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산뜻한 기분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요
글쓰기는 일평생 도피 수단이었습니다. 주변 분위기를 잘 타고, 타인의 기분에 잘 동요되는 탓에 자주 불안과 외로움을 느꼈어요. 그럴 때마다 글을 썼습니다. 공부 외에 관심을 두고 있던 건 글뿐이라, 교대를 가길 바랐던 아버지를 배신하겠답시고 문예창작학과에 지원했어요. 저에겐 최선의 반항이었습니다. 지금도 그 반항이 귀엽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계기로 글도 어느 정도 쓰던 아이에서 글을 잘 써야만 하는 어른이 되어야 하는 대가를 치러야 했으니까요.
내가 쓰는 글이 널리 알려져서 인생이 바뀌었으면 좋겠다고 택도 없던 기대를 걸 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써도 써도 인생은 바뀌지 않았어요. 오히려 제가 못 쓴다는 걸 확인받고 좌절하는 시간만 길어졌죠. 글 때문에 내가 불행해진 건가? 탓했던 적도 있었어요. 돌이켜보면 우스운 생각이었습니다. 뭘 제대로 많이 써본 적도 없으면서, 진검승부하겠다고 호기롭게 굴다가도 칼집에서 칼날 한 5cm 빼내고 말았으면서 말이에요. 어떻게 보면 진심으로 맞닥뜨리고 싶지 않았던 마음일지도 모르겠어요. 싸우지 않으면 지지 않을 수 있으니까요.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하고 저의 무기는 돈 들인 만큼 당연하게도 글이 되었습니다. 온라인이었지만 바이라인에 기자라고 이름 석 자 올려보기도 하고, 지금은 몇 년째 에디터로 일하고 있어요. 경력 기간은 길어만 가는데 밥벌이해주는 글 앞에서 점점 떳떳하지 못한 기분이 들더라고요. 더 이상 도망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작년 7월 공모전에 시놉시스를 냈고 고작 5천 자 원고를 가지고 있던 소설이 당선되었습니다. 6개월 만에 부랴부랴 14만 자를 썼고, 퇴고하면서 3만 자를 지웠습니다. 하루에 4시간 정도 자면서 썼던 것 같아요. 그맘때 회사 일이 바빠 야근도 많았는데 퇴근하고 쉴 새도 없이 소설을 썼습니다. 출근해야 하니까 네 시간 수면 시간은 무조건 지켰어요. 회사에서도 글을 써야 했고 퇴근하고도 글을 쓰고, 쓰고 또 쓰고. 잠이 워낙 많아서 주말에 막 열네 시간씩 몰아자도 피로는 쌓여만 갔습니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나 싶었지만 완성되어가는 원고를 보면서 고생을 잊었습니다. 마감 기한이 가까워지면서 휴가 내고 밤을 새웠어요. 질질 짜면서 이런 일을 벌인 스스로를 원망했지만 결국 책은 나왔습니다.
첫 소설(멸망의 감정 바로가기) 덕분에 저는 제가 글을 쓰는 일을 사랑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너무 오래 글 쓰기를 미워했거든요. 아니, 미워하는 척했어요. 너무 사랑하는데 이 정도밖에 쓰지 못하면 누군가에게 손가락질당할까 봐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고슴도치도 내 새끼는 함함하다고 한다는데, 저는 제 글을 아끼면서도 잘 되길 바란다는 이유로 맨날 회초리질 하고 훈계만 하는 무뚝뚝한 경상도 아버지처럼 굴었습니다. 누가 저더러 글 잘 쓴다고 하면 '전공이니까!'라고 자동응답기처럼 대답했는데요. 이 소설을 쓸 당시 어떤 분이 제가 소설에 대해 설명하자 대뜸 "글 쓰는 걸 좋아하시는 것 같아요"라는 말에는 선뜻 아무 반응도 못했어요. 어떤 얘기를 하던 상황인지는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고, 대단하고 현란한 말이 아니었는데도 계속 마음에 남았습니다. 정말 글을 좋아하나? 되묻다가 생각보다 쉽게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손유빈은 글쓰기를 좋아한다. 돌이켜보니 이 한 문장을 인정하기 꽤나 오랜 시간과 많은 활자들이 필요했더라고요.
이곳을 통해서 제가 얼마나 글쓰기를 좋아하는지 전하고 싶습니다. 어떻게 글을 좋아하게 됐는지, 어떤 글을 좋아하고 또 앞으로 쓰고 싶은지 눈치도 보지 않고, 더 이상 미워하는 척도 하지 않고, '뭐 저런 글을 다 쓴대' 소리를 듣더라도 쓰고 싶습니다. 제가 얼마나 글을 좋아하는지 궁금하신가요? 그렇다면 종종 이곳에서 함께 해주세요. 이제부터는 산뜻한 기분으로 진검승부(!) 시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