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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다 Jan 02. 2023

싸움의 기술(3)

복싱으로 배워보는 심리학- 1장: 흥분하지 말 것(3)

1장 흥분하지 말 것 :(3)

#가정폭력상담소에서- 부부싸움을 잘하려면..

여자가 넥타이 와이셔츠 다리며 남편 출근 준비를 할 때는 행복했다. ‘아무렴 남자가 돈을 벌어야지.’ 돈 잘 벌고 성실한 남편이 미더웠고 또 그게 남자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대기업에서 끗발 날리던 시절은 기대만큼 오래가지 못했다. 아이들 학원비가 한창 들어가던 시점에 남자는 덜커덕 명예퇴직을 해버렸다. 면접에 또 면접 그러나 좀처럼 다음 직장을 잡지 못했다. 어찌어찌해서 들어간 중소기업에 비정규직 자리는 도저히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아 몇 달을 못 채우고 나오는 일이 반복되었다. 구직을 하지 않는 날에 남자는 낮부터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그리고 점점 더 술 마시는 날이 늘어갔다.

여자가 취미로 시작한 네일아트는 직업이 되었고 어느 순간 자기 가게를 가진 사장님이 되었다. 혼자 벌이로는 나쁘지 않았지만 대출 이자와 아이들 등록금, 결혼자금을 생각하면 가슴이 턱 막히는 날이 계속되었다. 퇴근하고 집에 돌아와 나뒹구는 술병을 보고 있으면 화가 치밀었다. 

“남자가 돈을 벌어야지!”로 시작된 말은 휘발유에 불을 붙이듯 펑하고 터져서 고함으로 욕설로 폭행으로 온 집안이 산산조각이 났다. 처음엔 어색한 화해로 적당한 무마로 넘어갔으나 폭력은 부부의 삶에 급성 종양처럼 무섭게 자리 잡았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여자는 경찰에 신고를 했다. 



나의 시선을 기준으로 정확히 45도 몸을 틀고 팔짱을 낀 채로 입을 꾹 다물고 있는 남편을 대신해서 여자가 말을 시작했다. 마치 아이를 사이에 두고 엄마와 교사가 면담하는 듯 한 이 장면이 나도 민망하다. 여자의 말은 하나도 틀린 것이 없었다. 앞뒤 정황과 세상 물정과, 남편과 아내의 역할,  부모의 의무 등등 모든 상황에서 올바른 것이 무엇인지, 보통 가정이 어떤 모습인지에 대해 너무나도 정확하게 막힘없이 이야기했다. 빈틈없는 여자의 말은 상처 난 남자의 가슴을 정 조준하여 정밀타격한 후에 확인사살 하기를 반복했다. 


“그러니까 큰 걸 바라는 게 아니에요. 다른 집처럼 남자가 밖에 나가 돈을 벌어야죠. 뭐라도 해야 할 거 아니에요. 제 말이 틀렸어요?”


“네 알겠습니다. 지금 말씀하시면서 어떤 기분 인지도 함께 이야기해 주실 수 있을까요?” 


“그냥 담담해요. 기분 그런 건 없어요. 아니, 내가 지금 날 먹여 살리라는 것도 아니고 이제 나이 들어 번듯한 데는 못 들어가면 아파트 경비라도 해야 할 거 아니에요. 자존심만 내세워서 될 일이냐고요” 


여자는 자신의 마음은 뒤로 숨겨두고 줄기차게 자신의 생각만 늘어놓는다. 그것은 다름 아닌 공격이며 폭력적인 대화이다. 아무리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것처럼 보여도 이런 상황에선 폭력이다. 듣고만 있던 남자가 드디어 입을 연다.


 “그러니까 내가 몇 번을 말했어? 네가 말만 조금 이쁘게 하면 이런 일이 없잖아! 여자가 말이야 말을 가려서 해야지, 여기까지 와서 왜 사람을 자꾸 화나게 해?”


남자는 얼굴이 점점 붉어졌다. 두 주먹을 꽉 쥐고 허벅지 위에 단단히 고정시키고는 가끔씩 팔을 부르르 떨었다. 여자는 하던 말을 멈추고 남자의 시선을 피했다. 테이블 맞은편에 앉아서 남자의 고함소리를 그대로 맞은 나는 등에서 땀이 났고 위가 따끔거렸다. 더 기다렸다가는 대화가 불가능할 것 같아 나는 남자의 말 사이로 끼어들었다.

“화가 많이 나신 것 같네요.” 

“화 안 났습니다. 아니 이 여자가 말을 기분 나쁘게 하잖아요. 말을 좀 이쁘게 하라고 내가 그렇게 이야기했는데 말이야..”


난감한 첫 회기가 끝나고 어렵고 지루한 두 번째 세 번째 회기가 지났다. 부부가 일이 생겨 상담을 나오지 못하는 날이면 나는 중간고사 시험 날짜가 한 주 뒤로 밀린 학생처럼 행복해하며 안도했다. 대화가 안 되는 부부에게 정말 기계적으로 말을 번갈아 가며 시켰다. 부부는 서로의 얼굴 대신 나를 보고 이야기했다. 신랑신부 얼굴을 마주하는 결혼식 주례라면 참 좋았겠다 싶었다. 


“집에서 남편 기 좀 살려주면 어디가 덧나? 누구 덕에 집도 사고 가게 오픈도 했는데?”

“말은 똑바로 해야지. 대출이자 갚고 있는 건 나야. 누가 들으면 다 자기 돈으로 한 줄 알겠어!”


남자의 폭발 직전의 고성, 아내의 신세 한탄과 긴 설명을 동반한 공격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사막 한가운데를 걷는 기분이다. 부부의 말을 듣고 또 들으며 흥분이 가라앉기를 기다린다. 사람은 어떻게든 서로에게 영향을 받는다. 마음을 들으려 주의를 집중하는 나의 애씀이 부부의 마음에도 전달되기를 바라며 기다린다. 처음에 내 시선을 기준으로 45도 틀어져 있던 남자의 몸과 시선은 차차로 나를 바라보기 시작한다. 부부의 고통과 갈등에 별다른 해법을 주지 못 하는 나의 무력함과 안타까움 앞에서 아이러니하게도 부부는 서서히 빗장을 푼다. 우리가 다 같이 실패했고 누가 누구를 가르칠 만큼 잘나지 못했다는 것이 확실해질 즈음이다.  


그리고는 마침내 기적과도 같이 진짜 감정이 나온다. 


‘처음엔 회사가 더럽고 치사해도 아이들 얼굴 떠올리며 참았죠.. 상담사님은 회사생활 해보셨나요? 그거 아무나 못 합니다. 애들 엄마에게 미안하죠... 남편이라고 있는 게 이 모양이니... 저도 어려서 아버지한테 엄청 맞았죠. 어느 날 내가 그러고 있는 모습에 섬뜩하더라고요. 이제 절대로 안 때립니다. 


남편의 미안하다는 말에 여자의 눈에 주르륵 눈물이 흘러내린다. 상담시간 내내 정확하게 옳고 그른 것을 따지며 한 치의 물러섬도 없었는데 같은 사람인가 싶다. 철옹성처럼 쌓아왔던 감정들이 흘러내린다. 분노와 불안 서운함과 억울함이 이제 안도감과 연민으로 함께 흐른다. 


“여보 나도 미안해. 당신 마음 들으니 속이 좀 편안해졌어. 너무 무섭고 힘들고 막막해서 그랬어. 내가 미안

해”  



감당할 수 없는 분노와 흥분을 다스리려면 그것을 내리누르는 것보다 그 감정이 자연스럽게 흐르도록 해야 한다. 참고 참다가는 그 감정은 결국 잔인한 폭력으로, 집요한 복수로 나오게 된다. 막무가내로 내지르려 하는 편도체 안의 감정에 전두엽이 개입한다. 전두엽은 감정을 바라보고 보듬어 하나씩 감정단어로 감싸서 밖으로 내보낸다. 무엇인지 잘 모르는 거대하고 뜨거운 에너지에 화, 억울함, 미움, 서러움 등의 이름을 붙이고 나면 그것은 더 이상 통제 못하는 감정이 아니다. 주체 못 하는 흥분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감정을 표현하고 그것이 상대로부터 받아들여지는 경험을 하고 나면 질적으로 달라진 대화의 기반이 형성된다. 자신의 아픔을 내보이고 상대의 마음을 들을 수 있다. 고통스럽지만 의미 있는 대화가 시작된다. 


물론 눈물과 함께 미안한 감정이 오고 갔다고 해서 다 끝난 것은 아니다. 이제 시작이다. 부부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진정한 부부 싸움의 준비가 된 것이다. 의견을 조율하고 역할을 조정하고 해결책을 모색하는 동안 다시 갈등하고 힘겨워할 것이다. 그러나 그 전과 같이 흥분해서 힘 조절을 못 해 문제를 키우는 싸움이 아닌 문제를 해결하는 싸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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