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인의 눈으로 본 미국 금주법
1919년부터 1933년까지 미국이 실행했던 금주법(Prohibition)은 저 멀리 조선에도 화제였나 보다. 가혹한 일제 강점기임에도 당시 신문에는 세계를 향한 조선인들의 호기심과 훈수가 담겨 있었다. 술을 금지하다니, 풍류를 사랑한 우리 민족에게 사뭇 황당한 일이 아니었을까?
미국에서 금주법이 시작된 1920년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창간된 해다. 삼일운동으로 놀란 일제는 한국인 민간 신문 발행을 허가하며 분위기를 전환시키려 했다. 창간 초기 두 신문은 민족 정론지에 가까웠다. 항일 소식을 전했으며 조선인의 의견과 감정을 가감 없이 드러내기도 했다.
신문에는 술 관련 기사도 있었다. 사건사고, 제보와 고발은 물론 세태에 대한 비판도 들어있다. 놀랍게도 맥주 이야기도 있다. 당시 맥주의 위상은 어떠했는지, 조선인들은 맥주라는 술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우리 맥주의 역사는 어떻게 시작됐는지도 볼 수 있다.
1933년 일본이 송하기린맥주주식회사와 조선맥주주식회사를 설립하기 전, 맥주는 값비싼 수입주류였다. 언제부터 맥주가 조선에 들어왔는지 확실하지는 않다. 하지만 당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를 보면 맥주는 꽤 알려진 술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물론 소수의 있는 자들이 마시던 술이었지만 적어도 포도주와 위스키보다는 대중에게 친숙했다.
시나브로 서양 술이 유입되던 시절, 우리말 신문으로 접하는 바깥소식은 얼마나 신기했을까? 게다가 태평양 건너, 까마득한 곳에 있는 미국에서 술을 전면 금지했다는 풍문은 저잣거리의 화제였을 게 분명하다.
1920년부터 10년에 걸쳐 두 신문에 실린 금주법에 대한 반응을 보면 우리 민족이 갖고 있던 술에 대한 인식과 문화를 이해할 수 있다. 더 나아가 미국 금주법을 꾸짖는 패기도 읽을 수 있다. 미국에 훈수 두는 조선인들의 모습, 흥미롭지 않은가?
한반도에서 삼일운동이 일어났을 때, 미국은 모든 주에서 주류 판매를 금지했다. 한 국가가 금주법을 실행한 건, 인류 역사 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런 어마무시한 일이 쉽게 결정될 리 만무하다. 영국에서 독립한 신생 국가 미국은 짧은 기간 동안 음주로 심각한 부작용을 겪고 있었다.
주로 문제를 일으킨 술은 증류주였다. 옥수수가 풍부했던 미국은 포도주와 맥주보다 증류주가 흔했다. 증류주는 개척 시대 고단한 삶을 달래주는 손쉬운 방법이었다. 농민과 노동자, 특히 남자들에게 음주는 일상적인 일이었다.
청교도 정신을 바탕으로 탄생한 미국이 무분별한 음주에 마냥 손을 놓고 있었던 건 아니었다. 식민지 시대부터 주류 판매 제한 법률이 있었고 독립 후에도 주세를 통해 통제를 했다. 위스키 같은 증류주에는 더 강한 제약을 두기도 했다.
그럼에도 미국인들은 술을 마셔도 너무 마셨다. 증류주 소비는 계속 증가했다. 결국 사회 곳곳에 많은 문제들이 드러났다. 알코올에 빠진 가장들로 가정 폭력이 빈번했고 소득의 대부분을 술에 탕진해 가정은 파탄 났다. 노동 효율도 크게 저하됐다.
1830년 미국인의 증류주 소비량은 일주일에 1.7병에 달했다. 성인 남성은 물론 미성년자까지 포함한 수치였다. 19세기 들어 몇몇 주에서 금주운동이 시행됐다. 가장 앞장선 이들은 여성이었다. 심각한 가정 폭력을 견디지 못한 여성들이 거리로 뛰어나왔다.
1826년 결성된 미국금주협회는 최초의 금주운동 단체였다. 1835년에는 회원수가 150만 명에 이르렀는데, 그중 50%가 여성이었다. 종교 지도자들도 동참했다. 목사들은 술과 정치적 부패를 연결시키기도 했다.
금주운동은 자연스럽게 여성 참정권과 인권운동으로 번졌다. 그러나 1861년 발생한 남북전쟁은 이 흐름에 찬물을 끼얹었다. 전쟁에 참여한 군인들은 심리적 좌절감과 불안감을 잊기 위해 술을 가까이했고 정부는 주세를 통해 세금을 충당했다.
남북전쟁 이후 음주문제가 더욱 심각해지자 다시 여성들이 일어났다. 1874년 창설된 여성기독교금주연맹이 중심이 됐다. 특히 2대 회장 프랜시스 윌라드는 금주운동과 함께 여성인권운동을 이끌며 미국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
1881년 캔자스 주의 금주법을 이끈 케리 네이션도 금주운동의 신화적인 인물이었다. 여성기독교금주연맹 지부장이었던 그녀는 술집에서 기도를 하는 캠페인을 벌였을 뿐만 아니라 손도끼로 손님들의 술병을 깨는 폭력도 서슴지 않았다. 30번 넘는 체포를 당했지만 케리 네이션의 활약은 금주법으로 이어졌다.
전국적으로 조직된 금주운동연맹은 정치권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금주운동에 반대했던 오하이오 주지사가 낙선하자 금주법에 찬성하는 의원들이 늘어났다. 1917년 드디어 술을 금지하는 수정헌법이 제안되었고 12월에 통과됐다. 때마침 일어난 1차 세계대전이 도화선이 됐다. 독일인에 대한 반발심이 맥주 양조를 반대하는 명분이 된 것이다.
1919년 1월 16일 수정안은 36개 주의 찬성으로 비준됐고 같은 해 10월 의회가 통과시키며 볼스테드 법(Volstead Act)으로 알려진 금주법이 선포됐다. 약용 알코올과 종교 성찬주를 제외하고 모든 술 판매가 금지됐다. 인류 최초로 국가 단위 영구적 금주법이 실행된 것이다.
1920년 시작된 금주법은 마침 같은 해 창간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에도 전해졌다. 1920년 7월 26일 조선일보 3면을 보면 금주법에 대한 미국의 태도를 알 수 있다.
미국은 자신들의 결정이 자랑스러웠던 모양이다. 금주법이 미국의 사회적 도덕심을 고취시키고 경제도 성장시켰다는 자부심이 가득하다. 시간이 지나면서 단순 보도에 그쳤던 금주법은 논평의 대상이 됐다. 한반도에도 뭔가 부정적인 소식이 전해졌던 것 같다. 1923년 5월 20일 조선일보 2면에는 ‘미국금주폐해’라는 자극적인 제목이 실렸다.
짧은 기사지만 기계적 균형을 맞추기보다 부정적인 폐해를 끄집어냈다. 금주법에 대한 조선인들의 단호하고 명확한 시선을 엿볼 수 있다.
동아일보는 칼을 갈고 나왔다. 6월 10일 기사는 금주법 문제를 조목조목 비판하고 있다. 미국금주령반대협회 고문 ‘란 솜 엣취 찔레트’의 의견에 무려 3면 전체를 할애하여 소개하고 있다. 미국금주령반대협회는 아마 1918년에 설립된 금주법제정반대협회(Association Against the Prohibition Amendment)를 의미하는 듯하다. 제목도 도발적이다.
기사는 금주령을 반대하는 찔레트와 찬성하는 부라이언의 의견을 나란히 제시하지만 형식적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금주령을 폐지하라.’라는 찔레트의 주장을 부각하며 금주법이 문제가 있다는 쪽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계속해서 기사는 ‘금주령을 폐지하라’, ‘이익설은 공론’, ‘경제상 논거’, ‘금주실행은 허설’, ‘도덕방면의 고찰’으로 소제목을 전개하며 금주가 경제사회적으로 이익이 있을 수 있으나 부작용이 더 크다고 주창한다.
비판은 차갑고 논리적이다. 우선 경제적으로 밀주가 성행하여 지하경제가 발달했고 양조업자와 농민들이 궁핍한 삶을 살고 있다고 꼬집었다. 사회적으로는 가난한 자들의 불법 음주로 건강이 훼손되었으며 도덕적으로는 마피아의 범죄와 공무원들의 부패가 증가되었다고 비평했다.
눈에 띄는 부분은 ‘금주령 온건파’의 의견이다. ‘양종으로 구별하야’라는 소제목을 통해 포도주와 맥주 같은 양조주는 증류주와 도덕상 법률상 구별을 두어야 한다는 주장을 실었다. 맥주처럼 알코올이 낮은 술을 허용했으면 일반 사람들이 법을 잘 지켰을 것이고 국가도 세금을 합법적으로 걷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훈수다.
가히 최고의 대안이 아닌가. 미국이 실제적 금주국이 될 수 있는 해법을 적확하게 제시하고 있다. 기사 전반에 걸쳐 ‘술을 금지하다니 말이 돼? 인간의 본능을 우습게 본 거 아냐?’라는 비웃음이 묻어난다. 금주법을 선포하며 도덕적 우위를 뽐내던 미국을 제대로 한 방 먹이고 있다.
그렇다고 조선인들이 술 자체를 마냥 옹호한 것은 아니다. 술의 부정적인 측면을 다루는 기사도 있다. 국가가 술을 금지하는 법을 제정했다는 사실에 황당해할 뿐이다. 1926년 7월 27일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는 금주령이 사망률을 더 높였다는 기사를 동시에 게재했다.
금주법 시대에 사는 미국인을 풍자하는 기사도 있다. 1928년 4월 27일 동아일보 3면에는 그림 한 장이 크게 실렸다.
조선인들에게 미국을 말하면 ‘금주’부터 떠올렸을 것 같다. 미국 앞에는 금주가 호처럼 붙어있다. 금주법의 효력이 다해갈 즈음이었던 1933년 5월 4일 조선일보 3면에 게재된 한월성의 기고는 감탄이 나온다. 한월성은 ‘금주법하 미국사회연구’라는 글을 통해 동서양 역사 속 술의 기원과 의미, 해악과 이로움 그리고 세계 금주법의 현황과 향후 미국의 움직임을 예측했다. 술에 대한 방대한 지식과 내용의 디테일은 지금 봐도 놀라울 뿐이다.
한월성은 금주법은 인류 역사에 종종 있어왔지만 특별한 경우였다고 서술한다. 술의 폐해가 극에 달했거나 전쟁과 천재지변 등 비정상적 사정이 있을 때 일시적으로 존재했을 뿐, 지속성은 어불성설이라고 말했다. 심지어 백제 다루왕, 고려 충숙왕 때 금주령을 예로 들기도 한다. 그리고 미국도 조만간 영구적 금주법이라는 허상을 벗고 수년 안에 해제될 것이라 예상했다.
한월상의 예언은 맞아떨어졌다. 7개월 뒤 금주법이 폐지됐다. 1933년 12월 7일 조선일보 1면에는 ‘미국 금주법 철폐’라는 사설이 크게 실렸다.
구글이 필요 없을 정도 아닌가. 조선일보 1면에 실린 이 글은 금주법 실패의 원인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애송이에게 한 수 알려주는 어른의 가르침 같다. 혜안과 통찰이 놀라울 따름이다. 일제 강점기라 가슴 한편이 아리지만, 다른 한 구석에는 뭉클함이 밀려온다.
미국이 금주법을 철폐한 1933년, 일본 자본과 기술로 서울에 최초의 맥주 회사가 설립됐다. 우리 맥주의 역사를 더듬어 보는 건, 그 시대를 살았던 우리 자신을 바라보는 일이다. 사부작 들여다보자.