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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미작가 Aug 18. 2020

바이러스는 아닙니다만,

바이러스는 생물과 무생물의 경계에 있는 전염성 물질이다. 바이러스는 증식할 수 있으며, 유전물질을 갖는 생물의 특성이 있지만, 그 증식이 전적으로 숙주세포에 의존하므로 숙주세포 밖에서는 무생물이라고 할 수 있다. 폴리오바이러스 분야의 석학인 위머(Wimmer) 박사는 한 강연에서 "바이러스는 생물인가 또는 무생물인가?"라는 질문에 "네"라고 대답하기도 했다고.




군대에 있을 때 나는 바이러스 같았다. 전적으로 군인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해서 여자도 아니었다. 훈련을 받을 때에는 남군들의 체력 수준을 하향화시키는 주범이 되었고, 생리통으로 훈련에서 뒤처지거나 열외 하면 '여자 같이 구는' 군인이 되었다. 중대 라운지에 모두가 집합해 있는 상태에서 '여군들이 군대 수준을 떨어뜨린다고 생각하느냐'는 설문조사를 거수로 진행하는 것만 해도 상처인데, 손을 든 남군들이 절반을 넘었다는 사실이 나를 고개 숙이게 했다. 체력이나 훈련 강도가 남군과 똑같지 않음을 면전에 대놓고 비난하는 동기들에게 '너희는 누나, 동생도 없느냐, 우리는 군인이기 이전에 여자'라고 항변해봤자, '내 동생은 그래서 군대에 안 왔지.'라는 대답이 돌아올 뿐이었다.


잘 웃으면 군인답지 못하다고, 웃지 않으면 분위기 못 맞춘다고 했다. 생리 때문에 훈련에 제대로 참가하지 못할까 봐 피임약을 먹었고, 가짜로 생리 휴가를 신청하는 것이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생리 주기 때마다 여훈련관 방 앞에 붙여진 일지에 기록해야 했다. 훈련장에 여자 화장실이 없어서 사용 시간을 정해서 써야 할 때면 남군들의 화장실 사용마저 불편하게 한다며 눈총을 받았고 새로 지어진 깨끗한 여자 화장실이 있는 훈련장에 가면 '화장실마저 역차별'이라는 불만을 받아내야 했다.


안다. 여군 중에 생리 휴가를 악용하는 사람도 있고, 남군 중에 여군의 모래주머니를 대신 들어주는 사람도 있다. 여군 때문에 체력적으로 훈련이 널널한 남군도 있고 뒤처져서 욕먹더라도 남군과 뛰고 싶다는 여군도 있다. 여군을 전방 배치하라는 지침이 떨어지면 그 숫자만큼의 남군들의 보직 관리가 꼬이고, 전방의 여군이 임신하게 되면 그 공백을 채워야 하는 사람은 정식 인사발령 시스템에서 애매한 포지션이 되기도 한다. 부대에 여군 시설을 만들려면 그만큼의 남군 시설이 없어지거나 하다 못해 그 작업에 남군들이 동원된다는 것도 안다, 알다 마다.


굳이 이 조직의 시스템과 구조, 효율성과 평등 문제까지 가지 않더라도 나는 늘 아래의 생각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다.


나는 이 조직에 민폐인가.

내가 통솔하는 이 많은 남군들 역시 돌아서면 내가 여자라는 이유로 나를 얕잡아볼까.


때로는 진솔한 위로와 지지를 받으면서도 나는 내 안의 의심과 부적응을 떨쳐내기가, 군 복무 마지막 날까지도 괴롭도록 어려웠다.

 



하고 싶은 공부를 찾아 퇴역을 결심한 후, 나는 아주 오랜만에 홀가분함을 느꼈다. 오래도록 꿈꾼 분야였다. 생명공학. 아빠의 반대와 엄마의 침묵, 나의 두려움이 빗어낸 나의 오랜 꿈이었다.  대학원 전공과는 전혀 다른 학부 전공 덕에, 대학원 수업과 학부 수업을 병행하겠다는 약속을 걸고 간신히 합격 문턱을 넘었다.


교수님과 상의 끝에 '바이러스 연구'로 실험실을 정하고 연구 주제를 잡았다. 실험실 식구들을 따듯했고 내 머릿속에는 배움의 열기가 가득했다. '이제 나만 잘하면 된다. 내 연구 결과로만 나를 평가받을 수 있어.'라는 생각에 더없이 가볍기도 했다.


하지만 이내 부적응의 시그널이  다시 울렸다. 시그널의 출처는 교수님도, 실험실 식구들도, 대학원 동기도 아니었다. 바로 나였다. 학부 수업 때는 청강하는 대학원생, 대학원 수업 때는 학부 지식이 없는 학생이라고 스스로를 평가하며 주눅 들었다. 나는 '지식이나 경험이 학부생보다도 적은 대학원생'이라는 스스로의 허들에 번번이 걸렸고, 넘어지지 않기 위해 쉬운 연산 하나, 간단한 실험 하나에도 공을 들였다. 그러면서도 나의 불안을 들키지 않으려 애썼다. '어디에도 완벽하게 속하지 않는, 경계에 있는 사람'이라는 불안. 나의 연구 주제처럼, 바이러스와 닮은.




취업을 해서도 내가 붙인, 나만 볼 수 있는 꼬리표는 반복되는 일상 같은 업무조차 몇 번이고 검산과 검토를 반복해야만 마음이 놓이게 했다.


결혼을 해서도 비슷했다. 가족이 되었지만 진짜 가족은 아닌 시댁과 가족이었지만 '출가외인'이 되어 만나는 친정은 나를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게 했다.

이 와중에 9년의 난임 생활에 종지부를 찍으며 출산을 하고 육아휴직이 시작되었다. 완벽하고 완전한 엄마로 존재하고 싶으면서도, 아이만 보고 살림만 하다가 내 인생이 이대로 끝날 것 같은 불안함에 가슴 한편이 눅눅해지는 하루가 매일같이 이어지고 있다.


당연하면서도 외로운 찰나의 감정들을 굳이 다 풀어내지 않더라도 나의 '소속되지 않음'을 뒷받침할 만한 일들은 차고 넘친다.


나는 어딘가에 완전하게 소속될 수 있을까.

그럴 수 있다면 이 지독한 불안을 끝낼 수 있을까.

아니 애초에 어딘가에 꼭 소속될 필요가 있을까.


위머 박사가 '네'라고 대답한, '바이러스는 생물인가 무생물인가?'라는 질문에서 답을 찾아본다. 어디에도 완전히 속할 수 없다면, 어디에도 속할 수 있다는 우문현답 말이다. 또, 바이러스가 생물과 무생물의 경계에 있으면 어떠하랴. 이미 그 자체만으로도 독자적인 것을.


우주보다도 넓은 경계에 존재하는 바이러스처럼, 매 순간 얄팍한 경계선 위에 있다 믿었던 내 인생도 이미 충분히 넓고 깊음을 알아차린다. 복직 후를 대비해 틈틈이 공부를 하면서도, 그 시간에 놓치는 아이들의 눈을 아쉬워하는 이중잣대를  거두어 본다. 이도 저도 아니게 이 따위로 해서는 어디에도 온전히 속할 수 없다고 스스로에게 날 선 채찍질을 하는 대신, 어디에도 속할 수 있는 공통분모가 있는 사람이 되어 가고 있음을 보듬어도 본다. 나는 그 어디에도 온전히 속해 있지 않지만, 여전히 엄마이고 딸이고 며느리이고 연구원이고 회사원이며 무엇보다도 나 자체임을  수용한다. 이 자체만으로도 독자적이고 충분한, 소속의 향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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