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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빈집 May 09. 2024

안 좋은 예감

떠나가는 사람들


안 좋은 예감은 틀리지 않는 편이다.

아니, 좋은 예감보단 안 좋은 예감을 더 많이 기억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집정리를 하느라 바쁜 와중, 전화벨이 울려왔다.

얼핏 어깨너머로 보니 박사친구(그녀가 박사학위를 딴 후부터 난 그녀를 그렇게 부르곤 한다.)였다.

우린 중학교 때부터 꽤 오랫동안 서로의 많은 것을 나누는 사이였지만, 언제부턴가 각자삶이 바빠지면서 연락이 뜸해지게 되었다.

하던 일에서 손을 떼지 못하면서 이내 전화가 끊어져 버렸다.

'이따가 연락해 봐야지...' 하고는 일에 전념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일을 하는 내내 그녀의 전화가 신경 쓰였다.

머릿속에 갖가지 생각이 오고 가더니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오랫동안 편찮으셨던 그녀의 부모님이 생각난 것이었다.


밤이 깊어질 무렵, 불길한 느낌을 뒤로하고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그녀에게 연락을 취했다.

그녀의 아버님께서 작고(作故)하셨다는 소식.

아니길 바랐지만... 나 스스로가 비겁하단 생각이 들었다. 믿고 싶지 않아서 뒤로 미룬 것이었다.

무슨 변명이 필요할까. 부끄러웠다.


그리고 그날 밤, 아주 오랜만에 기도를 드렸다.

친구를 위해, 그리고 그분을 위해...




나의 비겁함은 한 동창의 죽음에서부터 시작되었던 것 같다.

난 그를 M이라고 불렀다. 그냥 이름에서 풍기는 느낌으로 별명을 붙인 것이었다.

오랫동안 박사친구를 짝사랑해 온 M은 박사친구 대신 나와 친하게 지냈다. 아마도 내 주변에 머물다 보면 그녀와의 연결고리가 생기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 같다. 결국 그 둘 사이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말이다.


M과 나는 온라인상으로 밤마다 게임을 하며 돈독한 우정(?)을 다졌다.

오프라인으로는 자주 볼 일이 없었지만 그는 정말 격 없는 찐 친구 같았다.

오랜만에 만나도 어제 만난 것 같은 친구.

'1+1은 뭐야?'라고 물어봐도 그냥 아무런 핀잔 없어 '2'라고 해주는 친구.

'나 물건 하나 사려는데 추천해 줘 바'하면 굳이 많은 설명을 안 해줘도 내게 딱 맞는 물건을 추천해 주는 친구.

뜬금없이 놀이동산에 가고 싶을 때 함께 해주었던 친구.

어쩌다 IT 쪽에서 일을 하게 된 내가 사고를 쳐서 서버를 날려 먹었을 때도, 프로그램을 잘 못써서 헤매고 있을 때도, 그는 항상 큰 도움을 주는 친구였다.


세월이 흐르면서 게임도 시들해지고 연락도 안 하게 되자, 우리에겐 연중행사가 하나 생기게 되었다.

일 년에 한 번, 서로의 생일을 축하해 주는 것!

만나진 못했지만 생일날이 되면 서로 비슷한 가격대의 선물을 나누는 것이었다.


그날도 그의 생일 즈음이었다.

난 여느 해와 같이 온라인으로 선물을 보내고 그가 받기를 기다렸다.

하루, 이틀, 사흘... 몇 주가 지나도 그의 소식이 들리지 않았다.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이럴 아이가 아닌데...'

그는 해외출장을 가더라도 절대로 통신을 끊는 일은 없었다. 더군다나 선물을 놓칠 리가...!

불길한 예감에 어떠한 확신이 들기 시작하면서 몇 주를 더 미뤘다.


'이제 때가 됐어...'라고 생각한 나는 비장한 마음으로 컴퓨터 앞에 앉았다.

그러고 보니 내가 그에 대해 아는 것은 핸드폰 번호밖에 없었다. '그를 어디서 어떻게 찾는담...'

고민하다 보니 그가 예전에 한 카페에서 활동했던 게 생각났다.

게시판을 뒤지고 뒤졌더니 눈에 띄는 한 게시물 - '소천(召天)하셨습니다.'

이름이 매치한다!

하지만 난 믿을 수가 없었다. '동명이인이겠지...'

이번엔 SNS를 통해 그의 지인들을 다 뒤지기 시작했다.

그의 가족으로 보이는 사람의 게시글에도 비슷한 내용이 감지되었다.

계속 파면 팔수록 진실의 늪은 나를 깊게 끌어당길 뿐이었다.

결국 용기를 내어 그의 지인 한 명에게 쪽지를 보내 물어보았다.


그의 사망소식이 확실해졌다.

게다가 극단적 선택이라니...! 내가 아는 그는 절대로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내가... 그를 너무 몰랐던 건 아닐까.

'요즘 어떠니...' 안부 한 번 물어봐 줬으면 달라졌을까.

생각보다 타격감이 컸다. 한동안 내겐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이 흘러내리곤 했다.

아직도 내 핸드폰엔 그 아이가 이렇게 버젓이 살아 있는데...

대부분의 마지막이 그렇겠지만, 인사 한 마디 건네지 못한 것이 이내 한이 되었다.


M, 네가 좋아할 만한 걸그룹이 나왔어.

M, 네가 좋아할 만한 영화가 나왔어.

M, 네가 좋아할 만한 카메라가 나왔어.


그곳은 어떠니, 거기선 행복하니.


나, 직장을 또 옮겼어.

나, 사진이 많이 늘었어.

나, 새로운 맛집을 발견했어.


우리가 나이가 들면 어떤 현상들이 나타나는지 아니?!


허공에 울리는 메아리란 게 이런 것일까...

M, 너무 늦어서 미안해......

이 많은 것들을 너와 함께 나눴으면 좋겠다......

보고 싶다, 친구야.




어느 날 멀리서 대학동기 R이 놀러 왔다. 졸업 이후 십여 년 만이었다.

너무 오랜만이라 처음엔 조금 어색했지만 이내 우린 예전처럼 웃고 떠들고 있었다.

학교 이야기가 나오자, R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졌다.

R이 내게 물었다. '너 기억하니? 우리 어카운팅 가르치던 교수님 말이야.'

'물론 기억하지!' 대답했다. 셈에 유난히 약했던 나는 어카운팅 과목을 정말 싫어했지만, 커다란 풍채에 너그러운 표정을 지닌 그분은 잊을 수가 없었다.

R이 말했다. '그 교수님 얼마 전에 돌아가셨어.'

'뭐?! 아니 왜? 어디 편찮으셨어?'

R은 학교 졸업 후에도 꾸준히 그 교수님과 연락하고 지내고 있었나 보다. 하지만 모두가 그렇듯이 사는 게 바빠지면서 교류가 뜸해진 듯...

R의 설명에 따르면 교수님과 얼굴 좀 보자고 연락한 뒤, 약속이 차일피일 미뤄지는 중에 갑자기 돌아가셨다는 것이었다.

R은 눈빛을 흐리며 말을 이어 나갔다. '그때 만나자고 했을 때 그냥 바로 만났어야 했는데...'

그렇다!

사람의 끝은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냥 보고 싶을 때 만나야 한다. 그 어떤 일보다도 가장 소중한 일이 될 수 있다.

그제서야 R이 왜 갑자기 날 찾아왔는지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동안 내가 얼마나 무심했던가... R에게 감사하단 생각이 들었다.


안 좋은 예감을 탓할게 아니라, 그 예감의 충격을 최소화할 수 있는 준비가 필요한 것이다.

누군가 찾아오길 바랄게 아니라, 내가 먼저 찾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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