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주의 시선>을 출간하며
1년 전 여름이었다. 아침 9시에 전화가 왔다. 070으로 시작하는 번호였다. 전날 밤늦게 까지 작업을 하고 늦잠 자던 중이었다. 살짝 짜증이 났지만 무시하고 다시 누었다. 그런데 잠시 뒤 다시 진동이 울렸다. 이번에는 문자였다. 역시 070으로 시작하는 문자. 아침부터 스팸 전화와 문자라니, 화가 치밀었다. 삭제하려고 핸드폰을 들여다보는 순간, 익숙한 단어가 눈에 들어왔다.
오마이뉴스 조OO 기자입니다. 전화 부탁드립니다.
설마 오마이뉴스를 빙자한 피싱 문자는 아니겠지? 난 오래전부터 오마이뉴스 10만 인 클럽이었고 가끔씩 시민기자로 맥주 관련 기사를 송고하고 있었다. 기사는 매번 ‘으뜸’이 되어 메인에 실렸지만, 바쁘다는 핑계로 자주 기사를 쓰지는 못했다. 요즘 기자도 사칭해서 피싱을 하나? 미덥지 않았으나 왠지 피싱이라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침대에서 일어나 자세를 고쳐 앉은 후, 070이 찍힌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다행히 전화를 받은 사람은 진짜 오마이뉴스 기자였다.
2022년부터 오마이뉴스에 연재되고 있는 프리미엄 시리즈 ‘맥주실록’은 이렇게 시작됐다. 처음 연재를 제안받았을 때 솔직히 조금 놀랬다. 오마이뉴스는 시민기자의 기사라고 모두 채택하지 않는다. 송고된 기사는 세상에 내보낼 가치가 있는지 평가와 검토를 받은 후, 잉걸, 오름, 으뜸으로 분류되어 오름과 으뜸이 온라인 지면에 실린다. 프리미엄 시리즈에 올라가는 글은 검증된 기사라는 의미였다. 당연히 설렐 수밖에. 고민할 거리도 없었다.
우선 매주 한 편씩, 25~30주 분량을 기획했다. 일주일에 4~5000자 분량의 맥주 글이라...글 쓰는 건 좋아하지만 게으른 나에게 일종의 도전이었다. 하지만 때론 압박감은 좋은 동기가 되곤 한다. 브루펍 대표, 맥주 양조사, 맥주 강사로 바쁜 나날을 보내야 했지만 도전해 보기로 했다. 시리즈 제목은 ‘맥주실록’으로 정했다. 맥주 하나하나에 담긴 사연들이 인문학이라는 큰 줄기를 타고 실록처럼 이어지기를 바랐다.
어떤 맥주들을 선정할지 가장 고민됐다. 맥주와 연결된 사연이 독자들에게 재미와 가치를 전달해야 했다. 국내에서 마실 수 있는 맥주인지도 관건이었다. 경험할 수 없는 맥주는 신기루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맥주 스타일도 고른 배분이 필요했다. 역사, 도시, 예술, 경영, 문화로 큰 주제를 분류한 후, 30~40개의 후보를 선택했다.
첫 글의 주인공은 가장 잘 아는 맥주로 하기로 했다. 살면서 가장 많이 마셔본 맥주, 제일 좋아하는 맥주 그리고 세상에 알릴만한 사연과 가치가 있는 맥주여야 했다. 나에게 이런 맥주는 최초의 황금색 라거, 필스너 우르켈이었다. 너무나 잘 아는 맥주여서 금방 쓸 줄 알았던 첫 글은 이틀 밤을 꼬박 새우게 만들었다. 오랜만에 하는 밤샘 글쓰기였지만 놀랍게도 정신이 말짱했다. 긴장과 설렘이 만든 각성효과였다.
2022년 8월 13일 첫 기사가 오마이뉴스 메인에 올라왔고, 감사하게도 많은 분들이 읽어주셨다. 30개를 기획했던 기사는 2023년 9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번에 출간한 <맥주의 시선>은 맥주실록에 실린 34개의 맥주 글을 활자화 한 책이다. 어색한 문장을 수정하고 부족한 정보를 보완해 더 매끄럽고 보기 쉽게 정리했다. 챕터는 ‘전통을 잇는 수호자들’, ‘격동의 역사, 고고한 맥주’, ‘개척과 도전의 바닷속으로’, ‘예상을 뛰어넘는 발자취’, ‘도시, 맥주 속으로 노을 지다’, ‘문화와 함께 춤을’로 총 6개로 구성됐다.
첫 번째 챕터 ‘전통을 잇는 수호자들’은 밤베르크 훈연맥주 슈렝케를라와 브뤼셀 람빅 깐띠용처럼 오랫동안 전통을 이어온 사람과 맥주 이야기를 담았다. 직접 현장을 다녀온 경험을 바탕으로 전통을 지키는 모습을 전하고 싶었다. ‘격동의 역사, 고고한 맥주’는 인류가 겪은 격동의 역사에 들어있는 맥주 이야기다. 제정 러시아의 마지막을 품고 있는 올드 라스푸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멕시코 제2 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등 숨 가빴던 역사를 맥주를 통해 재조명했다.
‘개척과 도전의 바닷속으로’는 도전으로 똘똘 뭉친 사람과 맥주를 이야기했다. 크래프트 맥주 혁명을 일궈낸 시에라 네바다의 캔 그로맨, 우주 효모로 맥주를 만든 닌카시 그라운드 컨트롤 등 맥주가 끊임없는 개척과 도전 정신의 산물임을 알려준다. ‘예상을 뛰어넘는 발자취’는 맥주를 넘어 인류 발전에 큰 영향을 끼친 맥주들을 담고 있다. 인종 차별에 맞선 맥주, 블랙 이스 뷰티풀, 효모 순수 분리 배양으로 생물학 발전에 큰 기여를 한 칼스버그 등 맥주가 사회 문화적으로 끼친 영향을 전달한다.
‘도시, 맥주 속으로 노을 지다’는 도시와 맥주가 왜 공동 운명체인지를 말하고 있다. 베를린, 드레스덴, 런던, 쾰른 등 직접 방문한 도시 속 맥주들을 조명했다. 마지막 챕터인 ‘문화와 함께 춤을’은 맥주와 얽힌 문화 예술을 이야기하고 있다. 괴테, 라푼젤, 아드리안 브라우어 등 맥주가 속삭이는 문화와 예술을 담았다. 맥주와 도시, 예술이 동 떨어진 존재가 아님을 마지막 두 챕터를 통해 알 수 있다.
가장 중요한 건, 맥주 인문학이라는 생소한 분야를 쉽고 재미있게 풀어내는 일이었다. 독자가 책에 푹 빠져 시간 가는 줄 모른다면. 작가로서 가장 행복하고 뿌듯한 일 아닐까. 그리고 그 순간, 맥주실록을 연재하고 맥주의 시선을 출간한 목적이 자연스럽게 얼굴을 내밀 것이다. 맥주가 세상을 이롭게 하는 것, 맥주가 사람들의 인생을 풍부하게 하는 것, 맥주가 사회 연대에 도움이 되는 것. 희망하건대, 맥주의 시선이 이런 가치에 미약하게 일조할 수 있다면 좋겠다.
한 손에는 맥주 한 잔, 다른 한 손에는 맥주의 시선을 들고, 지화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