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 영웅 사명대사 이야기 곳곳에 남아
밀양 재약산 기슭에 위치한 표충사(表忠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5교구 본사인 통도사(通度寺)의 말사이다. 표충사는 유생들을 교육하고 성현들을 제사 지내는 곳으로 사찰 안에 불교와 유교가 한자리에 공존하는 특이한 모습을 보여주는 사찰이다. 신라 무열왕 원년(654년)에 원효대사가 창건하여 죽림사(竹林寺)라 한 것을, 신라 흥덕왕 때부터 영정사(靈井寺)라 하였다. 이후 1839년(현종5)에는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일으켜 국난을 극복한 서산대사, 사명대사, 기허대사를 모신 표충사당(表忠祠堂)을 이곳으로 옮기며 절 이름도 표충사(表忠寺)로 바뀌었다.
표충사는 신라 때는 보우국사가, 고려시대 때는 해린국사가 이곳에 머물렀다고 하며, 특히 삼국유사의 저자인 일연스님이 이곳에서 '삼국유사'를 탈고하였다는 설도 전해진다. 원래의 표충사는 밀양시 영축산에 백하암(白霞庵)에 있지만, 조선 헌종 5년(1839)에 백하암에 있던 사명대사의 사당(祠堂)을 이곳에 옮기면서 표충사라 하였는데, 표충사(表忠祀)와 표충서원(表忠書院)을 수호하던 곳으로 이 사당을 절에서 관리하면서 사(祠)자가 사(寺)로 바뀌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표충사는 예로부터 이름 있는 고승대덕들이 머물렀던 곳으로 이에 따른 각종 전설도 많이 구전되고 있고, 특히 사명대사에 관한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 임진왜란 승병장
사명대사의 본명은 임응규(任應奎)로 경상남도 밀양군 무안면에서 임수성(任守成)의 아들로 태어났다. 15세 때 부모를 여의고, 1560년 17세 되는 해에 김천 직지사 신묵화상을 은사로 출가하였다. 18세에 선과에 급제한 뒤, 금강산에서 서산대사를 만나 그의 제자가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정으로부터 '선교양종 팔도도총섭'에 임명되어 전국의 호국 승병을 지휘했으며, 1610년 8월 26일, 합천 해인사 홍제암에서 열반에 들었다고 전해진다.
# 서산대사와 도술 대결 …스승과 제자 연 맺어
사명대사(유정)는 평소 조선에서는 자기가 가장 도술이 뛰어난 사람으로 알고 있었다. 어느 날 한 저잣거리 지나가다가 금강산 백화암에 휴정 서산대사가 자신보다 도술이 더 뛰어나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고, 곧장 금강산으로 휴정을 만나러 가게 되었다.
하루는 서산대사가 금강산 백화암에서 천기(天氣)를 보니 사흘 뒤 유정이라는 사람이 자기를 만나러 삿갓을 쓰고, 큰 지팡이를 짚고, 개울물을 타고 거슬러 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시간은 흘러 사명당이 백화암에 도착하는 날 아침이 되었다. 서산대사는 상좌를 시켜 백화암 언저리 갈림길에 마중을 나가게 했다. 아울러 사명당이라는 스님이 나를 만나러 오고 있으니 공손하게 스님을 맞이하라는 지시를 하였다.
상좌는 대사가 시키는 대로 조금 일찍이 마중을 나와 갈림길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어떤 사람이 삿갓을 쓰고, 큰 지팡이를 짚은 채 좋은 길은 내버려두고, 개울을 따라 걸어올라 오고 있는데 사명당이 한 걸음을 걸을 때마다 개울물이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었다. 깜짝 놀란 상좌는 "사명대사님이 아니 십니까?"하고 물었다. 유정이 어떻게 알았냐고 반문하자, 상좌승은 우리 대사님께서 대사님이 오고 계시니 극진히 모셔오라는 분부를 받고 기다리고 있었다고 이야기를 했다.
사명당은 내심 서산대사가 보통 스님이 아니라는 것을 짐작하고 백화암 암자에 도착했다. 마침 기다리고 있던 서산대사가 버선발로 뛰쳐나와 사명대사를 반갑게 맞이하였다. 서산대사가 인사를 건넨 뒤 법당 안으로 들어가자고 하였고, 두 사람은 대웅전 계단에 올라서는 도중 갑자기 사명대사가 서산대사에게 "대사님 내가 이 돌계단을 올라가겠습니까? 내려가겠습니까?"하는 것이었다. 순간 서산대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법당 안으로 들어가서 좌중 하였다. 마침 점심 공양 때가 되었다. 서산대사가 하는 말이 대사님! 마침 점심 공양 때가 되었고, 시장하실 텐데, 우리 절에는 바늘국수가 별미라서 국수나 한 그릇 하면서 서로 담소를 나누시지요 하자 사명당도 허허 그럽시다 하였다. 서산대사가 도술을 부리자 큰 사발에 바늘국수가 먹음직스럽게 놓여졌다. 서산대사가 먼저 국수를 맛있게 먹자. 사명당도 국수를 다 먹었으나 입 안쪽이 약간의 상처가 있음을 직감하게 되었다.
그러자 사명당이 "대사님 점심공양도 하였으니 우리 서로 달걀 쌓기 내기를 하는 게 어떻겠냐고 제의 하였다. 서산대사가 그러자고 하자 사명당은 커다란 바구니에 수많은 달걀을 모우더니 하늘로 향하여 일직선으로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달걀을 쌓아 올리는 것이었다. 사명당이 서산대사의 차례라고 알려주자 서산대사는 하늘에서 달걀을 쌓아서 내려왔다. 이를 본 사명당은 깜짝 놀라 무릎을 꿇고 자신이 경솔함을 용서하고, 제자로 받아줄 것을 청하였고, 그 후 사명당은 서산대사의 제자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이곳 주민들에 의하여 구전되어 내려오고 있다.
#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담판
사명대사는 임진왜란이 끝난 후, 1604년(선조 37년)에 강화 회담을 위해 파견할 적임자로 선정된다. 그는 국왕(선조)의 친서를 휴대하고 부산(동래)를 출발하여 대마도를 거쳐 시모노세키와 오사카(에도)를 지나 당시 일본의 권력자였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만나 강화를 맺으며 시 문답을 나눴다는 한시를 우리 옛돌 박물관에서 감상할 수 있다. (우리 옛돌박물관은 서울특별시 성북구 대사관로 13길 66(성북동)에 있는 박물관으로 국내외로 흩어져있던 한국석조유물을 한자리에 모아 건립한 세계에서 하나밖에 없는 석조전문박물관이다.)
현재 우리 옛돌박물관에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사명대사가 주고받은 한시(漢詩)를 감상할 수 있다. 이 시문답은 당시 두 나라의 정치적 긴장감과 지혜의 대결을 보여주는 귀중한 기록으로 전해진다.
먼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사명당을 향해
石上難生草(석상난생초)/ 돌에는 풀이 나기 어렵고
房中難起雲(방중난기운) / 방안에는 구름이 일어나기 어렵거늘
汝爾何山鳥(여이하산조) / 너는 도대체 어느 산에 사는 새이기에
來參鳳凰群(래참봉황군) / 여기 봉황의 무리 속에 끼어들었는가
이에야스는 자신과 일본을 봉황(鳳凰)에 비유하며, 사명대사와 조선을 닭(鷄)으로 낮춰 비하한 내용이었다.
그러나 사명대사는 이에 굴하지 않고, 다음과 같은 시로 응수했다.
我本靑山鶴(아본청산학)/ 나는 본래 청산에 노니는 학이러니
常遊五色雲(상유오색운)/ 늘 오색구름을 타고 노닐었니라
一朝雲霧盡(일조운무진) / 어느 날 아침 갑자기 오색구름이 사라지는 바람에
誤落野鷄群(오락야계군) / 잘못하여 여기 닭 무리 속에 떨어졌노라
도쿠가와 당신과 일본이야말로 천한 닭의 무리라고 회답하여 상대의 기를 꺾어버린 유명한 시이다. 이 시로 인하여 조선인 포로 3,000여명과 약탈해간 문화재를 환수하여 돌아오고 향후 250여년간 평화 수교 협약을 맺었다.
그 공으로 가의대부 행양위대호군에 제수 되었고, 선조는 대사를 영의정 직책을 제수하였으나 삼일만에 영의정을 사임한 일화로 현재까지도 삼일 정승으로 남아있다.
# 아직도 돌 구덩이 흔적 남아
사명대사가 서산대사의 제자가 된 후 표충사에 기거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국 방방곡곡에 퍼졌다. 그의 명성을 들은 많은 스님과 신도들이 법문을 듣기 위해 표충사로 몰려들어 절은 연일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신도들의 발길이 뚝 끊기기 시작했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스님이 마을로 내려가 사람들에게 왜 절에 기도 하러 오지 않는지 물었다. 마을 사람들은 따르면 절에만 갔다오면 온몸에 지네에게 물려 많은 고통을 받았다. 하물며 부처님 전에 공양을 올리기 위하여 메고 간 망태기에도 지네가 나와 혼비백산을 하였다는 등 원성이 쏟아졌다.
이런 말을 전해들은 스님은 곧장 절로 돌아와서 지네가 있다는 법당을 둘러보았다. 과연 마을 사람들이 말하는 대로 지네가 법당 어두운 구석구석에 떼거리로 우글거리고 있었다. 하물며 부처님이 좌중하고 있는 불단(佛壇), 닷집(唐家), 공양간에도 많은 지네가 득실대고 있었다. 스님은 빗자루 등을 이용하여 지네를 없애보려 했지만, 순식간에 몰려드는 지네 떼들에 의해 도망쳐 나오다시피 했다. 그래서 절에는 아무도 기거할 수 없을 정도로 폐허가 되기 시작하였다.
세월이 흘러 금강산에서 안거를 마친 사명대사가 표충사로 돌아오자, 이러한 사실을 전해 듣게 되었다. 사명대사는 행자승을 시켜 필봉아래 양지바른 곳에 행자들의 키 높이만큼 되는 돌 구덩이를 파 놓고 오라고 했다.
대사는 지네가 우글거리는 대웅전에 좌정하시더니 무언가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순간 회오리바람이 일어나기 시작했고, 삽시간에 절 안팎에 있던 지네들이 회오리바람 속으로 빨려 들어 가더니 흙먼지와 함께 행자승이 파놓은 돌 구덩이 속으로 날아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런 후 표충사에서는 지네의 흔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이러한 전설을 뒷받침이라 하는 듯 표충사에서 빤히 올려다보이는 필봉 언저리에는 지금도 지네무덤(깊이 2m 정도, 둘레 3~4m정도)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진희영 산악인·기행작가
※참고문헌
※이야기는 필자가 20여년 전 단장면 마을 한 노인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작성한 글임.
*밀양읍지
*향토문화전자대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