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에는 우리 술, 연휴에는 맥주를.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늘 가윗날만 같아라. <김매순, 열양세시기>
오랫동안 추석으로 불렸던 우리 민족 최대 명절은 이제 한가위라는 표현이 더 친숙하다. ‘한’은 크다를, ‘가위’는 가운데를 의미한다. 가위는 신라 시대 베짜기 놀이였던 길쌈놀이에서 유래했다. 한가위의 흔적은 삼국사기에 남아있다. 신라 유리왕 재위 9년, 부녀자들은 7월 열엿새부터 8월 보름까지 길쌈놀이를 한 후, 진 쪽이 준비한 떡과 술을 먹으며 밝은 달 아래서 강강술래를 하며 놀았다. 우리 민족에게 음력 8월 15일, 한가위는 천년 세월이 넘도록 전해지는 큰 명절이었다.
고도의 산업사회 속 파편화 된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수확의 풍요에 감사하는 전통 한가위의 의미를 정의하기는 쉽지 않다. 누구에게는 단순히 휴일에 불과할 수도 있고 다른 이에게는 차례를 준비해야 하는 부담어린 날일 수도, 또 어떤 이에게는 고향의 부모와 친구들을 만나는 설레는 날일 수도 있다.
의미는 각자 다르지만 분명한 건, 한가위가 바삐 살아가는 우리에게 밝은 달을 보는 여유를 선사한다는 사실이다. 조선 시대 한양의 풍습을 기록했던 김매순의 말을 현대적으로 해석하면 ‘카르페 디엠’이 아닐까. 의미와 해석은 다를 수 있지만 한가위에 변하지 않는 유일한 것이 있다. 바로 떡과 술이다.
올해 한가위 차례 상에는 우리 땅에서 자란 농산물과 미생물로 빚은 우리 술을 올려보자. 훌륭한 우리 술을 쉽게 만나볼 수 있는 시대가 됐다. 일제 강점기 유물인 정종은 이제 버려야 한다. 많은 이들이 사라진 우리 술을 복원하고 계승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동안 정종을 드셨던 조상들의 입맛을 바꿔드리는 것도 후손들이 마땅히 해야할 일이다.
우리 술로 가족들과 풍요로운 차례 상을 즐겼다면 남은 음식은 맥주와 함께 하면 어떨까? 명절이 지나면 십 중 팔구 냉동실에는 송편, 전, 동그랑땡 같은 차례 음식이 쌓여있기 마련이다. 기름지고 칼로리 넘치는 차례 음식은 일상 속에서 생각보다 손이 가지 않는다. 딱딱하게 성에가 낀 후에야 음식물 쓰레기로 버려지곤 한다. 여기 위태로운 당신의 냉장고 세계를 구할 수 있는 히어로가 있다. 맥주는 버리면 아까운, 아직 고향의 온기가 남아있는 음식을 맛있게 만드는 멋진 술이다.
맥주가 남은 명절 음식과 좋은 궁합이 될 수 있는 이유는 탄산과 쓴맛 때문이다. 전과 동그랑땡처럼 기름진 음식에는 탄산이 해결사다. 맥주의 풍성하고 섬세한 탄산은 입 안의 기름기를 제거해 느끼함을 덜어준다. 여기에 쓴맛은 갈비찜이나 산적에서 나오는 육향을 부드럽게 한다. 게다가 단맛과 만나면 좋은 균형감을 이룬다.
맥주 스타일에서 나오는 다양성도 한 몫 한다. 100여 개가 넘는 스타일은 한식의 다채로움과 멋진 앙상블을 맞출 수 있다. 밝은 색과 풍성한 탄산을 가진 페일 라거는 향이 기름진 음식과 조화롭고, 어두운 색이 묵직한 포터는 구운 향이 나는 고기류와 어울린다. 섬세한 과일 에스테르 향을 가진 영국 페일 에일은 가벼운 스넥이나 치즈가 좋고 농익은 배향과 흰 후추 향이 있는 트리펠은 기름이 많은 생선과 잘 맞는다.
물론 음식과 맥주의 페어링에 절대적인 기준은 없다. 보완, 대조, 조화 같은 기준에 맞춰 자신만의 조합을 찾아 즐기면 된다. 냉장고 한 귀퉁이를 차지하는 한가위 음식과 어울리는 맥주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명절에 만날 음식들을 생각하며 맛있는 만남을 상상해보자.
명절에 빠지지 않는 음식이 전이다. 차례 상에 올라갈 최후의 음식으로, 기름 냄새를 집안 가득 풍기는 주인공이다. 그럼에도 뺄 수 없는 전은 명절이 끝나고 냉동고 한 쪽을 채우는 주범이기도 하다. 하지만 걱정마시길. 전에 찰떡궁합인 맥주가 여기 있다.
먼저 흰 살 생선으로 만드는 생선전에는 가펠 쾰쉬가 제격이다. 4.8% 가펠 쾰쉬는 독일 쾰른의 정통 맥주다. 에일이지만 저온 숙성을 통해 마치 라거와 같은 모습을 갖고 있다. 섬세한 꿀 향과 가벼운 바디감 그리고 풍부한 탄산을 가진 쾰쉬는 부드러운 생선의 향은 지키면서 눅눅한 기름은 제거해준다.
맥주 베스트말레 트리펠은 또 다른 매력을 선물한다. 트리펠은 9% 알코올에 뭉근한 배향과 수지 향, 흰 후추의 날카로움을 가진 벨기에 밝은 색 에일이다. 배향이 단순한 생선 향미에 맛있는 점을 찍을 때, 알코올과 흰 후추 향은 느끼함을 사라지게 한다. 입 안의 기름기도 싹 날라가니 생선전에 중독되지 않기 위해 조심할 것.
같은 전류지만 육전에는 소고기 육향을 살리면서 기름기를 제거할 수 있는 맥주가 답이다. 필스너 우르켈은 육전과 묘한 궁합을 이루는 녀석이다. 최초의 황금빛 라거, 필스너 우르켈은 설탕을 볶은 듯한 캬라멜라이즈드 향과 사츠 홉의 쌉쌀함을 가지고 있다. 심지어 혀를 묵직하게 누르는 쓴맛도 있다. 캬라멜라이즈드 향은 육향과 만나 고소한 느낌을 증폭시킨다. 알코올은 4.4%로 낮지만 높은 쓴맛이 육전의 느끼함을 흐릿하게 한다. 육전과 맥주의 새로운 세계를 만나고 싶다면 필스너 우르켈을 꼭 쟁여놓자.
꿀과 콩이 안을 채우는 송편은 맛있지만 칼로리가 높다. 냉동실에 있는 송편은 손이 잘 가지 않는다. 하지만 송편이 맥주에 먹는 특별한 간식으로 바뀐다면 어떨까? 바이헨슈테판 비투스는 알코올 도수가 높은 밝은 색 바이젠복이다. 7.2% 알코올 속에 녹아있는 바나나 향이 이 맥주의 정체성이고 배경을 이루는 옅은 정향은 비투스 만의 매력이다.
송편은 비투스와 만나면 바로 무거움을 덜어낸다. 안에 콩이 있든 꿀이 있든 상관없다. 꿀 송편의 단맛과 바나나 향은 둘도 없는 단짝이 된다. 푹 익은 바나나가 건네는 달콤함의 마력을 거부할 사람은 많지 않다. 콩 송편의 퍽퍽함은 비투스의 탄산으로 부드럽게 변한다. 강한 알코올은 그 부드러움을 가볍지 않은 모습으로 바꾼다. 하나의 맥주가 여러 종류의 송편과 만나 서로 다른 조화를 이끌어내는 매력을 거부할 이, 누가 있으랴.
간장 양념으로 만든 고기 산적은 명절 음식의 별미다. 그러나 냉장고에 들어가면 산적은 퍽퍽한 갑옷을 두른다. 아잉거 셀레브레이터 도펠복은 차가운 갑옷을 해제시키는 최고의 파트너다. 7% 알코올에 어두운 색을 가진 도펠복은 건자두, 초콜렛, 섬세한 견과류가 멋진 라거 맥주다.
셀레브레이터의 건자두와 초콜렛 향은 산적을 감싸고 있는 간장 양념의 감칠맛을 최고치로 이끌어낸다. 문제의 퍽퍽함은 탄산과 알코올이 해결한다. 탄산을 머금은 알코올은 퍽퍽한 육질로 스며들어 보들보들하게 만든다. 무서운 산적을 나비처럼 가볍게 만드는 마법의 현장을 보고 싶다면 도펠복을 기억하자.
요즘 약과가 대세다. 소셜미디어를 휩쓰는 약과의 파트너는 커피다. 커피의 씁쓸함이 약과의 달콤함과 만나면 무한 흡입의 밸런스를 만든다. 맛있지만 약과와 커피의 만남은 결과가 충분히 예상된다. 하지만 벨기에 맥주, 두체스 드 브루고뉴라면 어떨까? 플랜더스 레드 에일, 두체스 드 브루고뉴는 신선한 체리와 자두 향을 품고 있다. 적당한 단맛 뒤에 새콤한 산미는 이 맥주만 가지고 있는 매력이다.
약과와 두체스 드 브루고뉴의 조합은 색다르지만 강한 흡인력이 있다. 맥주의 새콤함은 약과에 달콤함을 더한다. 체리와 자두 향은 단맛에 치중된 밸런스를 다시 원점으로 되돌린다. 상큼한 과일 향이 스며든 약과는 흔치 않은 색다름이다. 모든 맛을 빨아들이는 블랙홀, 한 번 빠지면 헤어 나올 수 없으니 주의하라.
형형색색 한과는 누구나 좋아하는 명절 간식이다. 바삭하지만 끝이 살짝 끈적이는 식감은 매력이지만 지루하다. 한과의 이런 약점은 뉴잉글랜드 IPA을 만나면 사라진다. 뉴잉글랜드 IPA는 빛이 투과되지 않는 불투명함, 마치 오렌지와 망고 쥬스 같은 열대과일 향, 낮은 쓴맛과 묵직한 질감을 자랑하는 맥주다.
한과와 멋진 매칭을 보여주는 뉴잉글랜드 IPA로 부산을 대표하는 크래프트 브루어리 고릴라의 뉴잉 IPA를 들 수 있다. 뉴잉 IPA는 강력하고 진득한 망고와 자몽 쥬스를 마시는 것 같다. 한 모금의 뉴잉 IPA는 단순했던 한과의 옷을 아름다운 한복으로 바꾼다. 7.2% 알코올이 자칫 한과를 덮을 수 있다는 우려는 붙들어 매놓자. 입 안에 끼어있는 끈적임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니.
한가위는 노는 날이다. 노동의 부담에서 해방되어 오랜만에 보는 가족들과 먹고 즐기는 날이다. 떡과 술은 천 년 전부터 한민족에게 빠질 수 없는 음식이었다. 유난히 긴 한가위 연휴에 좋은 술과 음식을 만나는 것도 행복이다. 맥주가 남은 명절 음식을 처리하는 수단이라도 상관없다. 멋진 우리 술과 맥주로 한가위를 더욱 뜻있게 보낼 수만 있다면. 물론 과음은 불행의 또 다른 이름임을 잊지 말자. 모두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멋진 9월 말 한가위 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