다. 주먹을 뻗고 눈을 뜨고 상대의 주먹을 피하고 맞는 연습을 한다. ‘맞더라도 눈을 뜨고 맞아야 한다. 눈을 감고 있다가 맞으면 더 타격이 크다’ 관장님의 말씀은 내가 평생 간직하고픈 명언이다. 삶의 진실을 회피하려는 거짓 시도에서 온갖 정신질환이 시작된다는 스콧 팩 (Scott Peck) 박사의 말과 일맥상통한다. 그래서 비록 밀리더라도 상대를 뚫어져라 쳐다보려 노력한다. 상대에게 맞는 순간은 아프고 자존심 상하고 무섭다. 도망갈 곳 없는 사각의 링 안에서 내 안의 두려움을 만나고 잠자고 있는 무인(武人)의 기질을 흔들어 깨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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