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지 않은 시작

by 희망


길고도 긴 여정이 끝나던 그날 밤, 책상 위엔 낡은 교과서 대신 텅 빈 공백만이 놓여 있었다. 드디어, 끝이었다. 바라던 대로였다.
그런데 왜일까. 가슴 한켠이 공허했다.
이제 무엇을 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나는 그저, 어른들의 기대에 매달려 달려왔을 뿐이다.
진짜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은 오래전 책장 속 구석에, 먼지를 뒤집어쓴 채 숨겨 두었었다.

꺼내 보려 했지만 손끝에 닿은 그것은 낯설었다. 너무 많은 시간이 흘러, 그 소망은 빛을 잃고 있었다.

가족은 "이제부터 시작이야"라며 축하를 건넸고, 학원 선생님은 등을 토닥였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나는 알 수 없는 공허에 삼켜지고 있었다.
무언가를 지우듯, 나는 조심스레 그때 묻은 꿈을 닦았다. 정성스럽게, 아주 천천히.
그러나 그건 오래전에 그 빛을 잃어버린 듯 보였다.
그때 조금 더 붙잡았더라면, 지금처럼 모든 걸 이루었어도 허탈하진 않았을 텐데.

아침 6시. 매일같이 그 시간에 일어나 등교를 했다.
8시에 도착한 교실엔 나와 같은 얼굴들이 가득했다.
순수했지만, 하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그것들과 단절된 아이들.
괜찮다고 생각했다. 모두가 그러하니까.
괜찮은 줄 알았다. 정말.

학교가 끝나 집에 돌아오면, 엄마는 늘 내 방에 있었다.
처음엔 이상했다. 곧 알게 되었다.
널브러진 책들. 아 또 공부했는지 확인하러 오신 거구나.

엄마는 오래전부터 나에게 ‘공부’라는 족쇄를 채워주셨다.
나는 그게 싫었다. 내가 원하는 건 미술이었다.
하지만 어른들은 말했다. “취미로 하렴.”
“공부 잘해야 성공하는 거야.”
그래서, 나는 내가 가고 싶은 길을 접었다.
심지어 친구조차, 엄마가 고른 아이들과 친해져야 했다.

소영이, 진영이.
“소영이는 벌써 논술 첨삭을 받는다더라.”
“진영이는 학원을 다섯 군데나 다닌대. 너는 왜 안 하겠다는 거야?”
그 말들이 싫었다.
아니, 그 애들이 싫었다.
잘못은 없었지만, 나와 비교당하는 그 존재들이 싫었다.
그래서 멀리했다.
소영이와는, 같은 반이면서도 한 번도 진심을 나눈 적이 없었다.

수능이 끝난 날, 교실은 텅 비어 있었다.
나는 홀로 창밖을 바라보다가, 느닷없이 다가온 그림자를 느꼈다.

“너, 그림 좋아했었지?”

소영이었다. 한 손에 스케치북을 들고 있었다.
“체육 시간에, 네가 그린 거 봤었어. 좋았어. 네 표정도, 그 그림도.”

그 순간, 잊고 있던 무언가가 조금씩 깨어나는 듯했다.
스케치북을 펼치자, 익숙한 선들이 나타났다.
예전에 전시되었던 내 그림을 보고 따라 그렸다는 소영.
“이건, 네가 내게 남긴 거야. 나도 언젠간 저렇게 그리고 싶다고 생각하게 만든 거.”

입술을 깨물었다.
기억조차 흐릿한 그 그림이 누군가의 마음에 남아 있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그날 우리는 처음으로 서로의 이야기를 들었다.
진학, 부모님, 소망, 잃어버린 시간들.
비교의 대상이 아닌, 한 명의 평범한 십 대로서.

그리고 그날 밤, 나는 조심스레, 오래 묻어두었던 꿈을 꺼냈다.
아직 완전히 빛을 잃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다시 연필을 들었다. 손은 떨렸지만, 떨림 속에 살아 있는 내가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문득 익숙한 발걸음.
“너 뭐 해? 아직도 그림이니?”
엄마였다.
“지금은 토익 공부할 시기지. 자격증도 따야지.”
익숙한 말.
하지만 그날, 나는 입을 열었다.

“공부 끝나고 하라고 하셨잖아요.”
“그래도 인생은 배움의 연속이야.”
“저도 배울 거예요. 제 방식대로. 지금 그리고 싶어요. 하고 싶어요.”

엄마의 얼굴이 굳었다.
나도 무서웠다.
하지만 말은, 이미 쏟아졌다.
“엄마가 정해준 그 길, 무서워요.
내가 주인공이 아닌 길 같아요.
이제는, 내가 진짜 가고 싶은 길로 가보고 싶어요.”

정적.
엄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나는 다시 연필을 들었다.
연필심은 종이 위를 조심스레 미끄러졌다.

빛을 잃었다고 생각했던 소망이,
실은 계속 숨 쉬고 있었다는 걸 나는 이제 조금 알 것 같았다.


시간이 흐르고, 나는 결국 명문대에 진학했다. 그리고, 휴학했다.
그림을 배우고 싶다고 말했다.
엄마는 처음엔 반대했지만,
점점 날 놓아주셨다. 아니, 놓을 수밖에 없었다.

학원 선생님은 내게 말했다.
“오 재능이 있는데요? 아쉽다. 좀 더 예전부터 배우셨으면 엄청 잘하셨을 건데. 뭐 지금도 좋아요.”
그게 영업 멘트여도 좋았다.
무엇보다도, 이제는 내가 원하는 길을 가고 있다는 것이 중요했다.

남들이 열심히 뛸 때 난 출발선으로 돌아가는 기분이 들었지만,
세상은 그렇게 많이 달라지지 않았다.
달라진 건, 나를 바라보는 일부의 시선뿐.
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다.
내 인생이니까. 내 여정이니까

현재 운영하던 그림 블로그는 서서히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고,
전시회를 열어달라는 댓글이 남겨졌다.
소영이와 함께 우리는 작은 전시회를 준비했다.

“엄마, 전시회 보러 오실래요?”
“뭐?”
“가끔은 제가 어떻게 사는지 봐주시길 바랐어요.”
“… 시간 나면 갈게.”

전시회 날,
사람들의 반짝이는 눈동자 속에서,
나는 내가 원하던 것을 보았다.

나도 그 눈동자를 통해 처음으로 무엇과도 비교가 되지 않을 엄청난 감정을 느꼈다.

그리고 누군가의 아이가 말했다.
“그림 그리고 싶어요. 근데 공부가 우선이잖아요.”

그 순간, 나는 무의식적으로 말했다.

“그건 아니야.
다른 사람이 정해준 우선순위라면, 그건 네 것이 아니야.
네가 직접 정해야 해.”

그 말은 아이의 귀에 닿았고,
그 아이는 엄마를 바라보았다.
“그래, 천천히 생각해 보자.”
엄마가 말했다.

그 장면에, 나는 울컥했다.
늦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누군가에게 닿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전시회가 끝날 무렵,
엄마가 내게 다가왔다.
“사람이 많더라.”
“응.”
“다 너 그림 보러 온 거야?”
“응.”
엄마는 그림을 바라보며 말했다.

“잘했어. 우리 딸.”

짧은 말.
하지만 그 안에, 내가 오랜 시간 바랐던 무게가 있었다.
처음으로, 내가 만든 무언가로 인정받은 순간이었다.

그날 밤, 나는 오래된 노트를 펼쳤다.
몇 년 전, 손끝으로 적어둔 문장들이 있었다.
‘그림으로 사람을 위로하고 싶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나를 채우고 싶다.’

이제, 그 말들을 다시 꺼낼 시간이다.

나는 새 노트의 첫 장에 적었다.

‘그리고, 나는 살아간다.’

누가 뭐라 해도,
나는
내가 그리고 싶은 삶을 살아갈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느릿하게, 다르게 살아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